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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

38선을 베고 쓰러진 백범 김구

1876년(고종13) ~ 1949년

김구 대표 이미지

경교장 응접실의 김구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와 스승의 격려 속에 성장하였다. 하지만 과거 낙방, 동학에서의 패배 등 실패의 연속이었다. 김구는 이러한 과정에서 동학, 유교, 불교, 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을 섭렵하였다. 새로운 사상을 접해도 이전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김구가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통일에 저해가 되는 요소들을 척결하는데, 생을 바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2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하였다

백범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양에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았던 김구의 집안은 1651년 ‘김자점(金自點)의 옥’으로 멸문지화를 만나자, 황해도 해주로 피신하여 상민으로 행세하였다.

12살에 집안의 내력을 알게 된 김구는 양반이 되기로 하였다. 1892년에 응시한 과거장은 급제를 놓고 부정행위가 극심하였다. 김구는 낙방하였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다, 기약 없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관상공부를 시작하였다.

하루는 관상서에서 익힌대로 자신의 상을 보니, 평생 천하고 가난하고 흉하게 살 팔자였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 이상의 비관에 빠졌다. 그런데 관상서에서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를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하였다.

마음 좋은 사람이 무엇인가 궁리하고 있을 때 동학을 알게 되었다.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 존비귀천을 없앤다. 조선왕국을 끝내고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교리에 감동하여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4년 김구는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접주첩지(接主帖紙)를 받고, 11월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하여 동학군을 정비하고 있을 때, 의려장(義旅長) 안태훈(安泰勳)으로부터 밀사가 왔다. 동학을 토벌하던 안태훈과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고 밀약하였다. 그 후 김구는 동학군 이동엽(李東燁)의 기습으로 근거지를 잃고, 안태훈을 찾아갔다.

1895년 김구는 유학자이며 안태훈의 모사(謀師)인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위정척사(衛正斥邪)론을 배웠다. 고능선은 ‘일반 백성들이 의(義)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가르침은 김구의 삶에서 중요시기마다 판단과 실천의 근본이 되었다.

1896년 3월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鴟河浦)에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변장한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현장에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金昌洙)’라고 방을 붙이고, 집으로 돌아와 기다려서 체포되었다.

김구는 해주에서 조사를 받다가 일본영사관의 요구로 인천감리서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형 집행 직전 고종의 집행 정지령이 내려졌다. 김구는 감옥에서 신서적을 읽으며 서양문물을 배우고,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일 년이 지나도록 후속조치가 없었고, 일본은 사형집행을 요구하였다. 김구는 감옥에서 죽는 것은 일본에게만 좋은 일이라고 판단하여 1898년 3월 탈옥하였다. 탈옥 중 마곡사(麻谷寺)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스님이 되었다가 1년여 만에 환속하였다.

3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김구는 아버지 임종시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割股] 드렸다. 삼년상을 마친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교육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장련(長連)의 광진학교(光進學校)·봉양학교(鳳陽學校), 문화(文化)의 서명의숙(西明義塾), 안악(安岳)의 양산학교(楊山學校)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재령(載寧)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을 겸하였다. 1908년에는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학무총감이 되어 환등기(幻燈機)를 들고 각 군을 순회하며,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외치며,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격려하였다.

1905년 11월 김구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을사조약(乙巳條約) 파기 상소운동에 참여하면서,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이 비밀리에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안중근(安重根) 의거와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1911년 1월 안명근(安明根) 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5년형을 받았다. 9월 항소심이 기각된 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1912년 메이지(明治) 천황과 1914년 그 부인이 사망하여 5년으로 감형되었다.

김구는 출옥을 앞두고 걱정이 앞섰다. 먼저 출옥한 동지 중에 변절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구는 감옥을 나가더라도 변치 않겠다는 표시로 이름은 구(九)로 바꾸고, 호는 백범(白凡)으로 새로 지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의 민적(民籍)에서 벗어나고자 함이고, 백범은 ‘우리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1915년 8월 가출옥 후 김구는 안악 안신학교(安新學校) 교사인 아내 최준례(崔遵禮)를 도왔다. 1917년에는 안악 김씨 소유의 신천(信川) 동산평(東山坪) 농장의 농감을 맡아,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면서, 학교를 세워 소작인의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4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문지기

