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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鄭敾]

진경산수화의 개척자

1676년(숙종 2) ~ 1759년(영조 35)

정선 대표 이미지

정선 필 경교명승첩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 한 점의 붓 흔적이나 먹 자국도 없는 완벽한 그림을 그리다.

조선성리학을 이념기반으로 하여 조선고유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는 시기를 ‘진경시대’라고 할 때 겸재 정선은 이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율곡학파의 정통학맥을 이은 성리학자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회화미로 표현해내는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하였다. 금강산을 비롯하여 관동팔경, 한양진경 등 조선의 산천을 우리 고유의 정서와 화법으로 그려냄으로써 그 진면목 즉 진경을 드러낼 수 있게 하였다.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게 된 연유이다.

진경회화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로 대표되는데 진경산수화의 경우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회화의 토착화를 이루었고 풍속화의 경우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그려냄으로써 회화 소재의 폭을 확대하였다. 겸재 정선으로부터 시작된 진경회화는 현재 심사정(沈師正), 표암 강세황(姜世晃)을 거쳐 단원 김홍도(金弘道)와 혜원 신윤복(申潤福)에서 마무리된다.

정선이 세상을 뜨자 30년 지기이자 이웃사촌인 관아재 조영석(趙榮祏)은 애사를 지어 그의 일생을 총평하면서 그림뿐만 아니라 경학에도 깊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중용』과 『대학』을 논할 때 처음과 끝을 꿰뚫는 것이 마치 자기 말하듯 하였고, 만년에는 『주역』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힘써 손수 뽑아 베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 창암 박사해(朴師海)는 정선이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나 그림으로 덮여 버려서 아는 이가 없고 세상에 그 화명만 남았으니 불우하다고 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한유의 문장과 같다고 한 말처럼 그의 작품이 갖추고 있는 품격을 말하고자 함일 것이다.

겸재 정선은 사천 이병연(李秉淵) 등과의 교유를 통하여 진경문화 세계에 대한 감수성을 확장하며 일상 속의 자연과 생활을 회화의 소재로 삼았다. 기행의 대상지였던 금강산 일대나 지방수령을 역임했던 관동지방, 한강유역 등의 명승지들, 그리고 자기 집이 있었던 인왕산 계곡 일대를 사생하며 금강산 일만이천봉, 동해안 바위, 인왕산 봉우리와 계곡 등에서 세부적인 표현법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정선이 전국을 두루 여행하고 사생하면서 사용한 붓을 묻으면 무덤을 이룰 정도라고 한다. 또 거의 집집마다 그의 그림을 수장하고 있다고도 한다.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담고 있는 감동과 사실성은 〈금강전도〉 제시의 “발로 밟아서 두루두루 다녀 본다 하더라도 어찌 베갯머리에서 이 그림을 마음껏 보는 것과 같겠는가”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또 정선의 그림을 본 중국 사람들이 우리 산천을 보고 나서 이르기를 정선의 필력이 신묘함을 알겠다 한다고 한다.

이규상은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화주록(畵廚錄)」에서 정선의 그림을 평하였는데 생동하여 원기가 있으며 한 점의 붓 흔적이나 먹 자국도 없는 완벽한 그림이라고 극찬했다. 화성(畵聖)으로 추앙 받아도 결코 손색이 없는 화가라 이를 만하다.

2 가계와 생애

본관은 광주이다. 5대조 정응규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고조부 정연(鄭演)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명문에 속하던 가문이었으나 증조부 정창문이 40세의 나이로 선교랑의 품계만 받은 채 돌아가자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조부 3형제 중 정선의 조부만 서울에 남고 나머지는 고향인 나주로 내려갔다. 부친 정시익(鄭時翊)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희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외조부 박자진(朴自振)은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박충원(朴忠元)의 현손이고 광해군대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朴承宗)의 당질로 명문 출신이었으나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선은 1676년(숙종 2)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에서 정시익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에 아버지를 여윈 후 생활이 어려워지자 외조부의 도움을 받았고, 큰 외숙 박견성의 후원으로 삼연 김창흡(金昌翕)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진경시문학을 일으켜 진경문화를 선도하고 있던 스승의 지도 아래 인왕산 일대의 진경을 사생하는 수련을 거칠 수 있었다. 삼연 김창흡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사천 이병연과 함께 스승의 총애를 받으며 진경문화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훗날 이병연은 진경시풍을, 정선은 진경화풍을 대성시키며 교유를 계속 이어갔다.

