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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헌[金敎獻]

민족종교 대종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다

1868년(고종 5) ~ 1923년

1 개요

김교헌은 대종교의 2대 교주이다. 1대 교주인 나철(羅喆)이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2대 교주인 김교헌은 명문가 출신의 온건한 문신이었다. 따라서 나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도 그가 나철에 이어 대종교의 2대교주가 된 것을 의외로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대종교의 교리 체계를 정립하고 교단 조직을 정비하는 등 대종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종교를 낳은 사람은 나철이라고 한다면 대종교를 기른 사람은 김교헌이라고 할 수 있다.

2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김교헌은 1868년 수원군 구포에서 김창희(金昌熙)와 풍양조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당명은 보화(普和), 뒤에 이름을 김헌(金獻)이라고도 하였다.

그의 집안은 당시 대단한 명문가였다. 그는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아버지인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7대손이었다. 김주신은 소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지지하여 그가 국왕으로 등극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영조는 그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효간(孝簡)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당시 왕자궁으로 쓰였던 340칸에 이르는 대저택을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영조는 김주신의 후손 가운데 과거 급제자가 나올 때마다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것은 김교헌이 태어난 고종 때까지 전통으로 지켜졌다.

그의 아버지 김창희는 1874년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으며 육조(六曹)와 삼사(三司)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쳐 공조판서까지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영접관으로 임명되어 청의 군대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갑오개혁 당시 큰 역할을 한 김홍집(金弘集)도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의 5대손이었으니 그와는 먼 일가였던 셈이다. 즉 김교헌은 참으로 대단한 명문가의 도련님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3 24세의 나이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다

김교헌은 18세 되던 해인 1885년에 치러진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하는 응제(應製)를 통해 곧바로 전시(殿試)에 나갈 자격을 얻었다. 당시 곧바로 전시에 나가도록 하는 것을 직부전시(直赴殿試)라고 불렀다. 국왕의 앞에서 치러지는 전시에서는 합격은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등급만 정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직부전시는 일종의 특전이었다.

김교헌이 경은부원군의 7대손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배려하여 직부전시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전시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자 국왕이 특별히 잔치를 베풀어 주고 경은부원군 내외의 사당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의 급제를 왕가의 경사로 받아들인 것이다.

김교헌은 과거에 급제한 후 승정원가주서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후 승문원부정자를 비롯하여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 규장각직각, 홍문관수찬 등 주로 문한(文翰)과 관련된 기관에 근무하다가 1892년 24세의 나이로 성균관대사성에 올랐다.

김교헌의 아버지도 1874년 30세의 나이로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바 있다. 그는 18년 만에 아버지에 이어서 성균관대사성을 맡은 셈이다. 성균관대사성은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성균관의 전임 관원 가운데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그의 아버지는 30세의 나이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는데 그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니 아버지의 기록을 깬 셈이다.

4 갑오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김교헌은 27세의 젊은 관료였다. 글 잘 짓는 문신 관료였던 그도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는 1894년 8월 외무아문참의 겸 회계국장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외부참서관, 법부참서관 겸 고등재판소판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가 갑오개혁 당시 실무 관료로 등용된 이유로는 같은 경은부원군 후손으로 당시 갑오개혁을 주도하고 있던 김홍집과의 관련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교헌은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홍집이 군중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과 비교한다면 그는 비교적 무사히 넘어간 셈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는 개화파 정부의 핵심 세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1년 이상의 공백기를 거친 후 1897년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중추원의관으로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1898년 1월과 2월 여흥부대부인과 흥선대원군의 장례를 연이어 치를 때 서사관(書寫官)으로 차출되었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부회장을 맡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그가 오히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직후인 1899년 1월에 비서원승에 임명된 점으로 미루어 독립협회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후 궁내부대신비서관, 옥구감리, 부산감리 겸 동래부윤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5 문물과 역사를 정리하는 일을 맡다

대한제국은 대규모 편찬사업을 잇달아 전개하였다. 왕조의 운명을 미리 예감한 때문인지이러한 편찬사업을 통해 과거의 문물과 역사를 정리해 나간 것이다. 김교헌은 소장 관료 시절 문한(文翰)과 관련된 관직을 두루 거친 전형적인 문신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국가적인 편찬사업에는 모두 참여하였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편찬사업이었다.

