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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崔漢綺]

일찍이 서양 학문에 눈뜬 천재학자

1803년(순조 3) ~ 1877년(고종 14)

최한기 대표 이미지

지구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최한기가 살았던 시대상황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도정치로 인한 문란한 정치기강과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생활이 어려워진 백성들의 불만은 홍경래의 난(洪景來-亂)과 진주농민봉기(晉州農民蜂起)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고종[조선](高宗)은 2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치를 대신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국가제도를 개혁하고,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는 등 왕의 권위를 회복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척화비(斥和碑)를 세운 데서 드러나듯이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鎖國政策)에도 불구하고 이규경(李圭景),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에 의해 청뿐만 아니라 일본, 서양과도 교역을 해야만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편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항로(李恒老), 최익현(崔益鉉)을 중심으로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위정척사사상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2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최한기의 자는 지로(芝老)이며 호는 혜강(惠岡)이다. 그밖에도 패동(浿東), 명남루(明南樓), 기화당(氣和堂) 등의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1803년 최치현과 청주한씨 한경리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최치현의 본가 삭녕최씨와 청주한씨 가문은 여러 대를 개성(開城)에서 살아온 것으로 보아 최한기의 출생지도 개성으로 생각된다. 최한기의 8대조부 최의정(崔議貞)이 음직으로 감찰을 지냈고, 7대조부 최덕용(崔德龍)도 음직으로 군수를 지냈다고 하나 그 자세한 내력은 명확하지 않다. 6대조부 최세현(崔世賢)과 5대조부 최준일(崔俊逸), 고조부 최문징(崔文徵)은 최한기의 종증조할아버지 최지종(崔之宗)이 무과에 급제하여 출세한 덕에 각각 증직을 받았다. 이처럼 최한기 가문은 고조할아버지부터 12대조부 최인원에 이르기까지 8대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한미한 양인가문이었다.

최한기의 가문은 고조부 최문징(崔文徵)에 이르러 집안사정이 좋아졌다. 최문징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최지숭(崔之嵩)이 최한기의 증조할아버지이다. 최지숭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결혼을 3번하였다. 완산이씨 이윤의 딸과 결혼하여 나중에 최한기의 양할아버지가 되는 최배관(崔配觀)이 태어났다. 그리고 인동장씨 장채규(張彩奎)의 딸과 결혼하여 최한기의 할아버지가 되는 최재교(崔載敎)가 태어났다. 최재교는 해풍김씨 김재문(金載汶)의 딸과 결혼하여 최치현(崔致鉉)과 최강현(崔綱鉉)을 두었다. 최치현은 최한기의 아버지로 청주한씨 한경리의 딸과 결혼하여 최한기가 태어나게 되었다.

최한기는 1803년 최광현(崔光鉉)에게 입양되었다. 양아버지 최광현은 1800년 무과에 급제하여 곤양군수를 지냈으며, 양할아버지인 최배관 역시 무과출신이다. 최한기의 증조할아버지·양할아버지·양아버지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사실에서 보듯이, 최한기 가문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의 대표적인 무과 집안이었다. 최광현은 개성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귀산사(龜山寺)에 귀경헌이라는 별장을 짓고, 개성의 선비들과 교류하였다. 최광현과 교류한 대표적인 선비로는 한경리(韓景履), 한경의(韓敬儀), 김천복(金天復), 김헌기(金憲基) 등이 있다.

최한기의 집안은 오랫동안 개성을 근거지로 하여 생활하였다. 비록 최한기는 자신 생애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으나, 그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개성이라는 도시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에도 고려에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개성사람들은 조선시대에 지역적 차별을 받았다. 조정에서 관리가 될 가능성이 없는 개성의 양반은 상업적 농장경영과 상공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형성된 송상(松商)들은 전국의 유통망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삼 재배와 가공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성은 당색이나 신분, 나이의 차이를 넘어서 교류하는 개방적인 학풍이 형성되었다.

