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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郭鍾錫]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편지를 보내다

1846년(헌종 12) ~ 1919년

곽종석 대표 이미지

곽종석 신도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유림(儒林) 대표 137명이 1919년 4월 12일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여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이 주도하여 3·1 운동이 시작되자, 유림이 여기에 자극을 받아 독자적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낸 것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유교(儒敎)계 인사들이 체포되어 옥고(獄苦)를 치렀다. 당시 이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곽종석이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부터 시종일관 만국공법(萬國公法)에 근거하여 국제 사회에 독립을 호소하는 길을 택한 바 있다. 그가 3·1 운동 당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을 주도한 것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2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다

곽종석은 1846년 6월 24일 경상도 단성현 사월리 초포마을에서 시골 선비 곽원조(郭源兆)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섯 살 때부터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읽기 시작했으며, 열 살이 되기 전에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그리고 『서경(書經)』을 모두 마쳤다. 그는 열두 살 때 부친을 여윈 후 더욱 학문에 전념하여 유교 경전은 물론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경전까지 섭렵하였다.

곽종석은 열여덟 살이 될 무렵 성리학에 분명한 뜻을 세웠다. 그것은 이 무렵 아호(雅號)를 회와(晦窩)라고 지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의 아호가 회암(晦庵)이므로 주희를 본받는다는 뜻에서 이러한 아호를 지은 것이었다. 그는 스물한 살 때 「회와삼도(晦窩三圖)」를 지었는데 이 글에서는 주희 이외에 회헌(晦軒) 안향(安珦)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존경하고 추모하는 뜻을 밝히고 있다. 안향은 고려 말 성리학을 받아들인 인물이고 이언적은 영남의 대표적 성리학자이다. 그는 이 무렵 자신이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하였음을 자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곽종석은 아홉 살 무렵부터 과거 응시를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열아홉 살 때 향시(鄕試, 지역에서 보는 1차 시험)에 합격하였지만, 이듬해 서울에서 치러진 회시(會試, 향시 합격자가 모여서 보는 2차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말았다. 그 뒤로도 과거 공부를 계속하여 스물일곱 살 때 마지막으로 향시에 응시하였다. 서른이 되던 해 과거를 위한 공부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사실 그때까지 과거에 응시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모친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응시한 것이었다. 이 무렵 모친도 그의 뜻을 이해하고 더 이상 과거 응시를 요구하지 않았다.

3 산림으로서의 삶을 선택하다

조선시대에는 학식과 덕이 높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선비를 일컬어 산림(山林)이라고 불렀다. 곽종석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고 산림으로서의 삶을 선택하였다. 그는 세상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사는 곳을 옮겼다. 그는 스물두 살 때 단성현을 떠나 삼가현으로 옮겨 역동(嶧洞)이라는 곳에 역고재(繹古齋)라는 서재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곽종석은 서른여덟 살 때 태백산맥 한 가운데에 위치한 안동부 춘양(현재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학산촌(일명 筬山)이라는 곳으로 옮겼다. 그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발견하고 은거할 만한 곳이라고 여겨 가족을 이끌고 이주한 것이다. 그는 움막을 짓고 감자를 심고 도토리를 주어 끼니를 이으며 야인으로 자처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는 이로부터 3년 뒤에는 학산촌보다 더 깊은 산속에 위치한 태백산 금대봉 아래로 이사하였다.

곽종석이 은거지로 안동부 춘양을 선택한 것은 이곳이 깊은 산속으로 학문에 전념하기 적합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그는 학산촌으로 은거하기 5년 전 안동을 방문하여 도산서원과 이황의 묘소를 참배한 바 있다. 그때부터 자신의 호를 면우(俛宇)라고 하였다. 면우란 처마가 낮아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작은 집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그 때 이미 이곳에 은거할 뜻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조식과 이진상의 학문의 맥을 잇다

곽종석은 스물다섯 살 때 성주로 이진상(李震相)을 찾아가 심학(心學)을 배웠다. 그는 이진상에게 배운 내용을 「지의록(贄疑錄)」으로 정리하였다. 이진상의 아들인 이승희(李承熙)와도 친교를 맺었다. 당시 이진상은 경상도의 대표적인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마음이 곧 이치라고 하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제창해 영남지방에서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곽종석은 이진상이 1886년 별세하자 그의 문집인 『한주집(寒洲集)』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그런데 이진상은 퇴계의 학설의 변경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집이 간행되자 도산서원에서 크게 반발하여 불태우기까지 하였다. 당시 그는 안동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이진상의 제자들이 크게 분개하여 성토하려 하였지만 그는 이를 뜯어말렸다. 그가 1896년 10월 가족을 이끌고 거창으로 이주한 것도 『한주집』을 둘러싼 소동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곽종석은 이후에도 퇴계의 학문에 대해 정면으로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면적인 변화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영남지방의 또 다른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기리는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1899년 『남명집(南冥集)』을 교정하였으며, 1912년에는 『남명조선생묘지명』을 짓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 남명학파의 본고장이었던 경상우도에서는 남명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남명이 머물던 산천재(山天齋)를 개수(改修)하여 남명학파 재건의 센터로 삼았다.

