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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안대군[懷安大君]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다

미상 ~ 1421년(세종 3)

회안대군 대표 이미지

회안대군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이름은 이방간(李芳幹)이며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넷째아들이다. 1397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서는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였다. 그러나 1400년(정종 2)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동생 이방원(李芳遠)과 개경에서 일전을 벌이게 되었고, 이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름 지어졌다. 그러나 승리는 이방원에게로 돌아갔고, 이방원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이방간은 귀양살이를 하다가 1421년(세종 3)에 세상을 떠났다.

2 출생과 가문배경

이방간은 출생 연도가 분명하지 않다. 둘째 형 정종 이방과(李芳果)가 1357년(공민왕 6)에 출생하였고, 바로 아래 동생인 이방원이 1367년(공민왕 16)에 출생한 것과 셋째 형 이방의(李芳毅)의 존재를 감안하면, 이방간은 1359년(공민왕 8)에서 1365년(공민왕 14)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조선이 건국할 무렵에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을 것이고, 그가 왕위를 두고 동생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 때는 30대 후반이었을 것이며, 세상을 떠날 무렵은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는 이성계였고,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다. 형은 이방우(李芳雨), 이방과, 이방의가 있고, 동생은 이방원, 이방연(李芳衍)이 있으며, 이복동생으로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낳은 이방번(李芳蕃), 이방석(李芳碩)이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이방우, 이방연 외에는 모두 ‘왕자의 난’과 관련을 맺고 있다.

부인은 세 명이다. 민선(閔璿)의 딸, 황형(黃亨)의 딸, 금인배(琴仁排)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아들은 이맹중(李孟衆), 이태(李泰), 이선(李善), 이중군(李仲窘)이 있고, 사위는 개국공신 조박(趙璞)의 아들 조신언(趙愼言)과 박경무(朴景武), 이대생(李大生) 등이다.

이방간의 고려 말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다. 그의 형제들 중 문과급제자는 이방원, 이방연 뿐이다. 이방간은 아버지 이성계의 영향을 받아 무인으로 활약했으리라 여겨진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이방간은 회안군(懷安君)에 책봉되었다. 그가 건국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명치는 않다. 다만,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삼형제는 그들이 건국에 공헌했음을 드러내고자 했고,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후 개국공신에 추록(追錄)되었다. 당시 정종은 ‘세 아우들이 먼저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업을 창건하였으니, 그 공이 매우 커서’ 공신의 작호를 내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건국 당시 개국공신 호를 하사하지 않았던 배경으로 태조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배제되었다는 이유를 덧붙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건국에 공을 세웠는지의 여부는 별개로, 당시 개국공신 추록은 그들의 권력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조치였다.

3 제1차 왕자의 난

조선 건국 이후 세자가 된 사람은 이복 막내 동생 이방석이다. 이방석의 세자 책봉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우선, 정도전의 재상 중심 정치운영 방식이 국왕의 자질을 덜 중요하게 여겨서 나타난 결과라는 의견이 있다. 한편, 실록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신덕왕후 강씨의 영향력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태조가 장성한 다른 아들들의 반발을 예상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왕자들에게 이방석을 세자에 책봉하게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다. 책봉 이후 개국공신들의 회맹(會盟)에 왕자들을 참여하도록 해서 서로 협력을 촉구하는 정도만 확인된다. 태조 재위 기간 중에 세자와 왕자들 사이의 대립 구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태조는 결국 다른 왕자들의 권력욕을 제어하지 못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 간의 대결 구도로 나타났다. 당시 기록은 전적으로 승자의 입장에서 서술된 측면이 강하다.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이 “어린 서얼(庶孼)을 끼고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고자 했고, 이에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고 꾀했다.”는 것이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방간은 이방원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는 직후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를 맡으며 왕자들이 장악한 군사력의 한 주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봉되면서 막강한 권력을 확보하였다.

4 제2차 왕자의 난

정종 즉위 이후 국왕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고, 왕자들이 군사력을 장악하고 강력한 권력을 확보한 상황 속에서 그들 사이에 견제가 발생하였다. 실록에서는 정종의 바로 아래 동생 이방의는 “성품이 순후하고 근실하여 다른 생각이 없었고”, 그 아래인 이방간은 “자기가 왕이 될 차례로 마땅히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니, 배우지 못해서 광망하고 어리석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1400년(정종 2)에 발생한 제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승리로 끝났고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그 무렵의 실록 기록은 태종 이방원의 집권 과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주력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이방간의 권력욕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설명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직전 이방간이 처음으로 동생 이방원과 대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사람은 처조카 이래(李來)였다. 하지만 이래는 자신의 좌주인 우현보(禹玄寶)에게 이방간이 거사하려 한다고 알렸고, 우현보는 자신의 문생인 이방원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방간과 이방원은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결전을 벌였다. 한낮에 개경 시가에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방간은 결국 홀로 달아나다가 잡혀 왔고, 변란을 주동한 원인으로 박포(朴苞)를 지목하였다.

박포는 개국공신에 책봉된 인물이자, 제1차 왕자의 난에서도 공을 세워 정사공신의 훈호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곧 외방으로 좌천되어 권력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방간의 자백은 박포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서 ‘정안공(靖安公, 이방원)이 공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니, 반드시 장차 변이 날 것이다. 공은 마땅히 선수를 써야 할 것이다.’라고 부추겼고, 이에 자신이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박포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었고, 박포는 자신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외방으로 보내졌던 불만이 있다고 자백하였다. 이로써 박포는 유배되었다가 며칠 뒤에 주살되었다. 그리고 이방간은 아들 이맹중과 함께 토산(兎山, 황해도 금천)에 안치(安置)되었다. 안치는 유배형과 유사한데, 거주지에도 제한을 둔 무거운 벌이었다.

5 유배 이후의 삶

제2차 왕자의 난은 박포가 주동한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이후 이방원은 자신의 왕위 계승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이방간은 ‘어리석고 우둔하며 아는 것이 없어’ 박포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정리되어 갔다.

이방간은 토산에 추방된 후 안산(安山), 익주(益州, 익산), 완산(完山, 전주), 홍주(洪州, 홍성) 등으로 옮겨 다녔지만,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듯하다. 태종은 그에게 식읍(食邑)을 내려주거나 쌀, 콩 등의 곡식을 하사하였고, 아플 때에는 의관을 보내 치료해 주었다. 종실의 봉군호를 개정할 때에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태종이 편지를 써 보내 이방간의 안위를 약속하는 일도 있었다. 이방간을 서울로 소환하려고 하다가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다.

한편,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태종과 일전을 벌였던 그가 살아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이방간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갔다고 무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윤목(尹穆)은 사행 중에 회안군에 대한 처결이 잘못되었음을 언급했다가 처벌되었다. 이양우(李良祐), 심종(沈淙) 등은 유배된 이방간과 개인적으로 연락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태종은 형 이방간을 끝까지 살려두었다. 그가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 이복동생, 외척, 관료 등의 많은 사람들을 제거했지만, 친형까지 죽음으로 내몰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세종이 즉위한 이후 이방간에 대한 처벌 상소는 더욱 빈번해졌지만, 세종 역시 부왕의 뜻이라 하여 숙부를 보호하였다. 1421년(세종 3)에 이방간은 홍주(洪州, 홍성)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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