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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河崙]

태종과 함께 조선의 체제를 정비하다

1347년(충목왕 3) ~ 1416년(태종 16)

하륜 대표 이미지

하륜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출생과 출사

하륜의 호는 호정(浩亭)이고, 자는 대림(大臨)이다. 그는 1347년(충목왕 3)에 진주[晉陽] 하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여러 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하지만, 고위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가문의 위상은 진주 지역의 토착세력이었으나, 하륜의 출사 이후에 점차 높아졌다.

하륜의 아버지는 순흥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潾)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이다. 부인은 성산 이씨이다. 하륜이 명문세족인 성산 이씨 가문과 혼인하게 된 데에는 이인복(李仁復)의 역할이 컸다. 하륜은 1365년(공민왕 14)에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과거를 주관한 지공거(知貢擧)가 이인복이었다. 그는 하륜을 보고 남다르다고 여겨 자기 아우인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혼인하게 했다. 이로써 이인복, 이인임(李仁任), 이인민(李仁敏) 등은 하륜에게 처삼촌이 되었다. 그리고 나중의 일이지만 동지공거(同知貢擧) 이색(李穡)의 손녀는 하륜의 아들 하구(河久)와 혼인하기도 했다.

과거 급제 이후에는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을 맡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을 때에는 신돈(辛旽) 문객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러나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죽임을 당한 후에 지영주사(知榮州事)로 복직되었고, 치적을 인정받아 중앙 정계로 소환되었다. 이후 그는 고공좌랑(考功佐郞), 사헌지평(司憲持平),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 성균관사성(成均大司成), 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우왕대 하륜은 1380년(우왕 6)에 모친상으로 인해 3년간 정계를 떠난 것 외에는 1388년(우왕 14) 이인임이 제거되기 이전까지 꾸준히 관직생활을 이어나갔다. 이인임은 우왕대 내내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우왕은 1388년에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의 도움을 받아 이인임을 비롯하여 염흥방(廉興邦), 임견미(林堅味) 등을 축출하였다. 이때 하륜도 이인임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다만 이러한 내용이 하륜의 묘지명(墓誌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최영의 요동 공벌 주장에 반대하였다가 양주(襄州)로 추방되었다고 전하며, 위화도회군 이후 하륜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2 왕조 교체의 기로에 서다

창왕이 즉위한 후 정국은 과전법 제정 등으로 더욱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하륜은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왕환(王環)이라는 인물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는 일에 연루되면서 또 다시 유배에 처해졌다. 이유는 과거 신돈을 처벌할 때 유배되었다가 행방불명이 된 왕환이 19년 만에 돌아오자, 인척 하륜, 이숭인(李崇仁), 박가흥(朴可興) 등이 돌아온 그에 대해 왕환이 아니라고 진술했다가 무고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일로 하륜은 광주(光州)로 유배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이초(彝初)의 옥(獄)에도 연관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 이초의 옥은 공양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에 사신으로 갔던 왕방(王昉), 조반(趙胖) 등이 명 예부(禮部)의 관리로부터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에게서 들은 내용을 귀국 후에 왕에게 보고하면서 촉발되었다. 새로 즉위한 공양왕이 이성계의 인척이고, 이성계가 명을 공격할 것이며,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이 곧 제거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진상 조사가 행해졌고, 그러한 가운데 관련자들이 대거 옥사하거나 유배되었다. 하륜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淸州)에 유배 갔다가 고향인 진주로 보내졌다. 1391년(공양왕 3)에는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고, 부임 이후 그는 전라도에서 새 왕조의 개창 소식을 들었다.

하륜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정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393년(태조 2)에 경기좌도관찰사(京畿左道觀察使)에 임명되었고, 그 후에도 천도(遷都), 표전(表箋) 문제 등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는 계룡산 천도 관련 공사를 중지시켰고, 대신 새 수도로 무악(毋岳)을 주장하였다. 끝내 무악 천도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태조가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천도 문제에 하륜이 많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명에서 조선의 외교 문서인 표전(表箋) 내용을 문제 삼자 하륜이 사신으로 가서 해명하기도 했다. 다만 하륜이 표전 작성자인 정도전(鄭道傳)을 함께 사신으로 파견할 것을 주장하여 그의 원망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은 정도전과 하륜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있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얼마 후 하륜은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고, 박자안(朴子安) 옥사에 연루되어 약 4개월 간 수원에 안치되었다.

