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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權東鎭]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

1861년(철종 12) ~ 1947년

권동진 대표 이미지

권동진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권동진(權東鎭)은 1861년 태어나서 1947년 사망하였으며, 87세까지 장수한 인물이다. 그는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으로부터 시작하여 3·1운동, 6·10 만세운동, 신간회를 거쳐 8·15 해방과 좌우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격동을 지켜본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이 가운데 가장 명예로운 경력으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점을 꼽을 것이다.

2 무인의 가문에서 태어나다

권동진은 1861년 12월 15일 충북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에서 아버지 권재형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 6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애당(愛堂) 또는 우당(憂堂)이며 훗날 천도교에 입도한 후 지은 도호는 실암(實庵)이었다. 본관은 안동이며 증조부부터 무과에 급제한 무인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권재형도 경상도 중군을 지냈으며 형인 권형진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의 길을 걸었다. 선대에는 안동에 세거하다가 아버지 대에 괴산으로 옮겼다. 그는 여덟 살 되던 1896년 서울 재동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권동진은 한량으로 지내다가 1882년 5월 29일 남행부장(南行部將)으로 임명되었다. 남행부장이란 무과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음덕으로 무관에 임명되는 것을 말한다. 그가 무관으로 임명된 것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임오군란은 이로부터 열흘 뒤인 6월 9일 일어났다. 권동진은 1883년 2월 4일 수문장에 임명된 것을 보아 임오군란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넘겼던 것으로 보인다.

권동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3월에는 우영(右營) 전초(前哨)의 초관(哨官)으로 있었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등 개화당에 의해 동원된 병력은 전후영(前後營) 소속이었으므로 그는 갑신정변과 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까닭에 갑신정변 이후에도 무관으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85년 별군직에 임명되었으며 1887년에는 웅천현감과 함안군수를 지내고 1893년에는 거문도 첨사를 지냈다.

3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고 뒤이어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이 전개되면서 한반도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의 형 권형진이 갑오개혁 과정에 관료로 발탁된 것을 계기로 아우인 권동진도 관직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의 형 권형진은 1894년 세워진 군국기무처의 내무 참의가 된 것을 시작으로 갑오개혁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그리고 급기야는 1895년 8월 20일 벌어진 을미사변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권형진은 이 때문에 개화파 정권이 붕괴되자마자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쳐야만 하였다. 권동진도 을미사변에 관여하였기 때문에 형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이 무렵 그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들로는 조희문, 이범래, 우범선, 이두황, 정란교, 오세창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오세창은 이후 동지로서 일생을 같이하였다.

권동진은 일본에 망명하는 동안 일본 근위사단 등에서 군사학 연수를 하는 한편 박영효, 조희연, 장박, 유길준 등 개화파 정객들과 교유를 하였다. 하지만 본국 정부에서 그를 명성황후시해사건의 하수인으로 지목하여 줄기차게 본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그는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의 형 권형진이 1900년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자진 귀국했다가 참형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4 천도교에 입도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다

권동진은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최시형에 이어 동학의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당시 일본으로 건너와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이 무렵 동학 노선을 개화로 변경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권동진은 이러한 권유를 받아들여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오세창도 함께 입도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손병희의 핵심 참모로서 평생 보필하였다.

권동진은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오세창 양한묵 등과 함께 《천도교대헌》을 작성하는 등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또한 천도교 교단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계몽운동도 전개하였다. 1906년 6월 박문사라는 인쇄소 겸 출판사를 인수하여 보문관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일간지인 『만세보』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한자 옆에 루비활자로 독음을 달아 한자를 알지 못하는 민중들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권동진은 1907년 대한자강회의 후속 단체로 대한협회가 결성될 때에도 천도교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대한협회는 교육의 보급과 산업의 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는데 그는 특히 대한협회의 실업부장을 맡아 식산흥업에 앞장섰다.

5 사전에 3·1 운동을 준비하다

권동진은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하지만 3·1 운동 당시 그의 역할은 한 사람의 서명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3·1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18년 11월 경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오세창, 최린, 이종일 등과 함께 민족자결의 범위에 조선이 포함될 수 있도록 운동을 전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권동진은 1919년 1월 20일 오세창, 최린과 함께 손병희를 사저인 상춘원으로 찾아가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요청하였다. 손병희가 흔쾌히 허락하여 3·1 운동의 준비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맡기로 하였고, 최린은 천도교 외부와의 관계를 담당하기로 역할을 나누어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3·1 운동을 준비하면서 천도교에만 국한하지 않고 기독교와 불교 등 여타의 종교 세력까지 끌어들여 거족적인 민족대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3·1 운동을 위한 준비작업은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어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독립선언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독립선언 직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22일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6 사회주의자와 손잡고 신간회를 만들다

3·1 운동이 끝난 뒤 조선에는 새로운 사상인 사회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20년대 중반 자치론이 제기되면서 민족주의 진영도 일제 식민통치에 대해 타협적인 세력과 비타협적인 세력으로 갈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천도교 3대교주인 손병희가 1922년 사망하면서 이후 노선을 둘러싸고 천도교 내부도 이른바 신파와 구파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권동진은 천도교 내에서 구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당시 신파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최린을 들 수 있다. 최린이 자치론을 제기하는 등 신파가 대체로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그가 속한 구파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는 새로 등장한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제2의 3·1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조선공산당과 손잡고 만세시위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권동진은 타협적인 세력들이 추진하고 있던 자치론을 분쇄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합작하여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6·10 만세운동 당시 사회주의자와 손을 잡았던 경험도 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간회에는 그가 속한 천도교 구파 이외에 안재홍, 신석우 등 조선일보 계열과 불교계의 한용운 등도 참여하였다. 그는 신간회 창립 당시 본부 부회장을 맡았으며 1929년에는 복대표대회의 집행위원장을 맡아 신간회를 이끌어나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7 해방 정국에서 우파의 어른 역할을 하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 권동진은 이미 80대 중반의 노인이었다. 이승만보다도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으므로 이제 전면에 나서서 정치활동을 벌이기는 어려운 나이였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명망을 바탕으로 각 정당과 단체의 어른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권동진은 1945년 9월 4일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위원회는 우파들이 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 만든 것으로 자신들은 친일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명망이 있는 독립운동가인 그를 추대하여 정통성의 하자를 보충하려 하였던 것이었다. 그들은 한민당을 창당할 때에도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그를 영수로 추대하였다.

권동진은 한민당에는 참가하지 않고 대신 신한민족당이란 정당을 별도로 조직하였다. 그는 1945년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자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이 위원회의 부위원장은 안재홍이었는데 권동진이 워낙 연로하여 실무는 자신이 도맡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신한민족당은 1946년 4월 김구의 한국독립당, 안재홍의 조선국민당과 통합하였고 그는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것으로 그의 정치활동은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듬해인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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