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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朱元璋]

개천에서 용이 된 인물

1328년 ~ 1398년

주원장 대표 이미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1 힘들었던 어린 시절

중국의 여러 황제들 가운데 가장 입지전적인 인물을 꼽자면 단연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 재위 1368~1398)일 것이다. 그가 제위에 오르는 순간까지의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주원장은 원말 호주(濠州) 종리현(鍾離縣, 오늘날 안후이성安徽省 추저우시滁州市 펑양현鳳陽縣)에서 아버지 주오사[朱五四, 훗날 주세진(朱世珍), 1283~1344]와 어머니 진씨(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주원장은 어렸을 적 주중팔(朱重八)로 불렸지만, 이후에는 주흥종(朱興宗), 주덕유(朱德裕) 등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집안은 원래 난징(南京) 인근의 쥐롱(句容) 일대에서 살았으나, 후대로 오면서 추저우 일대로 이주하였다. 아버지 주오사는 자신의 땅 없이 소작농으로 일하며 근근이 가족을 부양하였던 빈농이었다.

주원장이 살던 원말 중국에는 전염병, 가뭄, 기근 등의 재해가 빈번하였고,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주원장의 집안 역시 이러한 화난을 피하지 못하였고, 마지막에는 둘째 형 주중륙(朱重六)과 주원장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주원장은 황각사(黃覺寺)라는 절에서 출가하였고, 그곳에서 온갖 잡일과 멸시를 견뎌내면서 행자(行者) 생활을 해나갔다. 그러나 절의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행자 생활마저도 할 수 없었고, 결국 절에서 쫓겨난 주원장은 탁발승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2 홍건군에서의 활약

원말 당시 종교 집단이나 한족 군벌들은 사회 혼란을 틈타 중국 곳곳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홍건군(紅巾軍)은 원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었다. 산둥(山東) 출신 한산동(韓山童, ?~1351)은 미륵불(彌勒佛)이 혼란한 세상을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믿음을 설파하는 백련교(白蓮敎)를 기반으로 한 종교 집단의 수장이었다. 1351년, 한산동이 이끄는 홍건군 세력이 창장강(長江) 하구 일대에서 봉기하였다. 한산동은 봉기 직전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아들 한림아(韓林兒, 1340~1366)가 그의 뒤를 이어 홍건군을 이끌었다.

주원장은 홍건군의 수장인 곽자흥(郭子興, ?~1355)에게 투신하였다. 곽자흥은 주원장과 같은 안후이(安徽) 출신으로, 안후이 일대에서 홍건군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주원장은 곽자흥의 수하로 들어갔고, 곽자흥의 양녀 마씨(馬氏)와 결혼하면서 곽자흥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곽자흥의 사후 주원장은 그의 세력을 이어받았다. 이후 주원장은 여러 인재들을 자신의 진영에 가담시켰다. 동향 출신의 서달(徐達, 1332~1385), 이선장(李善長, 1314~1390) , 상우춘(常遇春, 1330~1369) 등도 이때 주원장에게 투신하였다. 이들은 명이 건국된 이후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저장(浙江) 일대 원정에서는 유기(劉基, 1311~1375)와 송렴(宋濂, 1310~1381) 등의 문인들이 주원장의 휘하에 들어갔다. 주원장은 인접한 한족 군벌 세력들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주원장과 경쟁하던 군벌로는 방국진(方國珍, 1319~1374), 장사성(張士誠, 1321~1367), 진우량(陳友諒, 1316~1363) 등이 있었다.

진우량은 원래 후베이(湖北) 일대에서 세력을 이루고 ‘천완(天完)’이라는 나라를 세운 서수휘(徐壽輝, ?~1360)의 수하였다. 진우량은 서수휘를 암살하고 ‘대한(大漢)’을 세웠고 후베이, 후난(湖南), 장시(江西) 등 중국 남부 내륙에 거점을 마련하였으나, 1363년 포양호(鄱陽湖)에서 주원장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도중 전사하였다. 진우량의 사망 이후 주원장은 장사성 세력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장사성은 오늘날 장쑤성(江蘇省)의 염전 노동자 출신이었으나, 일대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봉기하였고, 국호를 ‘대주(大周)’로 삼고 황제에 올랐다. 장사성은 한때 주원장 군대에 투항하였다가 이후에 다시 독립하였으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세력을 완전히 잃었다. 방국진은 저장성(浙江省)의 소금 장수 출신이었으나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해운을 장악한 군벌이었다. 방국진은 주원장 세력과 원 사이에서 투항과 반란을 반복하다가 마지막에는 명에 투항하였다.

3 황제에 오르다

주원장의 명 수립에 있어 핵심적인 거점 지역은 ‘오(吳)’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오(吳)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오늘날의 난징, 장쑤, 저장 일대에 있었던 국가이지만, 이후에는 이 일대를 지칭하는 관습적인 지명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일대는 창장강 하구의 비옥한 삼각주에 해당하며, 풍부한 경제력과 이를 바탕으로 한 높은 문화 수준을 자랑하며 수많은 문인과 관료를 배출해 왔던 ‘강남(江南)’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주원장이 난징을 중심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였기에 그의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다.