3 태종 이방원의 집권을 돕다

1398년(태조 7), 하륜이 충청도도관찰사로 임명되고 나서 한 달여가 지났을 무렵 조선의 새 수도 한양에서는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그 날의 실록 기사에 하륜의 역할은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하륜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일찍이 이방원에게 “먼저 공격하여 그 무리들을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조언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변란이 일어난 직후 하륜은 충청도에서 한양까지 말을 타고 달려와서 군사를 내어 적극 도왔다고 한다. 결국 왕자의 난은 이방원 세력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정도전, 남은(南誾) 등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둘째 아들인 이방과(李芳果)에게 물려주었고, 정종은 새 수도를 떠나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1400년(정종 2)에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전 제1차 난은 이방원이 신덕왕후(神德王后) 소생의 이복동생인 세자 이방석(李芳碩)을 공격하는 것이었다면, 제2차 난은 신의왕후(神懿王后)가 낳은 동복형제끼리의 권력 쟁탈전이었다. 이방간(李芳幹)과 이방원의 대결은 개경 시내에서 치열한 전투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결국에는 이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였던 하륜은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도록 청하였고, 정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이방원은 확실하게 왕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하륜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를 지내면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중심의 고려 관제를 의정부(議政府) 체제로 개편하였고, 사병을 혁파하여 중추원 대신 설립된 삼군부(三軍府)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몇 개월 후 정종은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주도한 결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되었다.

4 새로운 정치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하다

태종 즉위 후 하륜은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는 정치권력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가 수성(守城)을 위한 각종 체제 구축에 노력하였다. 일단 관제 개편이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1401년(태종 1)에 문하부를 혁파하고 그 기능 일부를 의정부로 이관하였으며, 문하부 낭사(郎舍)를 사간원(司諫院)으로 독립시켰다. 1405년(태종 5)에는 육조를 정2품 아문으로 승격하고 기능을 확대했다. 1408년(태종 8)에는 의정부의 세세한 실무를 육조에 위임하도록 하였고 그 대신에 의정부의 육조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1414년(태종 14)에는 육조가 직접 국왕에게 직계(直啓)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관제 개편 과정에 하륜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때로 개편된 기구의 장관을 맡음으로써 새 관서체계의 확립에 조력하였다. 그는 명에 승상부(丞相府)가 없으니 의정부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궁극적으로는 권력구조를 국왕-육조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지방 통치 조직이 완전히 정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계수관(界首官)을 둠으로써 중앙집권화를 꾀하였고, 동북면·서북면을 평안도·영길도로 개칭하였다. 경제면에서는 국가 재정을 확충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1401년(태종 1) 하륜은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고 저화(楮貨) 통용을 추진하였다. 통용과 중단 그리고 재발행의 과정을 겪은 후 결국에 저화는 유통되지는 못했지만, 하륜은 화폐 유통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충하려 했다. 둔전(屯田), 조운(漕運), 개간(開墾) 등의 정책도 뒤따랐다. 또한 법전을 개정하고 『고려사』를 개수하였으며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등의 왕실 족보도 편찬하였다.

5 정치적 위기 극복과 인물평

태종은 정쟁을 거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국왕의 권위와 권력 강화에 몰두하였다. 그는 자신을 지지해 주면서 향후의 정치운영에 도움이 될 공신들을 필요로 했고, 하륜은 그 중심적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 공신은 가장 견제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태종은 집권에 도움을 주었던 이거이(李居易), 이무(李茂), 이숙번(李叔蕃)를 비롯하여 처남 민무구(閔無咎) 등의 네 형제까지 많은 공신들을 제거하였다.

하륜에게도 정치적 위기는 있었다. 대간은 종종 하륜을 겨냥하여 제도의 잦은 개혁, 조영무(趙英武)와의 불화, 민무구 가문과의 긴밀한 관계 등을 문제 삼았다. 특히, 1411년(태종 11)에 이색 비명(碑銘)의 일부 문구를 둘러싼 비난은 하륜에게 집중되었다. 이 사건은 비명을 지은 하륜이 고려 공양왕대 이색의 유배와 이초의 옥, 태조 즉위 후 이색에 대한 처벌 등을 주도한 주체로 누구를 지목하는지에 대한 의혹이었다. 하륜은 4차례나 상소를 하면서 자신의 혐의를 부정하였고, 논란은 종결될 수 있었다.

하륜은 정치가로서의 삶을 이어가다가 1416년(태종 16)에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태종은 하륜을 그 누구보다 가까운 정치적 동지로 회고하였고, 세종은 그를 행정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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