『증보문헌비고』는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제도와 문물을 16개 분야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정리한 일종의 백과전서이다. 영조 46년에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에 의해서 중국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본떠서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고종 때에 증보한 것이다. 『증보문헌비고』편찬은 1903년 2월 시작되어 1908년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김교헌은 1903년 1월 김택영(金澤榮)·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찬집위원(纂輯委員)에 임명되었다.

『증보문헌비고』편찬사업이 완료되자마자 곧바로 『국조보감國朝寶鑑)』편찬사업이 시작되었다. 『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치적을 모아 후세의 왕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김교헌은 찬집위원과 선사위원(繕寫委員)과 감인위원(監印委員) 등으로 『국조보감』편찬사업의 전 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는 『국조보감』편찬사업의 과정에서 규장각부제학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김교헌은 조선왕조가 망한 뒤에도 여전히 과거의 문물과 역사를 정리하는 일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그는 1910년에는 최남선(崔南善)이 주관하던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에 참여하여 고전간행사업을 뒷받침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 위원으로 위촉되어 『일성록(日省錄)』을 보충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도 그를 여전히 성실하고 신중한 문신으로 여겼던 것 같다.

6 대종교에 입교하다

김교헌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직전인 1910년 1월 15일에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입교하자마자 1대 교주인 나철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그는 나철보다 나이가 다섯 살 아래였지만 관직에 진출한 것은 다섯 해 빨랐다. 그는 대종교에 입교한 다음해인 1911년 지교(知敎)라는 교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중책을 연달아 맡았다. 대종교는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후 교단의 중심을 점차 만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지만, 그는 그 뒤로도 상당 기간 서울에 남아 남도본사를 책임졌다.

1916년 나철이 일제의 대종교탄압에 피하기 위해 구월산에서 자결하자 김교헌은 나철의 유언에 따라 2대 교주가 되었다. 나철이 조선총독부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그에게 교주 자리를 물려준 것은 일제의 예봉을 피해 대종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이었다. 그는 나철이 순교한 다음해인 1917년 3월 대종교 총본사가 위치한 만주 화룡현으로 망명하였다.

김교헌은 망명할 때 7대조로부터 물려받은 수송동 44번지에 위치한 340칸 짜리 대저택을 처분하였다. 그 저택은 보성학교를 거쳐 불교여자청년회가 세운 명성여자실업학원이 인수하여 학교로 사용하였다. 현재 그의 저택 자리에는 조계사가 들어서 있다.

그는 망명한 후 교단 정비와 교세 확장에 주력하였다. 교단 하부조직을 확대하고 민족학교도 설립하여 대종교의 교세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또한 그는 『신단민사(神壇民史)』와 『신단실기(神壇實記)』를 짓는 것을 통해 대종교의 교리와 대종교의 역사를 체계화하는데도 힘썼다. 이를 통해 대종교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7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하여 민족 고유의 한얼님(하느님)을 섬기는 민족 종교이다. 따라서 대종교도들은 민족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독립운동에 많이 참여하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대종교에 관여하고 있었다. 대종교는 1910년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따라서 나철에 이어 대종교를 이끌고 있던 김교헌도 독립운동의 한 가운데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교헌의 이름이 독립운동사의 전면에 등장한 첫 번째 사건은 대한독립선언서의 선포이다. 이 선언서는 1919년 2월 김교헌 등 39명의 명의로 만주 길림성에서 발표되었다. 이 선언서에 서명한 39명 가운데 안창호(安昌浩)와 이승만(李承晩)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대종교도들이었다. 발표 장소도 대종교 총본사인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의 교주인 그가 이 선언서의 발표를 주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김교헌은 1919년 12월 대종교 교인들로 하여금 무장단체인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11년 대종교인들이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에서 비롯되었다. 1919년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시킨 후 같은 해 10월 군정부로 개편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을 받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김교헌은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무차별 학살로 말미암아 흩어졌던 교도들을 모아서 교단을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대종교 총본사를 영안현 영고탑으로 옮겨 교세를 회복하는데 힘썼다. 그 결과 1922년부터 1923년까지 46개소의 시교당(施敎堂)을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역경을 치르는 과정에서 병을 얻어 1923년 11월 18일 대종교 총본사 수도실에서 윤세복(尹世復)에게 교주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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