1356년, 주원장은 집경(集慶, 오늘날 난징)을 함락시킨 이후 오국공(吳國公)으로 불렸다. 1364년 주원장은 오왕(吳王)에 올랐다. 1367년에는 아예 연호(年號)를 ‘오(吳)’로 개원하였다. 중국 역사상 한 글자 연호는 없었으며, 더욱이 국명에 해당하는 글자를 연호로 사용하는 용례는 없었다. 주원장이 ‘오’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는 그만큼 이 지역에 대한 그의 애착이 남달랐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1368년, 주원장은 마침내 국호를 ‘명(明)’이라 하고 연호를 ‘홍무(洪武, 1368~1398)’로 고쳤으며 황제에 등극하고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그 해 주원장은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 오늘날 베이징)로 진격하였다. 결국 명의 군대는 대도를 점령하였고 이로써 원은 종말을 고했다. 이때 대도는 북평(北平)으로 개명되었고, 다시 영락(永樂) 원년(1403)에는 북평에서 ‘북경(北京, 베이징)’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4 강력한 황권의 수립

주원장은 원과는 다른 성격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명초 수립된 여러 제도에는 그의 의지가 반영되었다. 주원장은 한족 출신이었던 만큼 한족 중심의 정책을 수립하였다. 원대에는 주로 몽골인이나 이슬람 지역 출신 인물들이 국가 통치에 참여하였으나, 명에서는 이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또한 그는 민간의 해외 교역을 억누르고 국가가 교역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주원장은 ‘한 조각의 판자도 바다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片板不許下海)’고 천명하면서, 민간이 주도하는 해양 교역을 강력하게 금지하였다. 이러한 ‘해금(海禁)’ 조처는 명이 멸망할 때까지 그 기조가 유지되었다. 아울러 해외 교역은 외국의 조공(朝貢) 사절단이 가져온 물품을 지정된 장소에서만 교역하는 것만이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민간 해양 교역을 관리 감독하는 기구였던 시박사(市舶司)가 명대에는 조공 사절단의 입항을 관리하는 기구로 바뀌었다.

원말 각종 재난과 사회 부조리로 인하여 유랑하는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주원장은 농본주의(農本主義)를 중심 이념으로 삼았다. 원말의 혼란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유랑한 백성들을 다시 정착시키고 농지를 확충하기 위하여 여러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관개 시설을 확충하는 등 농지를 늘려나갔으며, 자작농을 보호하고 대지주가 발생하는 것을 억제하여 대다수 소농민의 생계를 보장하였고 동시에 징세의 안정화를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주원장은 전국적으로 토지 측량과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토지대장에 해당하는 『어린도책(魚鱗圖冊)』을 지역마다 편찬하여 토지 현황을 파악하게 하였고, 호적을 새로 작성하였다. 1381년, 재산대장에 해당하는 『부역황책(賦役黃冊)』을 작성하게 하여 각 호(戶)의 재산 현황과 호구 현황을 파악하였고, 이를 통해 징세와 요역을 효율적으로 부과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주원장은 향촌을 이갑(里甲)이라는 기본 단위로 편성하였다. 이갑제는 1개의 ‘리(里)’를 10개의 이장호(里長戶)와 100개의 갑수호(甲首戶)로 조직하고, 1개의 이장호와 10개의 갑수호를 하나의 ‘갑(甲)’으로 조직하는 방식이었다. 각 ‘리’마다 매년 1명의 이장(里長)과 갑수(甲首) 10명이 선발되었는데, 이들은 향촌의 치안, 교화, 권농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갑제는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징세를 원활히 하여 국가의 안녕과 부강을 꾀하였던 주원장의 이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주원장은 황권의 강화에도 주력하였다. 특히 주원장은 대규모 숙청을 통하여 황제의 권위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권신이나 개국공신들을 제거하였다. 호유용(胡惟庸, ?~1380)은 주원장과 같은 안후이성 출신으로, 주원장의 신임을 얻으면서 조금씩 높은 관직에 올라 마침내 좌승상(左丞相)이라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러 비리를 저지르고 심지어는 황제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1380년, 이를 지켜보던 주원장은 결국 호유용을 모반죄로 처형하였다. 이때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이들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호유용의 옥’이라고 하는 이 사건 이외에도 주원장은 여러 차례 대규모 숙청을 단행, 수만 명을 살해하는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주원장의 의지는 중앙 정부 조직의 개편으로도 이어졌다. 호유용의 옥으로 인해 중서성(中書省)이 폐지되었고 승상 직책이 사라졌으며, 중앙 행정 조직인 육부(六部)가 황제에게 직속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모든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에 따라 1382년 일종의 자문기구인 전각학사(殿閣學士)가 설치되었다. 전각학사는 이후에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제도로 발전하면서 명청대 특유의 정치제도가 확립된다. 그러나 명 중기에 이르면 대학사 중에서도 최고 책임자에 해당하는 수보대학사(首輔大學士)가 사실상 재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주원장은 법전을 편찬하는 작업도 지휘하였다. 주원장은 『대명률(大明律)』 편찬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하였다. 중국 역대 왕조들은 기본적으로 법전을 편찬하여 이를 통치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당(唐)이 『당률(唐律)』을 편찬하면서, 이후의 왕조들은 『당률』에 기초하여 법전을 편찬하였다. 원(元) 역시 『원전장(元典章)』 등의 법전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원은 이전 왕조와는 달리 『당률』을 배제하고 각종 판결 사례들을 법전에 수록하는 특이한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법전은 현장에서의 법 운용을 즉각적으로 파악하는데 유용하였지만 일관되고 안정적인 법 운용을 하기에는 불편하였다. 『대명률』은 『당률』 체제를 부활시키면서도 원대 법전의 체제를 결합, 각 항목마다 법 조문을 설치하고 각 조문마다 판결 사례를 덧붙이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로써 홍무 30년(1397) 최종적으로 『대명률』의 텍스트가 확정되었다. 이외에도 주원장은 대고(大誥)나 방문(榜文) 등의 형식으로 황제의 명령을 수시로 발하였다. 이러한 지령문은 신하들과의 논의 없이 황제가 단독으로 판단한 사항들을 일반에 그대로 전파하는 방식으로, 황제의 권한이 그만큼 강력하였음을 보여준다.

