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최부

최부[崔溥]

명나라에 표류했던 조선의 관리

1454(단종 2) ~ 1504(연산군 10)

최부 대표 이미지

표해록

e뮤지엄(국립제주박물관)

1 개요

최부(崔溥)의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다. 본관은 탐진(耽津)으로,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다. 최부는 1454년(단종 2) 전라도 나주에서 출생하였지만, 1470년(성종 1) 17세에 정귀함(鄭貴瑊)의 딸과 혼인하면서 처가가 있는 해남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478년(성종 9)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482년(성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87년(성종 18)에는 제주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갔는데, 이듬해인 1488년(성종 19) 부친상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명나라로 표류하였다가 5개월 만에 돌아왔다. 귀국 후 중국에서의 견문을 기록한 『표해록(漂海錄, 錦南漂海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최부는 1498년(연산군 4) 발생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유배되었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처형되었다. 그후 1571년(선조 4)에 유희춘(柳希春)은 외할아버지인 최부의 시문을 엮어 문집 『금남집(錦南集)』을 간행했다.

2 관료로서의 삶

최부는 성균관에서 수학한 후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하여 그의 문인 신종호(申從濩), 김굉필(金宏弼) 등과 교류하면서 성리학 학풍을 진작시켰다. 관직은 교서관 저작랑, 군자감 주부,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485년(성종 16)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여 다수의 사론(史論)을 집필하였고, 1486년(성종 17)에는 김종직이 주도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87년(성종 18) 최부는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어 제주도에 갔다. 그런데 1488년(성종 19) 부친상을 당해 돌아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여러 차례의 조사와 송환 절차를 밟고 약 5개월이 지나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그가 귀국한 후 성종은 중국에서의 견문을 일기 형태로 짓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표해록』이다. 그리고 그는 중국에서 보았던 것을 바탕으로 수차(水車)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후 최부는 귀향하여 부친의 여막을 지켰는데, 그 와중에 모친상을 당해 다시 3년상을 치렀다.

한편, 당시 임금의 명으로 『표해록』을 지으면서 상례를 미룬 것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최부는 1491년(성종 23)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왕명에 따른 것이지만 귀국 이후에 곧바로 상례를 치르지 않았던 점이 문제가 되었다. 이와 관련한 논란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는데, 결국 성종의 뜻에 따라 홍문관 교리로 임명될 수 있었다.

연산군 즉위 이후에는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응교 등을 역임하였고, 『성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497년(연산군 3) 사헌부 사간으로서 연산군의 실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상소한 내용은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사소한 오락을 멀리 하며, 사면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내치(內治)를 엄히 하며, 인재 등용을 조심히 하라는 것이었는데, 핵심은 외척과 환관의 권력 남용을 비판한 것이었다. 결국 최부는 며칠 후에 사간 직에서 교체되어 성절사질정관(聖節使質正官)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인 1498년(연산군 4)에는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귀양갔으며, 그곳에서 생활하던 중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발생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훗날 『연산군일기』의 사관은 최부에 대해서 “공렴(公廉)하고 정직하며 경서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하였고,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일을 말하지 아니함이 없어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3 제주도 앞바다를 건너다 명나라에 표류하다

1488년(성종 19) 최부는 제주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당시 일행은 그의 집안 종 막쇠(莫金), 만산(萬山)을 비롯한 종자(從子) 7명, 제주목사가 보낸 진무(鎭撫)와 기관(記官) 각 1명, 호송군 9명, 선원 20명, 관노 4명 등 모두 43명이었다.

그들이 탄 배는 제주목사 허희(許煕)가 구해준 것으로 돛대 2개를 단 크고 튼튼한 것이었다. 출발할 때부터 좋지 않던 날씨는 더욱 나빠졌다. 낮에는 캄캄한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고, 저녁에는 세찬 비가 쏟아졌으며, 밤에는 천지를 찢는 듯한 파도가 쳤다. 사람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통곡할 정도로 상황은 좋지 못했다. 날씨는 계속 나빴다. 돛이 끊어질 정도였고, 사람들은 배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빗물을 쉴새없이 퍼내야만 했다. 도중에 해적을 만나 옷과 양식을 약탈당하기도 했다.