최한기의 외가는 개성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청주한씨 가문이었다. 최한기의 외할아버지는 한경리로 개성의 유학자 조유선(趙有善)의 문인이다. 한경리는 『기곡잡기(基谷雜記)』 3책을 쓰기도 하였다. 한경리는 한경의, 한경소, 김상흠, 김헌기, 김천복 등 조유선의 문인과 친하게 지냈다. 특히 김헌기는 한경리의 문집을 교정하고「유사(遺事)」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한경리는 그의 아버지 한도혁(韓道奕)이 죽자, 한도혁의 묘지와 묘갈문을 서울의 한치응(韓致應)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 최한기의 외할머니는 안악이씨로 이종필(李宗馝)의 딸이다. 최한기의 외할머니 집안 역시 한미한 집안으로 문과급제자는 한 명도 없고, 무과급제자도 몇 명에 불과하며 그 일가에 생원이 몇 명 있을 뿐이다.

최한기의 처가는 반남박씨 증판서공파로 처의 7대조부 박황(朴潢)은 사헌부 대사헌 겸 세자우빈객을 역임하였다. 5대조부 박태진(朴泰辰)은 1687년 진사에 합격하여 사직서 참봉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최한기의 장인인 박종혁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최한기는 박종혁의 둘째딸과 결혼하였다. 박승수, 박희수, 박창수, 박증수 등 4명의 처남과 1명의 동서 남익원이 있었다. 최한기 장모는 경주이씨 이집명(李集明)의 딸이다. 그의 선조는 형조판서를 지낸 이시발(李時潑), 좌의정을 지낸 이경억(李慶億) 등 벼슬을 지낸 자가 많았다. 최한기의 아들 최병대(崔炳大)는 1862년 3월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는 『상기서례(喪期敍例)』라는 예서를 지었으며, 경연에서 최한기의 저서 『강관론(講官論)』을 읽기도 하였다. 또한 1876년 상소를 올려 전국에 도적떼들의 약탈이 그치지 않고, 경기도 해안가에 이양선이 나타나고 있으니, 외적에 대비할 대책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최병대의 아들, 즉 최한기의 손자인 최준녕(崔準寧)은 1861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3 교우관계

최한기의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학문은 천문학과 지리학이었다. 최한기는 당시 중국에 들어온 서양선교사와 그들의 저술, 그리고 이를 통해 서양학문을 이해한 이익(李瀷), 김석문(金錫文),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등 조선후기 실학자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특히 박지원의 영향이 컸다. 최한기는 『심기도설』에서 테렌츠(Johann Terrenz)의 『기기도설』을 싣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수차 부분을 직접 인용하기도 하였다.

최한기는 김정호(金正浩), 이규경, 정기원(鄭岐源)과 친한 사이였다. 김정호는 『청구도』, 『대동여지도』등을 만든 조선후기 대표적인 지리학자로서, 최한기가 『청구도』의 제를 써주기도 하였다. 이규경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박물학자로서, 당시 서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1830년대에 마카오에 서양인들이 많이 모여 있으니, 이를 경계할 것을 언급하였다. 이규경은 최한기에 대해서 “역사와 예학, 천문 등에 관한 글을 저술하였고, 기억력이 좋아 폭넓게 공부하여 평범한 선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평하였다.

정기원은 1834년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도총관, 강화진무사를 지낸 인물이다. 정기원은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진무사로 미국 배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4 최한기의 저술활동

최한기는 1825년 2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과(大科) 공부는 소홀히 하고, 도석(道釋), 이설(異說), 간지(干支), 잡술(雜術)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하면서, 결국 과거를 그만두고 경서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처럼 최한기가 과거준비를 그만 둔 것은 세도정치의 부정부패와 성균관의 틀에 박힌 교육방식에 대한 실망의 결과였다. 이후 최한기는 다양한 분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최한기는 천하에서 농업이 제일 중요하고, 농업에서는 관개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여, 젊은 나이부터 농업과 농업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한기는 청나라의 농서 『농정전서』, 『수시통고』와 우리나라의 『만기요람』등의 책을 참고하여 1830년 『농정회요(農政會要)』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1834년 『육해법(陸海法)』을 지었다. 『육해법』은 웅삼발(熊三拔)의 『태서수법(泰西水法)』을 참고한 책으로, 이 책에서 최한기는 관개를 위해 양수기 사용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1834년에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들자고 제안하자 제를 써 주었고, 남촌 창동 집에서 『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를 김정호에게 판각을 의뢰하여 간행하였다.

