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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덕[崔潤德]

4군 6진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다

1376년(우왕 2) ~ 1445년(세종 27)

최윤덕 대표 이미지

최윤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출생과 성장과정

최윤덕(崔潤德)은 본관이 통천이고 자는 여화(汝和), 백수(伯修)이며 호는 임곡(霖谷)이다. 1376년(고려 우왕 2년) 최운해(崔雲海)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운해는 고려말 무장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 참판승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최윤덕의 조부는 호군을 지낸 최녹(崔祿)이었다. 최윤덕은 아래로 최윤복(崔閏福), 최윤온(崔閏溫), 최윤례(崔閏禮)의 세 동생이 있었다.

『필원잡기(筆苑雜記)』의 내용에 의하면 최윤덕의 친모는 최윤덕을 낳자마자 사망하였고 아버지 최운해는 변방에 장수로 나가 있어 최윤덕은 이웃의 양수척의 집에서 양육되었다고 한다. 자란 이후 기운이 남보다 세고 활쏘기를 잘하여 산중에서 호랑이를 잡은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서거정(徐居正)의 아버지인 서미성(徐彌性)이 소문을 듣고 최윤덕을 직접 만나본 이후 활쏘기와 병법을 전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으로 최윤덕은 어린 시절부터 명장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되었다.

2 생애와 업적

최윤덕은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1396년(태조 5년) 아버지를 따라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에서 근무하며 왜적과 싸워 전공을 올렸다. 이후 1400년(정종 2년) 태종이 최윤덕을 역마로 불러 몸소 접견하여 과거 영해에서 싸운 정황을 묻고, 부사직으로 제수하여 훈련관에서 근무하도록 하였다. 1402년(태종 2년)에는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런데 최윤덕은 과거 합격 이후 바로 아버지를 따라 이성의 수비를 위하여 지방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국왕이 친히 참석하는 전시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이를 잊지 않고 전시를 마친 이후, 전시 합격자 방 맨 아래에 최윤덕을 써 넣도록 하였다.

태종은 최윤덕을 매우 총애하고 신뢰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최윤덕 역시 태종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태종이 해주목(海州牧)로 강무를 가서, 말을 탄 채로 큰 냇물을 건너고자 하였다. 최윤덕이 나서서 이를 제지하고는 본인이 물에 들어가 물의 깊이를 잰 다음 말을 타고 건너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진언하였다. 태종은 이를 보고 나서 냇물 건너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 사실은 조선 후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나 『대동야승(大東野乘)』과 같은 야담집에도 실려 있는데, 다만 이들 기록에는 태종이 아닌 태조로 나와 있는 것이 다르다.

태종의 총애와 본인이 가진 무장으로서의 뛰어난 능력으로 그는 성공적인 관직생활을 이어갔다. 1402년(태종 2년)에는 낭장으로 승진하여 호군을 제수받았고 다음해는 대호군으로 승진하였다. 1406년(태종 6년) 에는 지태안군사에 제수되어 지방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다시 서울로 올라와 대호군에 임명되었다.

1410년(태종 10년)에는 우군동지총제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경성병마사에 제수되었다. 이 해 조선에서는 조연(趙涓), 신유정(辛有定), 김중보(金重寶), 곽승우(郭承祐)등이 동북면에 위치한 모련위 여진인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에 모련위 이외의 동북면의 여러 여진 부족들과 조선의 관계도 매우 껄끄러워졌다. 때문에 여러 차례 여진인들의 침입이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방비가 조정의 현안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종은 유정현(柳廷顯)을 동북면 도선무사로 삼고 김남수(金南秀), 하경복(河敬復)과 더불어 최윤덕을 병마사로 삼아 북방 방어의 책임을 맡겼다. 특히 유정현에게 부월과 교서를 내려 여진인에 대한 처벌과 포상의 전권을 맡겼는데, 당시 여진인의 침입을 막는 북방 방어가 매우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최윤덕은 경성의 병마사로 파견되어 방어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당시 동북면에 거주하였던 알타리 여진족의 추장 동맹가첩목아는 최윤덕의 활쏘기와 말타기 솜씨에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1415년(태종 15년)에는 영길도(뒷날 함길도)의 도순문찰리사가 되었고, 이후 서울로 돌아와 우군총제에 제수되었다.