최부 일행이 명나라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도착한 때는 출발 2주일 만인 윤1월 16일이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선원들의 항해술과 최부의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이후 최부 일행의 일정은 표류인에 대한 세 차례의 심문과 이후의 송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그들은 절강성의 도저소(桃渚所)로 호송되어 심문을 받았고(윤1월 12일∼22일), 이후 소흥부(紹興府, 윤1월 23일-2월 4일), 항주부(杭州府, 2월 5일∼12일)에서도 왜구가 아니라 표류한 조선의 관료임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조사 내용은 신원(성명, 주소, 관직), 표류의 이유와 과정, 약탈 여부, 무기 소지 여부 등이었는데, 가장 쟁점이 된 사안은 왜구(倭寇)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소흥에서의 2차 조사에서 명의 관리들은 최부가 조선의 관료임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 지리, 상제례(喪祭禮), 호구, 병제, 복식 등에 대해 써 내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항주에서 최종적으로 조선의 관료라는 점이 밝혀진 후에는 송환 절차를 밟았다. 명에서는 표류민에 대한 전례에 따라 지휘첨사 양왕(楊旺)을 호송 책임자로 정했고, 각 역(驛)에서 의복·식량 등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경(北京, 2월 13일∼4월 23일)에 머물며 4월 20일 명 황제에 대해 사은(謝恩)한 후에 요동을 거쳐(4월 24일∼5월 28일), 의주성으로 호송되었다(5월 29일∼6월 4일). 이로써 최부를 비롯한 일행 43명 모두가 무사 귀환하였다.

4 귀국한 후 표해록을 짓다

조선 전기 명과의 교류는 주로 사신단을 통해서 가능했다. 그 외에는 중국을 관찰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태풍을 만나 중국에 표류한 사례도 있었지만, 표류인 대부분은 지식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표류와 송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최부가 남긴 『표해록』은 표류인의 경험을 상세히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조선 지식인의 중국 인식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일본에서 『표해록』은 에도시대의 유학자 기요다 군킨(淸田君錦)이 1769년 교토에서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널리 읽혔다고 한다.

『표해록』에 담긴 여정은 제주도를 출발한 1488년(성종 19) 윤1월 3일부터 중국에 표류하였다가 귀국한 6월 4일까지 5개월 동안이었다. 최부는 중국에서의 체험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표해록』에는 최부 일행의 표류 과정 뿐 아니라 중국에서 보고 들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었다. 최부는 중국에서 지나는 곳마다 지리, 교통, 인물 등에 대해 관찰하였고, 호송인이나 지식인들과의 필담을 통해 중국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표해록』에는 최부의 유교적 소양과 역사·지리적 지식도 담겨져 있다. 그는 우리나라가 요순과 동일한 시기에 단군이 건국한 이래 기자가 동래하여 8조법을 전한 뒤 마한, 삼한,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오랜 역사가 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 한 나라가 된 이래 물산이 많고 재물이 넉넉하며 군사가 강성하고 선비가 많은 나라가 되었음을 역설하였다. 더불어 우리나라가 기자조선 이후 유교 이념에 따라 다스려지고 있고, 향교를 세워 백성의 교화가 행해지며, 일상생활에서의 의례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해 시행되고 있음을 밝혔다.

한편, 최부는 민생에 도움을 주는 운하, 수차 등에도 주목하였다. 그는 항주에서 북경까지 운하를 통해 이동하면서 운하를 통한 배 운송의 편의성에 감탄하였다. 또한 수차 제작법은 호송관 부영(傅榮)에게 가르쳐 주기를 간청하였는데,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간편한 수차 제작법을 배워 왔다. 또한 그는 자신의 경험을 거울삼아 표류 대비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선박 제조 기술을 개선하고,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신표(信標)를 발급하며, 표류인과 대화할 수 있는 통사(通事)를 설치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러한 최부의 『표해록』은 15세기 명나라의 조선 표류민 처리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다. 또한 거센 풍랑을 만난 일행의 다양한 모습들, 명나라 사람들과의 문답 내용, 최부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언급한 조선 인식, 5개월 간 중국에서 보고 느낀 여러 상황들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어 해양문학사, 대외관계사 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