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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대한제국의 황제, 망국의 황제

1852년(철종 3) ~ 1919년

고종 대표 이미지

고종 사진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즉위와 수렴청정

고종(高宗)은 영조(英祖)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이다. 철종(哲宗) 3년(1852) 7월 25일 흥선군의 사저 청니방(靑泥坊)에서 출생하였다.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으로 , 어려서부터 비범하였다고 전한다. 철종 14년(1863) 12월 8일 조선의 25대 임금인 철종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는 아버지 대원군과 순조(純祖)의 세자, 익종(翼宗)의 비(妃)인 조대비(趙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 사이의 정치적 밀약의 산물이었다. 이른바 세도정치가 극심하던 당시, 안동 김씨 가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순조대 이래로 최대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가문은 철종이 후사가 없자 대통을 이를 왕손들을 경계했으며, 흥선군은 그 화를 피하며 시정잡배를 자처하면서 두 아들을 길러내며, 훗날을 도모하고 있었다. 안동 김씨 가문과 경쟁하던 풍양 조씨 가문의 입장에서는 안동 김씨들의 독주를 저지해야만 했으며, 이에 흥선군은 풍양 조씨 가문인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趙成夏)를 통하여 조대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의 양자인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종통(宗統)을 잇게 하였으며, 1863년 12월 13일 고종은 조선의 26대 군주로서 즉위하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아버지 흥성군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해졌다. 또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866년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비(妃)로 맡아 들이니, 바로 훗날의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그렇지만 즉위 당시 고종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국정은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수렴청정은 10여 년간 계속되었는데, 사실상 권력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휘둘렀다. 당시는 수 십 년간 지속된 세도정치로 인하여 왕권은 크게 위축되어 있는 가운데 서구 열강의 침략적 통상요구에 대처해야 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를 맞아 실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신장시키는 한편 서구의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막아내겠다는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다. 왕실의 법궁(法宮)이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로 파손되어 있던 경복궁(景福宮)의 중건 ,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을 통한 법률 정비, 세도가의 권력을 재생산하는 기구화한 비변사(備邊司) 혁파, 당쟁의 기반이자 지방민의 수탈기구로 전락한 서원의 철폐, 호포제(戶布制) 실시를 비롯한 은광산 개발, 면세전 조사 등의 재정 강화책과 같은 대내적인 정책과 서학(書學, 천주교)에 대해 억눌러서 못 하게 하는 금압책(禁壓策)과 이로 말미암은 프랑스 군의 침공인 병인양요(丙寅洋擾),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빌미로 한 미국함대의 침략인 신미양요(辛未洋擾)는 이러한 정책의 결과였다.

2 친정과 개항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쥐고 국정을 운영해 가는 가운데 고종은 장성하여 22세의 청년이 되었으며 친정(親政)을 원했다. 여전히 국정은 대원군을 비롯한 친대원군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1873년 10월 25일과 11월 3일에 걸쳐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청국 화폐 수입 등 대원군이 취한 일련의 정책에 따른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 를 계기로 대원군은 하야했으며, 이에 친정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친정과 더불어 원자(元子)를 얻는 기쁨도 맛보았다. 친정을 선포한 직후인 1874년 2월 8일 왕후와의 사이에서 원자, 바로 순종(純宗)이 탄생한 것이다. 사실 친정 이전인 1871년 11월, 고종과 왕후 사이에 학수고대하던 원자가 태어났지만 불과 4일 만에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첫째를 떠나보낸 고종과 왕후에게 원자의 탄생은 더 없는 기쁨이었다.

그렇지만 기쁨도 잠시 조선의 정국은 새로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개항이었다. 1875년 8월 20일(음력)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에 정박, 식수 보급을 명목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에 대하여 조선의 수군이 포격을 가하자, 이에 운요호에서도 초지진(草芝鎭)에 포격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통상을 요구하였고 1876년 2월 2일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일본측 전권변리대신 쿠로다 기요카다(黑田淸隆) 사이에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다. 12개조로 이루어진 이 조약은 부산에 이어 인천, 원산의 추가 개항을 약속한 한편 관세에 대한 규정이 없고, 치외법권을 인정함은 물론 조선의 해안선에 대한 측량을 허용하는 등 조선에 불리한 다수의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일본 침략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평가받는다.

