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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曺植]

산림에 묻혀 학문에만 정진한 대학자

1501년(연산군 7) ~ 1572년(선조 5)

조식 대표 이미지

조식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16세기 후반 재야 지식인 조식의 삶과 활동

16세기 사화(士禍)를 겪은 후 등장한 사림들은 각각의 근거지에서 명망을 쌓으며 자신들의 학풍과 정치성향을 만들어갔다. 학파의 형성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는데, 조식은 이 시기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거봉이 되었다. 이황(李滉)이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였다면, 조식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동인 정파는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조식은 두 차례의 사화 이후 관직을 포기하고 재야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였다. 처사(處士)로서 그는 실천 위주의 학문 수행과 후학 양성은 물론, 정치 문제에서도 방관하지 않고 국왕에게도 직언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문도들은 곽재우(郭再祐) 등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 의병활동을 하거나, 광해군(光海君) 시절 주류 정치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몰락한 뒤, 더 이상 재기하지 못하였다.

2 16세기 후반 사림의 등장과 활약

16세 전반은 사회적으로 성장한 사림과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의 대립 속에서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기였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 경제의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 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격돌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진 사림인 조광조(趙光祖)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학문적 미성숙과 과격성 때문에 실패하게 되었다. 훈구파의 전횡에 질려 신진 사림에 힘을 실어 주려 했던 중종[조선](中宗)도 결국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들이 죽거나 귀향을 가게 되었다. 혼란한 시국에 사림들은 귀향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게 되는데, 이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서이다.

그렇지만 1545년 명종[조선](明宗)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해 사림들은 또 한 차례의 화를 입게 된다. 을사사화는 외척간의 갈등에서 발단된 것이지만, 양편에 사림들이 가담하여 결국 사림간의 갈등이라는 성격을 지녔다. 연이은 사화로 사림의 기세가 꺾였지만 이미 전국적으로 확대된 사림의 정계 진출은 막을 수 없었다.

16세기 후반 선조[조선](宣祖)는 즉위와 함께 사림인사들을 대거 등용하고, ‘목릉성세(穆陵盛世)’라 불리는 문치의 절정기를 이룩하였다. 영남 지역에서 이황과 조식 양대 학자가 있었고, 서울 근교의 성수침(成守琛), 호남의 기대승(奇大升), 김인후(金麟厚) 등 명망 높은 사림학자들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관료학자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벼슬을 포기하고 재야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문인들 사이에 공유하는 학풍과 정치성을 띠게 되면서 정파와 학파를 아우르는 붕당을 형성해 갔다. 영남학파의 두 거두였던 조식과 이황은 동인에서 시작하였지만 향후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과 조식을 중심으로 하는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조식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은 후 과거를 포기하고 경학의 탐구와 수행 위주의 학문에 몰두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3 재야 지식인의 삶을 선택하다

조식의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또는 산해(山海),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그의 중시조는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조서(曺瑞)로써, 고려 태조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소생인 덕궁공주(德宮公主)가 조겸(曺謙)과 혼인을 통해 낳은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지낸 조언형(曺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인데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이다. 선생의 증조부 생원 조안습(曺安習)이 삼가현(三嘉縣) 판현(板峴)에 자리 잡고 살면서 대대로 후손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조식은 1501년(연산군7)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토동(兎洞)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수려하였으며 남다른 대범함을 지니고 있었다. 9세에 선생이 병이 들었는데, 선생이 아픈 것을 참고 어머니에게 “조금 낫습니다. 하늘이 사람을 태어나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지금 제가 다행히 장부로 태어났으니 하늘이 저에게 부여한 사명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어찌 지금 갑자기 요절할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다고 칭찬하였다.

조식은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단천에서 거주하였는데, 그 동안 다른 선비들과 달리 공부의 범위를 유교경전에만 한정하지 않고, 제자백가, 천문, 지리, 의학, 수학, 병법 등을 두루 공부하였다. 조식은 이 시기부터 자신만의 수양 방법을 터득하였는데, 첫째는 깨끗한 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 꿇어앉아 두 손으로 받쳐 들고서 기울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은 채로 밤을 새우며 자신의 뜻을 가다듬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옷 띠에 쇠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깨우쳐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었다.

