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한확

한확[韓確]

명 황실, 조선 왕실과 모두 사돈을 맺다

1403년(태종 3) ~ 1456년(세조 2)

한확 대표 이미지

한확선생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관

한확(韓確)의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그의 가문은 고려 말의 세족이다. 고려 충렬왕 때의 재추(宰樞)인 한강(韓康)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고려 말에 여진,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운 한방신(韓方信)이다. 아버지는 한영정(韓永矴)인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의성(義城) 김씨 가문의 좌명공신(佐命功臣) 김영렬(金英烈)의 딸이고, 부인은 남양 홍씨 가문의 홍여방(洪汝方)의 딸이다.

한확에게는 여동생이 두 명 있었는데, 각기 명 3대 황제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와 5대 황제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의 후궁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확은 대명 사신으로 자주 파견되었고, 조선과 명의 외교에 주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조선 왕실과도 혼인을 맺는다. 특히, 막내딸은 수양대군의 장남인 덕종(德宗)과 혼인하였고, 훗날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즉, 한확은 성종의 외할아버지이다. 그는 세조의 즉위에도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봉되었다.

2 두 여동생이 명 황제의 후궁이 되다

1417년(태종 17)에 한확은 명 성조의 후궁으로 선발된 동생과 황하신(黃河信)의 딸 황씨(黃氏)를 따라 명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길가에는 두 여성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명으로 간 한확의 동생은 여비(麗妃)가 되었고, 동생을 데리고 간 15살의 한확에게는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관직을 내려졌다.

광록시 혹은 홍려시(鴻臚寺)의 경(卿), 소경(少卿) 등은 조선에서 진헌(進獻)한 처녀들이 가족과 동행하여 명에 갔을 때 그 가족에게 주어졌던 관직들이었다. 1408년(태종 8)에도 처녀 5인이 선발되어 명에 갔는데, 현인비(顯仁妃)로 봉해진 권씨의 오빠 권영균(權永均) 등이 이상과 같은 관직들을 제수 받았다. 따라서 한확이 광록시 소경의 관직을 받은 것이 예외적이거나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확은 이후 대명외교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418년에 세종이 즉위하자 한확은 승습사(承襲使)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명의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귀환하였다. 한확을 비롯한 사절단은 고명(誥命)을 받아왔고, 세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아우 한전(韓磌)을 의영고 승(義盈庫丞)으로 삼았다. 얼마 후 세종이 상왕 태종을 모시고 강원도에서 강무(講武)를 개최하였을 때 종친과 고위관료들이 대거 참석하였는데, 한확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1420년(세종 2)에는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했던 금과 은의 공물 면제를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그런데 1424년(세종 6) 명 성조가 북원(北元) 정벌 중에 사망하자 한확의 누이도 순사(殉死)하였다. 이후에도 그의 권세는 꺾이지 않았다. 한확은 명과의 외교에 많은 공헌을 하여 종2품까지 품계가 올라갔고, 장군절제사(掌軍節制使)를 역임하는 등 정치적 위세가 대단했다. 사헌부에서 한확을 전 감무(監務) 김성정(金成鼎)의 서녀와 간통하였다고 탄핵하자, 세종이 “이 사람은 내가 죄를 줄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벌하지 못한 것은 한 예이다.

1428년(세종 10)에는 명에서 다시 한확의 막내 누이동생을 선종(宣宗, 5대 宣德帝)의 후궁으로 간선하였다. 그때에도 사람들은 명으로 떠나는 한씨를 일러 ‘산송장[生送葬]’이라고 하며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막내 동생의 혼인은 한확의 의중도 많이 반영되었던 듯하다. 명 사신 창성(昌盛) 등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황실에 알려서 뽑혀갔다는 기록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확이 여동생을 북경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일부러 시집보내지 않아 사람들이 한확을 업신여겼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다.

한확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명에 왕래하였다. 그러면서 황실에도 좋은 이미지를 남겼던 듯하다. 명에서는 그를 인종(仁宗, 4대 洪熙帝)의 딸과 혼인시키기 위해 서너 차례나 불렀지만, 그는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대응은 세종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세종은 한확을 큰 임무를 맡길 만한 인물로 평하였다.

1435년(세종 17) 이후 한확은 중추원사, 판한성부사, 경기도 도관찰사, 평안도 도관찰사 겸 평양윤, 병마절도사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병조판서, 이조판서에도 제수되었다. 그가 주로 맡은 것은 사행 업무가 많았지만, 역임한 관직을 보면 인사, 군사, 지방행정 등을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딸들을 조선 왕실에 시집보내다

한확은 조선의 왕실과도 연이어 혼인 관계를 맺었다. 우선 1437년(세종 19)에 한확의 둘째 딸이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과 혼인하였다. 계양군은 세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신빈(愼嬪) 김씨이다. 훗날 계양군은 수양대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봉되었는데, 이때 장인 한확도 같이 봉해졌다. 이들 뿐 아니라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 중에는 청주 한씨 사람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계유정난의 주역 중 한 명인 한명회(韓明澮)도 한확과 9촌 관계이다.

한확이 두 번째로 왕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군(桃源君)과의 혼인이다. 그가 수양대군과 언제 사돈을 맺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계유정난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계유정난 이튿날에 세조가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으려 했을 때, 한확이 도원군의 장인으로서 정승을 맡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한확은 세자의 장인까지 되었지만, 그 영광을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세조는 즉위 직후 원자 이장(李瞕)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고, 한확의 딸을 세자빈(世子嬪)으로 삼았다. 그러나 세자는 1457년(세조 3)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 세자빈 한씨는 1470년(성종 1)에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한확은 세자가 죽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1456년(세조 2) 당시 좌의정이었던 한확은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으로 갔다. 사행의 주목적은 세자 책봉을 허락받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귀국 도중에 병을 얻어 만주의 사허(沙河)에서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고, 묘 앞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4 평가

한확은 명에 후궁으로 바쳐진 누이들을 매개로 조선과 명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명과의 가교 역할에 그의 개인적 능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또한 과거에 급제하지 않아 학문이 짧다는 당대의 평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인사권을 쥐고 있으면서 비방을 듣지 않았고, 업무를 치밀하게 처리한다는 평도 있었다. 그에 대한 세종과 세조의 신망도 두터웠다. 무엇보다 세종부터 문종, 단종, 세조까지 왕위 계승이 이루어질 때마다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각종 외교적 의례들을 처리하였다. 그런 점에서 조선 초기의 대명관계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데 있어서 한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었다.

한확 사후 청주 한씨 가문은 더욱 번성하였다. 아들 한치인(韓致仁), 한치의(韓致義), 한치례(韓致禮), 조카 한치형(韓致亨) 등은 성종이 즉위하자 인수대비를 주축으로 훈구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고 정승까지 오르면서 정국을 주도하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