비록 국제정세에 밝지 않아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고종은 이후 문명개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위하여 1880년 근대적인 무기에 대한 지식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영선사(領選使)를, 다음 해인 1881년에는 우리나라보다 먼저 개항한 후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던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기 위하여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는 등 근대 문물의 섭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조일수호조규 이후 급변하는 대내외정세에 대응하고자 했으며, 신식군대로서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한편 1882년 미국과 통상장정을 체결한 데 이어 영국(1883), 러시아(1884), 프랑스(1886) 등과 수호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3 왕권에 대한 도전들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개항과 잇따른 개화정책은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개항에 의해 조선의 시장은 조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되었으며, 개화정책에 따라 과거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들을 연출하였으며, 이는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였다. 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다. 1881년 신식군대로서 신설된 별기군의 창설과 더불어 종래 5군영으로 편제되었던 조선의 군영은 무위영(武衛營)와 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통합․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군병들은 실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겨진 군병들 역시 1년이 넘도록 급료를 지급받지 못하는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882년 6월 구식 군병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하여 수 개월치의 급료로 세미(稅米)를 지급하였지만, 이 쌀에는 쌀겨나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구식군인들이 의금부 등에 쳐들어가며 난이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개항 이후 처지가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던 한양의 백성들이 대거 동참하며 대궐을 침범하였다. 그 수습을 위하여 대원군은 복권되었으며, 다시 집권한 대원군은 군제를 과거 5영 체제로 되돌리는 한편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는 등 개항 이후 개화정책을 중단시켰다.

임오군란에 의해 성립된 대원군 정권은 청군의 개입으로 한달 만에 무너졌다. 군란 당시 피신한 왕후의 요청으로 출병한 청나라 군대는 7월 13일 대원군을 텐진(天津)으로 잡아가며 군란은 마무리되었다. 고종은 청군의 개입으로 다시 집권하게 되었지만 청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임을 명문화하게 되었으며 친청(親清)적인 인사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이처럼 조정 내에 청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었다. 이는 결국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등에 의해 1884년 10월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폭발되었다.

우정국(郵政局) 낙성식(落成式)을 틈타 정권을 탈취한 이들은 청에 끌려간 대원군의 송환과 조공의 폐지, 문벌 폐지, 지조법(地租法)의 개정과 특권 상인층 일소 등 급진적인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당초 군사적 원조를 약속했던 일본이 돌연 돌아 선 데다가 취약한 대중적 기반으로 인하여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고종의 권위는 더욱 추락하였다.

또 이러한 사건을 거치는 동안 대외적으로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하였고 이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이 서구 열강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음과 더불어 열강들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 특정 국가가 조선에 대해 함부로 침략해 들어올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이처럼 고종은 친정 이래로 연이어 왕권에 대한 도전을 받았지만 조선을 둘러 싼 서구 열강의 세력 균형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부식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에 고종은 ‘군국서무(軍國庶務)를 총괄’하는 부서로서 내무부(內務府)를 설치 하는 한편 척족 세력인 여흥 민씨 일족을 끌어 들여 국왕의 지지기반을 구축하며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4 1894년 이래 일련의 사건들과 왕권의 축소

1894년에 벌어진 동학농민운동은 향후 한국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일련의 사건의 도화선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구축하며 군주 중심의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고종 역시 커다란 변화와 시련을 겪게 되었다.

1894년 1월 초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탐학과 횡포가 계기가 되어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동학 농민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농민군의 기세는 높았으며, 그 진압을 위해 청과 일본의 군대가 파병되었다. 농민군은 근대 화기로 무장된 일본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으며, 결국 10월 22일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배함으로써 동학농민전쟁은 실패를 고하였다.

한편 조선에 파병된 직후 일본군은 궁중에 난입하여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홍집(金弘集)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 이곳에서 관제 및 사회제도 개혁안을 공포하며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면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시작되었다.

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고종에게 농민군의 봉기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농민군에 대하여 ‘분수를 어기고 기강을 해치는’ 난민(亂民)으로 규정하였다. 즉 이들을 함께 손을 잡고 가야할 동조자는 물론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한 기반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철저히 통치와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군국기무처와 내각의 등장으로 대변되는 궁과 부의 분리로 국왕으로서의 실권을 잃게 되었다. 이후 김홍집 내각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朴泳孝)를 사면․귀국시켜 연립내각을 구성하는 등 일본의 입김은 더욱 거세졌다.

