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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金東三]

서간도의 독립운동을 지탱한 큰 기둥

1878년(고종 15) ~ 1937년

김동삼 대표 이미지

김동삼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김동삼(金東三)은 일제 강점기 서간도에서 활동한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심 없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 진영 안에 대립과 갈등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부름이 오면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수습에 앞장섰다.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인물이었던 것이다.

2 보수적인 고장에서 먼저 깨어나다

김동삼은 1878년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일송(一松)이었다. 훗날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동삼(東三)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가 태어난 천전리는 흔히 내앞마을로 불리는데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후손이 모여 사는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그는 어려서 김주병(金周秉)에게 배웠는데 그는 서산 김흥락(金興洛)의 학맥을 이은 인물이었다.

이처럼 김동삼은 보수적인 고장에서 태어나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 신학문을 받아들이는 등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그가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고향 선배인 유인식의 영향이 컸다. 유인식은 1865년생으로 김동삼에게는 12살 연상이었는데 을미의병 당시 이상룡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바 있지만 러일전쟁 이후에는 상경하여 신채호 등과 교유하면서 계몽주의로 전향하였다. 이상룡도 유인식과 마찬가지로 생각을 바꾸었다.

이렇게 안동 지방에는 이상룡, 유인식, 김동삼 등 계몽주의로 전향한 일군의 지식인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힘을 합쳐 안동 지방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망 이후에는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 세 사람 가운데 이상룡이 1858년생으로 나이가 가장 많고 유인식은 그로부터 7년 연하이며 김동삼은 유인식보다 12년 연하였다. 1910년 당시 이상룡은 52세이고 유인식은 45세이며 김동삼은 32세였다. 앞의 두 사람이 중장년이었다고 한다면 김동삼은 청년이었던 셈이다. 이들을 혁신유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청년 김동삼은 이들과 함께 역사적 격랑을 헤쳐 나가기 시작하였다.

3 협동학교와 대동청년단

김동삼을 비롯한 혁신유림이 안동 지방에서 추진한 첫 번째 사업은 협동학교의 설립이었다. 협동학교는 1907년 이상룡의 처남이자 김동삼의 친척인 김대락의 사랑채를 임시 교사로 하여 설립되었다. 의성 김씨의 종손인 김병식이 교장을 맡았으며 김동삼은 처음에는 직접 교사를 맡다가 외지에서 교사를 초빙하면서부터 교감을 맡기 시작하였다.

외지에서 초빙된 교사인 김기수(金箕壽)와 이관직(李觀稙) 가운데 김기수는 서울에서 보성학교를 마친 사람이고 이관직은 상동청년학원 계열의 사람이었다. 협동학교는 이렇게 서울에서 교사를 초빙한 만큼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던 계몽운동과도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에도 이 학교와 관련된 기사가 자주 실리곤 하였다.

안동 지방은 워낙 보수적인 문화가 팽배했던 곳인 만큼 혁신유림들의 활동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다. 협동학교의 교사나 학생들 가운데는 개별적으로 가족에게 절연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10년 7월 18일에는 의병의 습격으로 협동학교의 교사들이 피살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안동의 혁신유림이 서울의 계몽운동과 어떻게 연계를 갖게 되었는지는 대동청년단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대동청년단은 보성학교 교장 박중화를 비롯한 영남지역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회원으로는 남형우, 안희제, 서상일, 윤세복, 신백우, 신채호 등이 있었는데 청년 김동삼도 이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의 회원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인물로는 신백우와 신채호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영남이 아니라 충청도 청원 출신의 인물이었다. 이 두 사람은 충청도 출신으로는 극히 드물게도 당색이 남인이었다. 따라서 영남 사람들과 상당한 정서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대동청년단에도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안동의 혁신유림이 훗날신민회 회원들과 보조를 맞추어 망명을 실행하게된 데에는 대동청년단이 징검다리 역할을 했을 것이다.

4 망명과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노력

신민회는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망명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주진수를 통해 안동의 이상룡에게 전달되었다. 이상룡은 처남과 상의하여 망명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를 실행하는 역할을 김동삼이 맡았다. 그는 집안 아우인 김만식을 미리 만주로 파견하여 기초 조사를 마친 뒤 1911년 1월 집단적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의성김씨와 고성이씨가 주축이 되어 수 백 명의 식구들이 가산을 정리하여 길을 나섰다. 이들은 먼 길을 거쳐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하여 이회영 이동녕 일가와 합류하였다.