1836년에 5월 『신기통』과 『추측록』의 서문을 썼다. 10월에 『신기통』과 『추측록』을 합쳐서 『기측체의(氣測體義)』라 이름 짓고 서문을 썼다. 그리고 『기곡잡기』를 편찬하였다. 1839년에는 『의상리수(儀象理數)』와 『심기도설(心器圖說)』을 지었다. 『의상리수』는 천문학에 관한 책으로, 최한기는 이 책에서 천동설과 지동설에서 한 쪽만을 따르는 것보다 두 주장을 서로 참고하여 두루 이해하는 것이 좋음을 지적하였다.

최한기는 1838년부터 인사에 관심을 가져서 『감평(鑑枰)』 서문을 지었다. 그리고 1851년부터는 『인정(人政)』의 편찬을 구상하였고, 1860년 집필을 마무리지었다. 이 책은 일종의 인사 행정에 관한 이론서로서, 인사행정을 정치·사회·경제·교육 등의 원리에서 살펴본 책이다. 이 시기에 『지구전요(地球典要)』와 『기학(氣學)』, 『운화측험(運化測驗)』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책을 통해 최한기는 세계 여러 나라의 견문과 생각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학문을 ‘기학’이라 이름하고, 이를 전 세계 지식인에게 전파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5 최한기의 사상과 영향

최한기는 당시 주류 학문이었던 성리학을 탈피하여 기학이라는 자신만의 학문체계를 확립하였다. 우주의 본질은 ‘이(理)’가 아니라 ‘기(氣)’임을 강조하였고, 기는 일종의 에너지로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최한기의 기학은·명·청시대의 기학과 서양의 고대·중세 철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이해하여 만들어진 독창적인 사상이었다. 최한기는 기학의 핵심개념으로 ‘운화(運化)’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운화는 기의 근본적인 성질로 보았고, 크고 작은 만물이 기의 활동에 반응하여 만물운화를 이루는데, 이를 운화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최한기는 운화기를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한기에 의하면 사물에 대한 이해는 인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고, 외부사물과 인간의 감각기관이 접촉했을 때 경험이 발생하며, 경험에 의하지 않은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최한기의 ‘운화’ 개념은 화합, 상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최한기는 동양과 서양의 학문, 사상의 화합을 강조하였다. 최한기는 『해국도지』와 『영환지략』을 소개하면서 세계의 정치, 사회, 문화, 제도, 학문 등을 모아서 1857년 『지구전요』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 책에서 최한기는 동서양 문화를 모두 인정하였고, 서양인을 단순히 오랑캐로 보지 않고, 알아야 할 대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최한기의 사상은 당시 위정척사론자들이 청과 서양인을 배척의 대상으로 이해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최한기는 유학의 오륜과 인의·예율을 강조하여 세계가 평화롭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유교윤리인 오륜을 통하여 세계의 평화를 확인하고, 직접 서구 여러 나라의 윤리를 오륜에 근거하여 이해하기도 하였다.

최한기는 학문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는 정치는 세도가문, 학문은 유림이 독점하던 당대 사회를 비판하면서 올바른 정치를 요구한 것이다.