5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성립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왕후와 함께 이를 타계하고자 미국, 러시아 등의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러시아 공사 웨베르(Waeber)를 친견하는 한편 친일 성향의 박영효에게 왕후 시해를 계획했다는 죄를 씌워 면직 시키는 한편 박정양(朴定陽)과 같은 친미․친러적 성향의 인물들을 기용하여 일본을 견제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낭인을 파견, 1895년 8월 20일 궁에 침입하여 왕후를 시해 하였으며(을미사변),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마치 포로처럼 감금되었다. 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은 고종의 국정 간여를 배제하며, 태양력을 사용하고 단발령(斷髮令)을 실시 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을미사변 이후 반일적인 사회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신변의 안전을 보장함은 물론 조선에 침입하는 일본 세력을 막기 위해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고, 반역의 무리들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는 윤음(綸音)을 내렸다. 국왕이 외국에 몸을 의탁했다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내각은 혁파되고, 갑오개혁은 중단되었다.

이처럼 1894년 이래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고종은 실권을 잃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후 시해라는 비극을 겪었다. 군주로서의 권위에 심각한 손상을 받으며 일본 세력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던 상황에서 단행한 아관파천은 국왕으로서 외국공사관에 의탁했다는 점에서 수치였겠지만 불리한 정치적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고종이 던진 승부수였다. 이러한 면을 볼 때 일본과 친일세력으로부터 군주권의 수호를 위한 고종의 정치적 결단력은 매우 과감했다고 하겠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그곳에서 1년간 머물다가 1897년 2월 20일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으로 환어하였다. 환어 이후 고종은 새로운 연호를 ‘광무(光武)’로 할 것을 명 하는 한편 원구단(圜丘壇)을 축조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결정함과 아울러 10월 12일 황제로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황제가 만기(萬機: 임금이 보는 여러 가지 정무)를 총람하는 전제황권국가였다. 실로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입법, 사법, 행정은 물론 군통수권과 관리의 임면권, 외교권 등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하였다. 이렇게 막대해진 권력을 바탕으로 고종은 서울의 도시화 사업, 신식 군대의 창설과 군함의 구입, 이용익(李容翊)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인물의 기용, 각종 회사 설립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 설립 이후 고종이 추진한 일련의 개화정책은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통칭되는데,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고종을 근대적 개명군주로 평가하며 광무개혁은 고종이 추진한 근대화 개혁으로 대한제국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 국가를 지향했다는 평가와 고종이 추진한 전제황권의 강화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근대적 개명군주, 근대 국가를 지향했다고 하기에 당시 새로운 정치사상이나 이념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틀림없는 사실은 군주권의 강화를 위해 고종이 분투했다는 것과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외세를 견제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6 망국과 승하

대한제국의 성립과 황제 즉위는 상황에 의지한 측면이 강했다. 즉 고종과 조선이 강력하여 이룬 것이라기보다는 외세간, 특히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세력 균형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으며, 이 세력 균형이 무너짐에 따라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04년 2월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대한제국과 고종을 지탱하던 세력의 균형추가 무너져 버렸다. 전쟁의 결과 조선에서 일본의 우월권은 국제적으로 보장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이 조약에 대해 고종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국새를 찍지도 않았다. 이에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호소하기 위하여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이준(李儁) 3인을 특사로서 파견하였다.(헤이그특사 사건) 그러나 안타깝게도 각국의 정부는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외교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들의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이를 구실로 조약 위반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 결국 1907년 7월 18일 퇴위하고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그저 이름뿐인 ‘태황제(太皇帝)’로 물러나고 황태자였던 순종이 즉위하였다.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퇴위는 사실상 황제의 권력이 이미 일본에 의해 제압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종 퇴위 직후인 1907년 7월 24일 일본은 소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또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케 하여 국정 전반을 간섭함은 물론 재정부족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강점(強占)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결국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체결되었으며, 일본은 대한제국의 이름을 조선으로, 고종을 이태왕(李太王)으로 변경하였다. 한편 당시 고종은 덕수궁에 머물렀기 때문에 ‘덕수궁 전하’라고도 불리었다. 고종은 국권을 빼앗긴 지 9년째인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에서 승하하였다. 그런데 고종의 사인을 둘러싸고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별다른 병세가 없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신이 부풀어 오르는 등 이상한 징후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부터 이러한 소문이 돌았다. 고종의 사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밝혀진 바가 없지만 독살설은 당시 유포되어 반일감정을 더욱 부채질 하였으며 3·1운동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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