그 사이에 정선은 송규병의 장녀인 연안 송씨와 혼인하여 29세(1704년, 숙종 30)에 큰아들 정만교를, 35세(1710년, 숙종 36)에는 둘째 아들 정만수를 얻었다.

1711년(숙종 37, 36세)에 처음으로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후 《신묘년풍악도첩》을 그렸다. 이듬해(숙종 38, 37세)에도 금강산 입구 마을인 금화현감으로 있던 이병연의 초대로 다시 금강산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금강산 그림 21폭을 그려 이병연에게 선물하였다.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스승 삼연 김창흡이 제화시를 써 주니 진경시화합벽의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알려지게 되면서 정선은 널리 화명을 날리게 되었다. 또 이를 계기로 당시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천거하여 음직으로 벼슬길에도 나갈 수 있었다.

39세(1714년, 숙종 40)의 나이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위솔(衛率)이라는 관직으로 첫 출사를 하게 된 정선은 한성 주부를 거쳐, 46세(1721년, 경종 1)에 경상도 하양현감(종6품)을, 54세(1729년, 영조 5)에 의금부도사를, 58세(1733년, 영조 9)에 경상도 청하현감(종6품)을 지냈다. 하양현감으로 있을 때에 영남 군현의 명승지를 사생하여 《영남첩》을 만들었고, 청하현감으로 재임할 당시에는 친구 이병연이 삼척부사로, 이병연의 동생 이병성(李秉成)이 간성군수로 있었으므로 왕래하며 간성, 삼청, 청하 등 동해안 일대를 사생하여 관동의 명승을 그릴 수 있었다.

65세(1740년, 영조 16)에는 양천현령(종5품)에 임명되었는데 이 시기 양천현 일대의 한강변 경치를 그려 이듬해 《경교명승첩》을 완성했다. 《경교명승첩》에는 정선이 자신의 평소 모습을 그린 자화상으로 유명한 〈독서여가도(讀書餘暇圖)〉와 이병연과의 교유의 일면을 보여주는 〈시화환상간〉도 수록되어 있다.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떠나면서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하고 이병연이 진경시를 지으면 그에 맞춰 자신이 진경산수화를 그리기로 하였는데 바로 그 장면을 그린 그림이 〈시화환상간〉이다. 이 그림과 짝을 이루는 이병연의 시도 있다. 신돈복의 『학산한언(鶴山閑言)』에 의하면, 이병연은 정선의 그림이 중국에서 값비싸게 거래되었으므로 그의 그림을 팔아서 중국 서적을 많이 구입했는데 〈시화환상간〉만큼은 천금을 주어도 팔지 않겠다는 약조를 했다고 한다.

양천현령에서 물러나 인왕산 계곡의 집으로 돌아온 다음 해(1746년, 영조 22)에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에 사경도를 그렸다. 이황(李滉)이 퇴계에 물러나 살며 『주자서절요서』를 짓는 장면을 그린 〈계상정거〉, 정선의 외조부 박자진이 무봉산에 은거하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주자서절요서』에 대한 발문을 받아오는 장면을 그린 〈무봉산중〉, 이를 보관하고 있던 청풍계 외가의 모습을 그린 〈풍계유택〉, 인왕산 계곡에 있는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 등 네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퇴우이선생진적첩》은 퇴계의『주자서절요서』와 우암의 발문을 합친 두 선생의 글씨첩인데 외조부 박자진이 만들어놓은 것을 외가에서 물려받아 그 조성과 전수과정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려 넣고 가보로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 작품은 율곡학파의 학맥을 이은 성리학자 정선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고, 진경회화와 관련해서 보면 이야기가 있는 진경풍속도의 탄생이라고 할만하다.

72세(1747년, 영조 23) 되던 해 아우가 타계하자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금강산 여행을 떠나 또 한 번 금강산 그림을 그려 《해악전신첩》을 만들었고, 76세(1751년, 영조 27)에는 벗 이병연이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병연의 집 뒷산인 북악산에 올라 자신의 집이 있는 인왕산 계곡 일대를 바라보며 비 개는 인왕산의 모습을 그렸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슬픔이 《해악전신첩》과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라는 명작으로 승화되었다.