1418년에는 중군동지총제로 승진하였고, 다음 해인 1419년(세종 1년)에는 의정부 참찬의 직에 올랐다. 이 해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선위하였고 얼마 뒤 대마도정벌을 감행하였다. 당시 유정현을 삼군도통사,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로 삼고 최윤덕을 도절제사로 삼아 제군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최윤덕은 직접 대마도에 출병하지 않고 내이포에 머물면서 군사를 정비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윤덕은 내이포에 도착하자마자 군기를 엄하게 다스리고 평소 수령의 말을 듣지 않던 간악한 왜인들 21명의 목을 베니, 왜인들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때 목을 벤 자 중에는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 평도전(平道全)의 아들인 평망고(平望古)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 1421년(세종 3년)에는 공조판서에 올랐다가 두 해 뒤 다시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북방의 방어에 전념하였다. 그는 임기가 다 된 이후에도 세종이 변방이 안정될 때까지 방어를 맡아줄 것을 명하여 임기 이후 한동안 평안도에 머물러 있었다. 1425년(세종 7년)에는 다시 의정부참찬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고, 다음해에 판좌군도총제부사로 승진하였다. 1428년(세종 10년)에는 병조판서의 지위에 올라 군과 관련된 고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29년(세종 11년)에는 하삼도에 읍성을 축성하기로 하고, 적합한 터를 확인하기 위하여 충청전라경상도의 도순찰사로 지방을 순력하였다. 고려 말부터 왜구가 준동하여 경상도 연안 뿐 아니라 전라도와 충청도의 연안 고을까지 왜구에 의해 피폐된 고을이 적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왜구로 인한 피해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언제든 잠재적인 위협요소로 등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병조판서 최윤덕을 파견하여 각 고을의 축성 상태를 확인하고 새로 짓거나 이전해야 할 성에 대해 보고하도록 한 것이었다. 최윤덕은 보고를 올려 하삼도 중 방어가 긴요한 곳은 산성이 아닌 읍성을 쌓도록 하고, 해당 고을 부근의 인력까지 동원하여 축성하도록 건의하였다. 또 기존에 읍성이 남아있는 경우는 되도록 이를 보수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방침 아래 최윤덕은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 연해 지방을 돌며 많은 읍성을 개조하거나 혹은 신축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읍성에 관한 항목들에는 당시 최윤덕이 축성한 읍성들이 남아 있는데 충청도의 보령현(保寧縣), 전라도의 임피현(臨陂縣)은 최윤덕의 지휘 아래 새로 읍성을 쌓은 경우였고, 전라도의 무주현(茂朱縣)은 당시 산성을 개조하여 읍성으로 삼으려다가 안개가 심하여 읍성을 쌓는 것이 적합지 않다고 하여 일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특히 보령현의 읍성 축성 과정은 당시 축성의 실제를 잘 보여주는데, 기존의 읍성이 낮고 방어에 적합하지 않아 최윤덕이 관찰사 박안신(朴安臣), 병마사 이흥발(李興發)과 함께 새 성을 지을 자리를 살핀 이후 보령현과 인근 서산(瑞山)의 백성들을 사역하여 몇 개월 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1432년(세종 14년)에는 파저강 유역에 거주하는 여진부족이 조선의 변경을 침략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세종은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삼아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다음해인 1433년(세종 15년) 본격적인 정벌을 단행하였다. 최윤덕은 평안도의 병력 1만 명과 황해도 군마 5천을 징발하여이순몽(李順蒙), 최해산(崔海山), 이각(李恪), 이징석(李澄石), 김효성(金孝誠), 홍사석(洪師錫) 등과 함께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수백 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파저강 유역의 여진 추장이던 이만주를 사로잡는 것은 실패하였다.