김구는 중국으로 망명할 기회를 엿보다, 1919년 3월 29일 황해도 안악을 출발하여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4월 22일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의장 이동녕(李東寧)의 추천으로 내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8월에는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하였으나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경무국의 임무는 일제의 정탐활동을 막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며, 일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5년간의 경무국장 재임기간에 신문관, 검사, 판사의 역할 뿐만 아니라 밀정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1920년 초부터 임시정부의 비밀조직인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 등이 일제에 발각되기 시작하였고, 독립군은 봉오동·청산리전투 승리 후에 무자비한 일제의 추적으로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다양한 세력들이 갈등하면서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옹호파와 개혁하자는 개조파, 해체한 뒤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가 서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6월 7일 결렬되었다. 내무총장 김구는 6월 6일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는 ‘내무부령 제1호’를 발표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각지 대표들과 독립군 세력이 이탈하면서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해졌다. 임시의정원은 분열에 대한 책임을 물어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탄핵하였다.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은식(朴殷植)은 대통령제의 폐단을 막기 위해 지도체제를 국무령제로 개편하였다.

하지만 국무령으로 선임된 사람들은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거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 1926년 12월 이동녕의 추천으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1927년 3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5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1931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만주사변으로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면서, 한인과 중국인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었다.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워졌다. 임시정부는 타개책으로 의열투쟁을 결정하였다. 전권을 위임받은 김구는 1931년 10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로 임시정부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과의 갈등을 잠재우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끌어냈다.

하지만 윤봉길 의거로 안창호가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체포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임시정부는 13년간 활동했던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하이옌(海鹽), 전장(鎭江), 난징(南京)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김구는 난징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뤄양(洛陽)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학교의 운영을 위해 만주에서 이청천(李靑天), 이범석(李範奭) 등이 합류하였다. 하지만 한인특별반이 일제에게 탐지되면서 1935년 4월, 1기생 62명을 배출시킨 뒤 폐교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구는 임시정부와 대가족 100여명을 이끌고,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을 거쳐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重慶)에 정착하였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27년간의 활동 중 가장 강력한 조직과 체제를 갖추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고, 10월에는 집단지도체제였던 국무위원제를 일인 지도체제인 주석제로 개편하면서, 김구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에는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하여 광복 후의 자주독립국가 재건 계획을 밝혔다. 12월 8일 일제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리해 승전국으로서 독립을 획득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광복군에 편입되고, 10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등 좌파 세력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 뒤 중국 옌안(延安)의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과 국내의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그리고 만주·연해주의 무장독립운동 세력과도 연계하여 통일전선을 추진하던 중 일제가 항복하였다.

1943년 3월 임시정부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영국 외무장관 이든(Anthony Eden)과 전후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국을 국제공동관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1943년 7월 김구는 카이로회담에 참석하게 될 장개석을 조소앙(趙素昻), 김규식(金奎植), 이청천(李靑天),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11월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개석은 루스벨트, 처칠(Winston S. Churchill)과 협의하여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조선이 자유 독립할 것을 결의한다’는 합의를 끌어내, 한국이 유일하게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았다.

1945년 4월, 한국광복군은 미국전략첩보국(OSS)과 합작으로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을 추진하였고, 시안(西安)과 리황(立煌)에서 훈련을 받았다. 김구는 8월 7일 훈련을 마친 광복군을 점검하기 위해 시안을 방문하였다가, 8월 10일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6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곧바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미군정이 개인자격으로의 입국을 강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김구는 일부 임시정부 요인들과 1945년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통일 임시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를 기한으로 미·영·중·소 4개국이 신탁통치를 한다고 결의하였다.

12월 28일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국은 반탁과 찬탁으로 나뉘어 소용돌이쳤다. 임시정부는 즉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이어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반탁투쟁을 주도하였다.

1946년 3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할 대상의 범위를 놓고, 미·소는 자신들을 추종하는 세력을 협의 대상으로 하기 위해 대립하다가 5월 휴회하였다.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7월 여운형(呂運亨)과 김규식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1947년 5월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협의대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0월 결렬되었다. 이에 한반도 문제는 11월 UN에 상정되었고, UN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절하였다.

한반도 문제가 분단으로 치닫자, 김구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며 행동에 나섰다. 1948년 2월 16일 김구는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남북지도자회의를 제안하는 서신을 김일성(金日成)과 김두봉(金枓奉)에게 보냈다.

2월 27일 UN 소총회는 한반도에서 가능한 지역의 선거를 채택하였다. 이에 김구는 김규식·김창숙(金昌淑)·홍명희(洪命熹) 등과 ‘7거두 성명’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은 ‘미·소전쟁의 전초전’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4월 19일 김구는 북행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21일 성명에서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라며 분단이 가져올 비극을 예견하였다. 5월 5일 귀경한 김구·김규식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이고, 최후의 성공은 단결에 있다’고 남북통일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우리나라는 분단되었다. 1948년 9월 대한민국 국회는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제정하였지만,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에 의해 반민특위가 습격당하였다. 그리고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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