5 고종이 여러 차례 불렀지만

곽종석은 한사코 산속에 숨어살려고 하였지만 시대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위태로운 시대였기에 유능한 인재가 더욱 필요했다. 그도 시대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 처음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경상도에 파견된 위무사(慰撫使,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한 임시 관리) 이중하(李重夏)가 영남의 여러 선비들을 조정에 추천하였는데 당시 안동에 살고 있던 그도 여기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중하의 추천에 따라 그는 비안현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조정뿐 아니라 시골 유생들도 그를 찾았다. 1895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가 살고 있던 안동 지방의 유생들도 의병을 일으켰다. 유생들은 그를 부장(副將)에 추대하였지만 그는 이것도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세상에 나가는 것을 마다하였지만 세상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고종황제는 1899년에도 조서를 내려 그를 불렀다. 그가 상소를 올려 사양하자 중추원 의관을 제수했지만 이마저도 부임하지 않았다.

고종황제는 1903년에도 예물을 갖추어 보내며 간곡하게 그를 불렀다. 그는 더 이상 사양만 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부득이 서울로 올라와 황제를 만났다. 하지만 이때에도 관복이 아닌 유건과 도포 차림으로 황제를 만남으로써 세상에 나갈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성리학을 숭상하고, 민심을 결속하며, 군사를 정비하고, 돈 씀씀이를 절약할 것 등 4개 항목을 건의하였다. 황제가 의정부 참찬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이것도 마다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6 을사늑약 소식에 급히 상경하다

이렇게 한사코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마다하던 곽종석도 을사늑약 소식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보호조약을 체결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스스로 서울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상경하는 도중 옥천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서둘러 을사오적을 참수하고, 보호조약을 거절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려보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여 황제를 만나고자 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소에 대한 답변도 받지 못한 채 결국 빈손으로 귀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06년 2월 최익현이 의병을 함께 일으키자는 내용의 편지를 그에게 보내왔다. 하지만 그는 ‘임금에게 화를 재촉하고 백성들에게 독을 끼치는 일은 감히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과거 을미의병 때도 부장에 추대되었지만 동참하지 않은 바 있다.

곽종석은 이렇게 의병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세상일에 아주 무관하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을미의병 당시에도 의병에 참여하는 대신 동문인 이승희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왕비를 시해한 일제를 토벌할 것을 요청하는 글을 각국 공사관에 보낸 바 있다. 이번에도 그는 무력보다는 만국공법에 호소할 것을 주장하였다.

곽종석은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 소식을 듣고 비통하여 두문불출하였다. 그는 이름을 도(鋾)로 고치고 자를 연길(淵吉)로 고쳤다. 이것은 도잠(陶潛)의 자인 연명(淵明)과 김이상(金履祥)의 자인 길보(吉父)의 앞글자를 딴 것이었다. 도연명은 귀거래사로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지만 김이상도 송 말기의 유학자로 송이 망하자 시골에 숨어 산 사람이었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문을 닫아 걸은 채 빈객(賓客)을 사절하였지만, 후생(後生)이 배우기를 청할 때는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7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다

곽종석은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망곡례(望哭禮)를 행하고 상복을 입었다. 이미 연로하였기 때문에 서울에서 열리는 고종의 인산(因山, 국장의 다른 표현)에는 조카인 곽윤(郭奫)과 제자인 김황(金榥)을 대신 보냈다. 그는 1919년 3월 1일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은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유림이 늦게라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는 모두 2,674자에 달하는 긴 글이었기 때문에 ‘파리장서(巴里長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제자인 김황이 초안을 작성하였고 그가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완성하였다. 김창숙(金昌淑)은 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영문으로 번역하여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金奎植)에게 발송하는 한편 국내의 모든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유생들이 옥고를 치러야만 하였다. 곽종석도 당시 거주하고 있던 거창의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징역 2년이 언도(言渡)되었고, 곽종석은 항소를 포기하였다. 그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지만, 1919년 8월 24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상 옥사(獄死)와 마찬가지였다. 그는 문집인 『면우집(俛宇集)』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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