이처럼 여러 번의 군사작전을 매 번 성공으로 이끈 최윤덕은 태종 뿐 아니라 세종에게도 큰 신뢰를 얻게 되었다. 세종은 당시 신임하던 승지 김종서와의 대화에서 최윤덕의 인품을 거론하였다. 김종서는 최윤덕이 학식은 없으나 마음이 정직하고 무용과 재략이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세종은 최윤덕이 정직하고 착실한 인사라고 거론하며, 태종 역시 인재라고 여겼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최윤덕을 재상에 등용할 뜻을 은근히 시사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의사는 최윤덕이 파저강 야인 정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자 곧 실현되었다. 1433년(세종 15년) 최윤덕은 의정부 우의정에 올랐다. 무장으로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른 예는 조선 전체 역사에서 세종대 최윤덕, 중종대 박원종(朴元宗), 인조조 신경진(申景禛), 효종조 구인후(具仁垕), 현종조 이완(李浣)의 다섯 차례에 불과한데 최윤덕이 그 첫 번째였다. 세종은 그를 우의정으로 임명하며 전공만으로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그의 인품 또한 정승에 걸맞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우의정에 제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쪽의 파저강 여진인들이 다시 준동하자 최윤덕은 다시 평안도도안무사로 파견되어 북방의 방어를 점검하였다. 당시 우의정과 평안도도안무사의 직책을 겸하고 있던 최윤덕은 상소를 올려 우의정의 직을 거두고 본인 본분인 무장의 직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세종은 그를 한나라의 제갈량, 당나라의 배진공과 비교하면서 그가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지방의 방어를 수행할 수 있으니 사양치 말라는 답을 보냈다. 이듬해인 1435년(세종 17년) 조정에 돌아오자 그를 좌의정으로 승진시켰는데, 이때에도 최윤덕은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최윤덕은 정승의 위치에서 국정 현안의 여러 분야에 관여하였다. 특히 그가 좌의정으로 재임하던 시점은 북방의 4군 6진 개척이 한창인 시점이었고, 평안도와 황해도에는 그의 후임으로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이 활약하고 있던 때였다. 조정에서는 이들이 올린 장계와 보고를 통해 상황을 보고 받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 내려주곤 했는데, 당시 이들 보고내용에 대한 검토에서 최윤덕의 의견이 상당수 반영되었다. 이듬해인 1436년(세종 18년)에는 좌의정에서 물러나 영중추원사로 전임되었으나, 조정의 현안 논의에는 꾸준히 참석하도록 하였다.

북방의 문제 뿐 아니라 군사와 관련된 조정의 현안에서는 대부분 최윤덕의 의논이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전국에 실전 배치된 화통전이 지역마다 길이와 크기 등이 같지 않자 최윤덕은 이를 하나로 통일할 것을 건의하였다. 아울러 각도와 각 군현의 갑옷의 제작이 제각각이므로 이를 통일할 것도 건의하였다. 세종은 병조와 군기감 제조에게 사안을 논의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최윤덕의 건의에 공감하고 표준 길이와 넓이를 정해 견본을 마련한 후 각 생산처에 내려 보내 본떠 만들도록 하였다. 이처럼 최윤덕은 풍부한 군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북방의 방어 체제 뿐 아니라 군과 관련된 거의 전 분야의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처럼 무장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최윤덕은 70세가 되는 1445년(세종 27년)에는 나라에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궤장이란, 몸을 기댈 수 있는 안석과 지팡이를 말하는데 국가에서 연로한 대신을 대우한다는 상징적인 의장물이었다. 이로서 최윤덕은 무인 출신으로 정승을 역임하고 궤장을 하사받는 영예를 모두 누리게 되었다.