주원장의 정책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왕조의 기반을 안정시키는데 유효하였다고 평가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황권 강화와 안정화를 위한 그의 의지는 고려와 조선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5 명과 고려/조선의 관계

고려는 몽골군의 침략 이후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고, 원은 이를 빌미로 고려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원이 쇠퇴하고 명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국왕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은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공민왕은 기씨(奇氏) 일족 등 강력한 친원(親元) 세력을 정국에서 배제시켰고, 원의 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이문소(理問所)도 폐지하였으며, 군대를 파견하여 몽골이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동녕부(東寧府) 지역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원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 1368년 명이 건국되고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마저 점령당하면서, 1369년부터 고려는 명에 조공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여전히 북원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고려를 외교적으로 압박하여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명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1369년 주원장은 이미 원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공민왕을 다시 고려국왕으로 책봉하여 양국의 책봉 조공 관계를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 동시에 주원장은 고려에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1370년, 주원장은 귀환하는 고려 사절단에게 명의 예법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1373년에는 고려가 명으로 보낸 공마(貢馬) 중 2필이 죽자 이를 사마(私馬)로 채워 넣은 일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면서, 고려에 군대를 파견하여 문죄(問罪)하겠다고 위협을 가하였다. 1374년에도 주원장은 고려가 지나치게 많은 공물을 보내온 것이 자신을 능멸하려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고려에 군대를 보내어 문죄하겠다는 말을 다시 꺼내었다. 이 사건이 있기 8개월 전, 북원이 고려에 사자를 파견하여 명을 협공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첩보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주원장은 북원의 사자를 받아들인 것에 대한 질책과 북원과의 관계에 대한 경고의 차원에서 고려에 협박을 가한 것이었다. 1374년에는 김의(金義)가 명 사신을 살해하고 도주하였고, 공민왕은 암살되었으며, 북원은 계속해서 고려에게 협공을 제안하는 등 고려와 명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한편 고려 조정에는 이인임(李仁任, ?~1388)을 중심으로 한 친원(親元) 세력과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등을 비롯한 친명(親明)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1375년 이인임 등은 명을 협공하자는 제안을 가져온 북원의 사신을 영접하고 관련 사안을 논의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정도전은 북원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신을 명으로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이 일로 정도전은 유배되었으며, 유배가 끝난 후에는 동북면(東北面)의 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찾아가 그의 수하가 되어 혁명을 계획하였다. 한편, 새로 즉위한 우왕(禑王, 1365~1389, 재위 1374~1388)은 명에 책봉을 요청하였지만 명은 공민왕 암살과 명 사신 살해 등을 이유로 10년간 책봉을 미루기도 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명과의 외교는 정도전이 담당하였다. 주원장은 조선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가장 큰 사건은 1395년에 있었다. 이해 조선은 새해를 맞이하여 주원장에게 표전문(表箋文)을 보내었으나, 주원장은 일부 문구를 문제 삼아 사절단을 감금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문죄하겠다고 협박하는 한편 정도전을 명으로 압송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건국 직후부터 정도전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요동(遼東) 정벌 준비에 대한 첩보를 접한 주원장이 조선을 힐문하려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고 북원의 세력 확장을 차단하며 요동 지역을 공고히 함으로써 왕조를 안정시키려는 의도에서 주원장은 고려와 조선에게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협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명과 고려·조선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고자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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