18세가 되는 1518년(중종 13) 조식은 아버지의 임지를 떠나 서울 장의동으로 돌아왔고, 이 시기에 성운[중기](成運), 성수침, 이준경(李浚慶) 등과 교분을 쌓았다. 특히 성수침과의 인연이 특별했다. 조식은 성수침이 백악산 밑에 집을 짓고 세상사와 인연을 끊은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와 벗이 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다.

이처럼 성수침은 조식의 처사로서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519년(중종 14) 19세에는 사림이 숙청당한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조식의 숙부 조언경(曺彦卿)도 조광조 일파로 몰려 희생되었다. 부친이 좌천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벼슬길의 험난함을 깨달았지만 어머니의 권유에 못 이겨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 따라서 조식은 진사, 생원 초시와 문과 초시를 보고 급제를 했지만 조식은 진사, 생원 회시에는 응시를 하지 않고 문과 회시에만 응시하여 낙방을 한다. 이때부터 조식은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유학의 본질을 파고드는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1525년(중종 20) 25세에 조식은 산 속에서 공부하다가 성리대전(性理大全)에 기록된 허형(許衡)의 글인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들고자 한 중국 은나라 대신 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삼고, 안자(顔子)가 배운 청빈함 속에서 도를 깨닫는 그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해서 벼슬에 나가서는 경륜을 펴서 업적을 이루고 초야에 있으면서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벼슬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도 없고 초야 에 있으면서는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 하겠는가?” 라는 구절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학문방향과 처신에 대한 결심을 세우게 된다.

이때부터 조식은 모든 공명을 위한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학문은 떨쳐 버리고, 유학의 정수를 공부하기에 전념하였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와 송유(宋儒)들이 남긴 글을 정력을 쏟아 공부하였다. 공자, 주돈이(周敦頤), 정명도(程明道), 주희(朱熹)의 초상화를 그려 4폭의 병풍을 만들어 자리 곁에 펴 두고서 아침마다 우러러 절을 올리며, 마치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이 하였으며 학문을 올바르게 행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하였다.

30세가 되던 해인 1530년(중종 25)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의 신어산 아래로 옮겨가 살았다. 이것은 처사로 살면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는 데 따르는 생활고와 무관하지 않았다. 조식의 부인인 남평조씨(南平曺氏)는 충순위(忠順衛) 조수(曺琇)의 딸이었다. 그의 처가는 상당한 재산가로, 딸에게도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에 부인이 친정으로부터 받은 재산이 김해에 있었던 것이다. 조식은 그곳에 정사(精舍)를 지어 ‘높은 산에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본다.’는 자신의 학문 방법을 함축한 의미의 ‘산해정(山海亭)’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이후 그의 지인인 성운, 이원(李源), 신계성(申季誠), 이희안(李希顔)등이 방문하여 강론을 함으로써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그는 관직을 맡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간신들이 실권을 잡고 있는데 벼슬에 나간다면 ‘숨어 있는 어진 사람을 등용했다.’는 간신들의 명분만 세워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해에서의 18년 생활은 급기야 사림의 기풍을 다시 진작하는 힘이 되었고, 이후 사림은 그를 영수로 추앙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안 조정은 그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그를 벼슬길로 나오도록 했으나 번번이 사퇴하였다. 선생의 학덕이 더욱 익어가고 명망이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더욱 예우를 하고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여 선비의 고고한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4 산림처사(山林處士)를 자처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1548년(명종 3) 48세가 되면 조식은 김해에서의 생활을 접고, 삼가현 토동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하며 산림처사로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강학(講學)하는 장소와 제자들이 거처할 집으로 삼았다. ‘계부’는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가 부화한다는 뜻인데, 학문을 통해서 사람을 길러 내는 것을 이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뇌룡’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처사로서 임하는 자세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조식은 현실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함으로써 재야 지식인으로서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1555년(명종 10년) 55세의 조식에게 벼슬이 내려진다. 삼가현과 가까운 단성현의 현감이었다. 조식은 이 시기 국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내용은 “나라의 기반이 무너져서 하늘의 뜻이 떠나고 백성의 마음도 멀어졌습니다. (중략) 자전(慈殿; 문정왕후)은 생각이 깊지만 구중궁궐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일개 고아이니, 천재가 수없이 일어나고 민심이 끝없이 갈라진 것을 무엇으로 감당하고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당시의 실정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특히 국정에 관여하던 이희안(李希顔)에게 직언을 한 것으로, 명종은 왕대비를 모독 하였다는 죄목으로 처벌하려 하였지만 산림처사(山林處士)의 우국연민(憂國憐民)의 상소를 처벌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부당한 조처라는 조정 신하들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온갖 부조리가 만연하던 당시 정치상황에서 남명의 과감한 직언(直言)은 산림처사의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568년(선조 1) 새로 즉위한 선조(宣祖)가 교서를 내려 특별히 불렀으나 상소를 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역대 임금이 치국에 실패한 전례를 지적하고, “성학(聖學)의 기본은 국왕 자신의 인격 수양과 학문에 있는 것입니다.”고 직간 하고는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조식이 주력한 것은 후학의 양성이었다. 그는 1561년(명종 16)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자신과 제자들의 강학 장소로 삼고 부단히 제자들에게 학문과 기개를 가르쳤다.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구(鄭逑),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김우옹(金宇顒), 김효원(金孝元), 최영경(崔永慶), 오건(吳健), 강익(姜翼), 문익성(文益成), 하항(河沆), 박제인(朴齊仁), 조종도(趙宗道)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대부분 은둔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는 점과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키거나 가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재야 지식인으로 은둔하였다가 국가 위기 상황에서 몸을 아끼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조식의 학문에 있어서 핵심은 경(敬)과 의(義)였다. 조식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고 한다.