3 사후 평가와 가계의 계승

궤장을 하사받고 난 얼마 후인 1445년(세종 27년) 12월 최윤덕은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정렬(貞烈)로 정해졌다. 그의 졸기에 의하면 그는 사망 이후 불교식 장례를 치르지 말 것을 당부하였고, 성품이 순진하고 솔직하였으며 용략이 많아서 당대의 명장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본인의 집에서 세 아우들을 모두 거두어 키우고, 혼수를 마련하여 혼인시키고 토지와 노비를 나누어 줄 만큼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다만 군기감 제조 재직시에 군인들을 동원하여 집을 지은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를 비방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그의 졸기는 생전의 업적에 비해 간략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졸기가 전하게 된 경위가 『단종실록』에 전한다. 즉 단종 재위기간동안 황보인과 김종서가 『세종실록』을 편찬하였는데, 당시 사관이 기록한 최윤덕의 졸기가 허황된 내용이 많다고 하여 상당 부분을 삭제한 것이었다. 해당 기록에는 본래 최윤덕의 졸기에서 삭제된 내용이 함께 나와 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최윤덕은 어렸을 적 왜구를 소탕할 때부터 무용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아버지 최운해가 죄를 지어 유배되었을 때에는 최윤덕이 벼슬을 버리고 따라가서 모셨다고 하였으며, 아버지의 유배가 풀리자 스스로 학문이 모자란 것을 한스럽게 여겨 김해로 돌아가 글을 읽었다. 또한 대마도 정벌시 도통사 유정현은 상왕인 태종에게 최윤덕의 계책이 기이하고 절묘하였다고 이야기하자 태종이 유정현에게 ‘경이 최윤덕의 진가를 너무 늦게 알아보았다’ 고 언급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최윤덕의 무공과 인품을 평하는 내용이 여럿 기록되어 있었다. 김종서와 황보인이 이 내용을 삭제하기로 하자, 사신은 최윤덕과 관련된 내용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김종서, 황보인이 사실을 왜곡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최윤덕은 사후에 민간의 민담이나 전승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조선 후기 『대동야승』에 수록된 내용 중에는 그의 소탈한 인품을 표현한 일화가 전하고 있다. 최윤덕이 어머니 상을 당하여 말 한필, 종 한 명과 더불어 영남으로 내려가는 중에 개령현을 지나는데, 수령을 위시한 여러 명이 냇가에서 술을 먹다가 상복을 입고 지나가는 최윤덕의 일행을 보게 되었다. 이들은 최윤덕을 시골 사람으로 알고 수령에게 무례하였다고 하여 최윤덕의 종을 잡아 때리며 주인의 이름을 대게 하였다. 종은 주인의 이름을 최고불이라고 대답하였는데, 고불은 당시 노인을 지칭하는 용어였다고 한다. 이에 계속 때리며 실제 이름을 묻자 종이 최윤덕이며 지금 상을 당해 창원의 농장으로 간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에 수령들이 대경실색하여 최윤덕에게 가서 사과하였다는 내용이다. 실제 『세종실록』에는 최윤덕의 나이가 65세일 때 계모의 상을 당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으나,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여부는 정확하지 않다.

최윤덕의 사망 후 5년 뒤에 세종 역시 승하하였다. 이후 세종을 종묘에 부묘할 때에 함께 배향될 공신을 선정하였는데, 최윤덕과 더불어 허조(許稠), 신개(申槩), 이수(李隨)를 배향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생존해 있던 황희(黃喜)가 사후 세종대 배향됨으로서 세종의 배향 공신은 모두 다섯 명이 되었다. 무장 출신으로 정승의 지위에 오르고, 종묘에 배향 공신으로 선정된 경우는 최윤덕과 중종대 박원종 외에는 없었다. 박원종이 반정의 공으로 정승과 배향공신이 되었다고 치면, 특별한 정치적 격변 없이 순수한 무공과 인품만으로 이러한 지위에 오른 경우는 최윤덕이 유일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최숙손(崔淑孫), 최경손(崔敬孫), 최광손(崔廣孫), 최영손(崔泳孫)이었다. 이 중 세 아들은 벼슬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최숙손은 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고, 최광손은 최윤덕을 따라 여진 정벌에 나서기도 하였으며 후에 용천군사를 역임하였다. 최영손은 세조대 금성대군과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경손은 자세한 관력이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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