1752년(영조 28, 77세)에는 정선의 영남명승지 진경산수화 8폭 병풍을 감상한 사도세자가 제화시 8수를 남겼다.

79세(영조30, 1754)에 사도시 첨정(종4품)의 벼슬을 받았고, 이듬해에 첨지중추부사(종3품)에 제수되었다. 또 다음해에도 왕대비 칠순을 기념하여 다시 70세 이상 조관에게 1품을 더해주니 동지중추부사(종2품)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759년(영조 35)에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명성과 천수를 모두 누린 삶이었다.

생애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정선은 숙종대 말 화명을 얻고 주로 영조대에 활동을 했다. 따라서 영조(英祖)가 그림 명성이 전국에 가득했던 정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추정해보게 된다. 정선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는 영조는 정선을 부를 때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호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 스승으로 예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스승에 이어 영조가 세제로 있을 때 영조를 호위하며 인연을 이어갔던 정선은 영조 재위시에는 청하현감, 양천현령 등에 임명되어 주변 명승지의 진경들을 사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말년에는 품계가 당상관에 올랐다.

3 정선의 작품 세계 - 진경산수화풍이 완성되는 과정

정선은 60세 즈음 자기만의 진경산수화 화법을 터득하는데 《관동명승첩》(1738년, 63세)에서 진경화풍을 확립하고, 《청풍계》(1739년, 64세)에서 완벽한 구도와 겸재식 화법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후 《경교명승첩》(1741년, 66세), 《양천팔경첩》(1743년 경, 68세)과 《해악전신첩》(1747년, 72세) 등을 통해 절정에 오른 겸재화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인왕제색도〉(1751년, 76세)에서 노련한 진경산수화법의 필력을 마음껏 구사한 뒤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1753년~4년 경, 78~79세)에서 진경화풍을 마무리하였다.

《경교명승첩》은 양천현 일대의 한강변 경치를 선유하는 시각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청록계의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필치를 구사하여 강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양천팔경첩》은 한강변 경관 중 양천현아 부근에서 바라다볼 수 있고 8대 명승지를 선별해서 집중적으로 사생한 것인데 《경교명승첩》의 총도 형식에서 각 부분을 분리 확대하는 방법으로 8경을 추출한 것이다. 이 두 화첩은 다양한 겸재식 화법이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청풍계》는 바위 처리나 소나무 그리는 법, 음양조화의 화면구성법 등 겸재특유의 진경산수화법의 특징이 모두 갖추어진 작품이다.

금강산 그림의 대표작가라 할 수 있는 그는 여러 차례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 36세에 그린 《신묘년풍악도첩》은 가장 초기의 금강산 그림으로 북방화법과 남방화법을 고루 수용하고 주역음양원리의 조화를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바로 다음해에 그린 금강산 그림은 정선에게 화명을 안겨주었던 《해악전신첩》이다. 이 두 작품을 비롯하여 그동안 정선이 그려온 금강산 그림들의 총결산편에 해당하는 금강산 그림이 다시 한 번 그려졌다. 72세에 그린 《해악전신첩》이 그것인데 1712년(숙종 38, 37세)에 그린 《해악전신첩》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을 구별하기 위해서 앞서 그린 《해악전신첩》을 《전해악전신첩》, 나중에 그린 《해악전신첩》을 《후해악전신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 개의 《해악전신첩》을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데, 안타깝게도 《전해악전신첩》은 전하지 않는다. 30대의 정선이 그린 금강산의 모습은 70대에 접어든 노인 정선이 그린 금강산과 어떻게 달랐을까.

《장동팔경첩》은 두 개의 본이 있다. 앞서 그린 것은 대상의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요체를 간명직절하게 표현했고, 뒤에 그린 것은 대담한 생략과 함께 화면구성이 단순해져서 추상화가 더욱 진전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와 함께 최만년기의 정양사(正陽寺) 그림은 진경을 극단적으로 이상화시킨 겸재 진경산수화의 마지막 지향을 보여준다.

정선은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필법, 구도, 구성 등에서 독창적 화법을 운용하였고 조선의 산천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겸재파라 불리게 되는 화풍을 만들어갔다. 그는 정밀 묘사법과 사의화의 표현법을 모두 사용하여 다양한 회화의 기법을 구사함으로써 그림의 대상에서 얻은 인상을 독창적으로 재구성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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