김동삼을 비롯한 망명자들은 가장 먼저 교민들의 생활공동체인 경학사를 조직하였다. 이는 교민사회를 근거로 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이상룡이 사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내무부장에 이회영, 재무부장에 이동녕, 교무부장에 유인식이 선출되었으며 아직 젊은 김동삼은 조직과 선전의 임무를 온몸으로 실행하였다. 경학사는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도 설치하였다.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곧바로 이어진 흉작 때문에 경학사는 부득이 해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913년에 경학사를 대신하여 부민단을 새로 조직하였는데 김동삼은 여기서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러한 일 가운데 하나가 1914년에 백서농장을 개척한 것이었다. 백두산 서쪽에 있다고 해서 백서농장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말이 농장이지 사실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병영이었다. 김동삼은 신흥강습소 졸업생 300여명을 이끌고 유하현 밀림지대에 들어가 이 농장을 개척하였다.

5 3·1 운동의 열기를 이어 받아 무장투쟁을 전개하다

만주 지역에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요동쳤다. 그 결과 1919년 2월에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김좌진, 유동열, 서일 등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이 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김동삼은 이상룡과 함께 이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기 위해 서간도 일대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김동삼은 이렇게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동시에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작업에 곧바로 착수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교민 자치기관부터 개편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이상룡과 이탁 등 남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부민단을 확대 개편하여 한족회를 발족하였다. 한족회는 교민들을 독립운동의 전선에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기관지로 《한족신문》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자치기관과 함께 군사기관도 정비하였다. 김동삼은 기존 백서농장의 군영을 바탕으로 서로군정서를 세우고 참모장을 맡았다. 당초에는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려 하였지만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정서(軍政署)로 명칭을 바꾸어 임시정부의 하부기관으로 편입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일본 육사출신의 지청천을 맞이하여 신흥무관학교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는 1920년에 접어들면서 지청천과 함께 소속 부대를 안도현 밀림 속으로 옮겨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하는 등 독립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20년 11월 일제의 간도 출병으로 말미암아 주로 북간도 일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가 벌어지자 김동삼은 300여명의 서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서로군정서의 병력은 청산리 전투가 끝나고 난 뒤 밀산으로 이동하여 북간도의 독립군들과 합세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김동삼은 대한독립군단이 소련 영토인 자유시로 이동할 때 동행하지 않고 서간도로 돌아와 독립전선을 재정비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그 덕택에 자유시 참변을 피할 수 있었다.

6 서간도 무장단체들을 묶어세우다

1920년대 만주지역에는 수많은 국외무장투쟁을 위한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모든 단체들이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난립된 상태에서는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난립한 무장투쟁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였다. 이러한 임무를 맡기에 제격인 사람이 바로 김동삼이었다.

김동삼은 1922년 6월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한 남만통일회를 주도하였고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 통군부가 만들어졌다. 통군부는 그 뒤 대한통의부로 확대 개편되면서 서간도의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통군부 교육부장이던 김동삼은 통의부의 총장을 맡게 되었다.

7 국민대표대회의 의장을 맡다

아울러 김동삼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내부적 통합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될 때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준비 작업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곧바로 서간도로 복귀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러 가지 내부적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그 결과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국민대표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당시 김동삼은 의장에 선임되어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부의장은 안창호와 윤해가 맡았다.

당시 이 대회의 참석자들은 현 임시정부의 법통을 유지한 채 개혁하자는 입장(개조파)과 현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새로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창조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부의장을 맡은 안창호는 개조파였으며 윤해는 창조파였다. 당시 김동삼을 비롯한 서로군정서 계열의 인사들은 대체로 개조파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이는 과거 신민회의 인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동삼은 내심 개조파의 의견에 기울고 있었지만 의장으로서 양파 사이에서 중재를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국민대표대회는 결국 합의에 도달하는데 실패하였고 그는 서간도에서 소환됐다는 이유로 의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창조파가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남으로써 국민대표대회는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8 독립운동의 통합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

그는 국민대표 대회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도 독립운동 통합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20년 후반에는 민족유일당 결성이라는 방식으로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이 시도되었다. 김동삼도 만주지역에서 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라고 하는 3개의 운동단체가 정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다가 사회주의 세력이 대두하면서 좌우합작문제도 새롭게 제기되고 있었다. 그는 민족유일당재만촉진회 등을 통해 유일당운동을 전개했지만 불행히도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에는 기어이 만주를 침공하고야 말았다. 김동삼은 이에 맞서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다가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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