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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金奎植]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하다

1881년(고종 18) ~ 1950년

김규식 대표 이미지

김규식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 개요

김규식(金奎植)은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외교뿐만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위해 온몸을 바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다. 그의 독립운동과 정치적 역정은 민족의 통합을 지향하였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에도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2 그의 아버지 김용원

김규식은 1881년(고종 18) 1월 27일 동래에서 김지성(金智性)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김용원(金鏞元)이었는데 1885년(고종 22)에 김지성으로 개명하였다. 김용원은 중인 가문 출신이었다. 김용원의 형제들은 대부분 의과(醫科)나 음양과(陰陽科)에 급제하였다. 김용원 본인도 도화서 화원 출신이므로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용원은 철종의 어진을 그리는 데에도 참여할 정도로 출중한 화원(畵員)이었다. 또 그는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에 포함되어 국제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 사절단의 수행 화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뿐 아니라 당시 신식 함선과 병기와 총포 등을 도입하기 위한 타진을 하는 임무까지 맡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사진 기술을 배워와 국내에서 사진국을 차린 바 있으며 유리 제조 기술을 도입하려고 추진하기도 하였다.

김용원은 이러한 측면에서 개화파라고도 할 수 있지만 김옥균 일파와 정치적으로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는 1884년(고종 21) 11월 초 블라디보스톡에 건너가 현지의 러시아 관리와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는 외교 교섭을 시도한 바 있다. 당시 고종은 중국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인다고 하는 이른바 한러밀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가 블라디보스톡에 다녀온 것도 이러한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러밀약설이 알려지자 중국은 고종에게 압력을 가했고 그는 부득이 유배를 가야만 하였다. 1885년(고종 22) 시작된 그의 유배생활은 1891년에 풀렸지만 병고에 시달리다가 이듬해인 1892년(고종 29) 고향인 홍천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3 천애 고아 김규식, 미국유학생이 되다

김규식은 1881년(고종 18)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용원이 경상좌도 수군우후로 부임한지 1년 뒤였다. 그가 다섯 살 되던 1885년(고종 22)은 그야말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는 해였다. 그의 아버지는 바로 그해 유배의 길을 떠났으며 그의 어머니도 연이어 사망하여 그는 졸지에 천애 고아의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김규식은 이듬해인 1886년(고종 23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에게 입양되어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이후 일종의 고아학교인 민로아학당(후에 경신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1897년 미국으로 유학의 길에 올라 1903년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로노크대학(Roanoke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다.

김규식은 1904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역할을 하는 한편 YMCA 학생부 간사와 경신학교 학감 등의 직책을 맡아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1908년 양기탁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다가 횡령혐의를 뒤집어쓰고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영국인 변호사 크로스(Crosse)의 증인 심문 당시 통역을 맡아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하였다. 한편 그는 1910년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 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노회 서기를 맡고, 1912년에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등 기독교계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4 망명의 길을 떠나다

김규식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가 국내의 안정된 기반을 박차고 망명한 이유는 1910년 이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신해혁명의 주역들과 교유하는 한편 중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자필이력서에 따르면 김규식은 1914년 가을 유동열, 이태준 등과 함께 독립군 또는 게릴라 부대의 미래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초보적인 군사학교를 운영할 목적으로 외몽골 우르가(庫倫)에 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계획은 재정 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성사되지는 못했고 그는 화북과 몽골지방에서 상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김규식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국제 정세가 크게 바뀌기 시작하자 다시금 상해로 돌아왔다. 그는 상해에서 신규식을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에 가입하는 한편 여운형, 장덕수, 서병호 등 청년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에도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의 전선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5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독립을 외치다

1918년 1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여운형을 비롯한 신한청년당 인사들은 크레인을 면담한 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규식은 이에 따라 1919년 2월 1일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파리로 출발하였으며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하여 한국공보국을 설치하였다.