19세기는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지속되고 있었다. 최한기는 이에 대한 비판으로 붕당을 주목하였다. 최한기에 의하면 붕당은 학문에 의한 붕당, 권세와 이익에 의해 나누어진 붕당, 군자와 소인의 붕당 등이 모두 두세 사람이 각자의 생각을 고집한 결과로 생겨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한기는 조정에서 붕당과 가문에 의하여 인재를 쓰는 것은 당나라의 씨족제와 유사하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최한기는 뇌물과 청탁에 의한 매관매직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뇌물은 청탁과 함께 물건을 건네줌으로써 낯을 익히고 일을 하면서는 재물로써 매매하는 형태이고, 청탁은 권력층을 따르면서 위세를 빌리거나, 국왕을 모시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득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최한기는 서양의 관리임용법을 소개하였다.

그는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는 면접시험을 통해 응시자의 능력을 판단하여 관리를 선발하고, 임기가 찬 후에는 관리를 파견하여 평가한 후에 왕에게 보고하여 평가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국민이 함께 하는 ‘공치’를 강조하였다. ‘공치’ 개념은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개념으로 백성이 국왕을 선출하는 급진적인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최한기는 유학의 전통 속에 있는 인성교육을 강조할 뿐 아니라, 지리상의 발견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지구가 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음을 들면서 과학적인 실험교육을 강조하였다. 이 뿐 아니라, 사농공상에 대한 직업교육 실시를 주장하였고, 여성에 대한 교육뿐만 아니라 장애자에 대한 교육도 주장하였다.

최한기는 상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사농공상의 대한 차별을 비판하였고, 직업으로서만 인정하였다. 그리고 소규모 상업활동보다는 세계적인 무역활동에 관심을 보이면서, 서양의 상인들이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특히 그는 1836년에 페루의 금, 미국의 직조물, 중국의 차, 동남아의 쌀, 그리고 각국의 아편이 주요 무역상품으로 거래가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조선도 이러한 상업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를 촉구하였다.

세계 각국이 상업을 통해 서로 교류하게 될 것임을 이해하고 무역 거래 중심지로 해양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최한기는 유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 등 세계의 종교를 통합하여 ‘운화교(運化敎)’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자 하였다. 운화교는 천도(天道)와 人道(인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천과 인의 조화를 강조한 종교이다. 운화교를 만들기 위해 최한기는 각 종교를 통합하여 하나의 종교로 만드는 방법을 고심하였다. 세계 각국의 환경, 문화, 풍토가 달라 종교를 통합하는 것이 어렵지만,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리를 분명히 하면 윤리도덕과 종교 등 세계의 보편적 원리를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종교관의 밑바탕에는 조물주의 역할이 과학적 실험에 의해 기의 순환과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처럼 최한기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서양의 사례를 자주 활용하였다. 이는 그가 서구의 정치, 경제,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해국도지』에서 미국 26주의 정치, 경제, 풍속, 교육 등을 이해할 수 있었고, 『영환지략』을 통해 미국이 선거에 의해 지도자를 선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들을 통해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최한기는 프랑스인 브노아의 『지구도설』을 통해 지구중심설의 우주관을 극복하고,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의 우주관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가 중국에서 간행된 과학기술이나 자연과학서적을 통해 서양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수용했다는 사실은 당시 쇄국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이례적이었다.

최한기는 이전 실학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최한기가 제기한 농업기술은 박지원, 서유구 등 실학자들도 이미 주목하였지만, 이를 더욱 깊이 있게 소개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기계에 관한 이해 역시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서유구 등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1860년대 이후 실학자들이 읽지 못한 자연과학 서적을 읽게 되면서 더욱 깊어졌다.

최한기의 사상은 개화사상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최한기는 『지구전요』와 『인정』에서 세계역사와 정치제도,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 썼고, 특히 『지구전요』에는 1883년 『한성순보(漢城旬報)』에 나타난 세계지리, 정치, 예악에 관한 내용이 이미 실려있다. 이 때문에 최한기의 사상이 개화사상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최한기의 사상은 『벽위신편(闢衛新編)』을 쓴 박규수의 친구 윤종의(尹宗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윤종의는 『벽위신편』에서 자신 주장에 대한 근거로 최한기의 사상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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