경의(敬義)는 “경으로서 안을 곧게 하고, 의로서 밖을 바르게 한다.”는 〈주역〉에 나오는 말로, 조식은 자신이 차고 다니는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고 하는 글귀를 새겼다. 뿐만 아니라 조식은 옛 성현의 말씀 가운데 경과 의에 관한 글을 뽑아 베껴 옆에 두고 외우면서 사색하였으며, 산천재의 왼쪽에는 ‘경’ 오론쪽에는 ‘의’를 써서 붙이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조식이 ‘경’을 통해 수신을 중시하는 학문적 경향과 ‘의’를 통해 절의를 중시하는 처신의 지표를 보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72년(선조 5) 2월 등창으로 고생하던 병을 앓고 있는 조식을 찾은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김우옹은 조식에게 “혹시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게 되면, 마땅히 어떤 칭호를 써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조식은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조식은 이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을 ‘처사’라는 말로써 정리하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이후 조식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5 영향과 계승

후대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후학의 양성 과정에서 시비를 강론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학도를 위하여 경서를 풀이해 주지 않았고, 다만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마음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치용(致用)과 실천을 앞세웠으며, 그 정신과 기풍이 사람을 격려하고 움직이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배우는 자들이 공부가 열리는 일이 많았다고 평가하였다. 요약하자면 후학들이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는 것이고, 후대에도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그의 꼿꼿한 처사로서의 삶도 주목을 받았는데 한가로이 지낸 세월이 오래되자 사욕과 잡념이 깨끗이 씻겨져 천 길 높이 우뚝 선 기상이 있었고, 꼿꼿한 절개로 악을 미워하여 선량하지 않은 향인(鄕人)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멀리했기 때문에, 향인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으며 오직 학도들만이 종유하였는데 모두 심복(心服)하였다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그의 삶의 태도를 살펴 볼 수 있다.

산천재 뒷산에 안장된 조식은 대사간에 이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도덕이 있고 견문이 넓기 때문에 문(文)이요, 도를 곧게 지켜 꺾지 않기 때문에 정(貞)이다’ 라는 문정(文貞)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사후 후학들은 그를 배향하기 위한 서원을 건립하였는데, 1576년(선조 9)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용암서원(龍巖書院), 1578년(선조11)에는 김해(金海)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이 그것이다. 또한 지역 유생들을 중심으로 1617(광해군 9)부터 조식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지속적으로 건의하였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식은 거듭된 사화 속에서 도학이 사라지려는 시대에 유학을 진흥시키고 후학을 양성한 인물이었다. 조식에게 수학한 제자들은 위급한 시기에 의병장이 되면서 정계에 등장하였고 북인계열로서 광해군 시대에 주도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의 결과 광해군대 북인세력이 몰락하면서 조식과 그의 학파는 다시 재집권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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