그 사이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외무총감 겸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위원으로 임명하는 신임장을 보내왔다. 이에 따라 한국공보국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하였다. 부위원장은 이관용이 맡았으며 서기장에는 미군 지원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바 있는 황기환을 임명하였다. 한편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에서도 대표 위임장과 함께 경비 3,500달러를 보내왔다.

김규식은 20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청원서를 작성하였다. 청원서에는 신한청년당과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요한 김규식이 한국 전 국민 이름으로 서명한다고 적어 넣었다. 그는 이 청원서를 5월 1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말미암아 한국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되지 못하였다.

그는 약 4개월간의 외교활동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여의치 못하자 1920년 10월 다시 미국을 떠나 이듬해 1월 중국 상해로 복귀하였다.

6 극동피압박민족대회와 국민대표대회에 참가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제3세계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이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서방 열강의 봉쇄를 뚫기 위한 방편이었다. 소련은 이러한 정책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1922년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에 대한 외교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김규식은 여운형 등과 함께 이 회의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한국대표단이 1921년 11월 시베리아에 위치한 이르쿠츠크에 집결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고려공산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단지 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정식 당원으로 입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대회에서 조선대표단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연설을 하였으며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그의 정치노선에 진보적 색채가 진해지기 시작하였다고 평가된다.

그의 달라진 모습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대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놓고 현행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입장(개조파)과 아예 백지상태에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창조파)으로 나뉘어졌는데 그는 창조파에 속했다. 국민대표대회가 결렬되자 창조파들은 연해주로 건너가서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그는 새 임시정부의 외무위원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소련 당국이 새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퇴거를 요구하는 바람에 새 임시정부는 해체되었고 창조파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창조파에 속했던 김규식도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후 상해의 복단대학과 동방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였으며 1927년에는 천진의 북양대학의 교수를 맡는 등 학자로서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이 무렵 『엘리자베드시대의 연극입문』과 『실용영문작법』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7 독립운동 진영의 단합을 위하여

1930년대에 들어서 일본이 대륙 침략에 나서면서 정세가 엄중하게 바뀌자 김규식은 다시 독립운동의 일선에 복귀하였다. 당시 그의 역할은 뿔뿔이 흩어진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이었다. 그는 1932년 11월 상해에서 한국광복동지회와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 5개 단체를 모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또 1935년에는 앞의 통일동맹이 연락기구에 그친 것을 반성하면서 강력한 단일한 민족대당를 결성하기 위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민족혁명당에는 대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5개 정당이 참여하였다. 그는 새로 만들어진 민족혁명당의 주석에 취임하였다. 민족혁명당의 실질적 지도자는 김원봉이었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대표한 인물은 김규식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김규식이 주석으로 있던 민족혁명당은 1941년에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선언하였으며 이듬해인 1942년에 그는 민족혁명당을 대표하여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4월에 임시정부의 4차 개헌에 따라 주석과 부주석제가 실시되면서 그는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당시 주석은 김구였다.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와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이 손을 잡고 임시정부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8 민족의 통합을 위하여

김규식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해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처음에는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극한적인 반탁운동을 벌이고 있던 김구와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탁통치에는 여전히 반대하였지만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의 수립이 급선무라고 하면서 이를 실천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후 그는 더 나아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46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도출해 내는데 성공하면서 당시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 결과 1946년 12월 미군정의 입법기관이었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에 선임될 수 있었다.

하지만 좌우합작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곧바로 난관에 봉착하였다. 전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협력에서 대립으로 급격히 바뀌면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양국은 극한적으로 대립하면서 남북한에 각기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김규식은 이러한 정세변화에 위기의식을 느껴 입법의원 의장직을 사퇴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48년 2월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제안하였으며 4월 21일에는 협상을 위해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4자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한 그의 납북협상 노력은 끝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는 5월 10일에 실시된 단독선거에 반대하지도 않지만 참가하지도 않겠다는 성명을 내고 정계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그가 우려했던 대로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그도 이 전쟁의 와중에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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