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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金枓奉]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넘나들면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1889년(고종 26) ~ 미상

김두봉 대표 이미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사료편찬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김두봉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남북한이 나뉘어 살면서 말도 상당히 달라졌다. 하지만 나뉘어 산 시간에 비해서는 차이보다 동질성이 더 크다. 문법의 경우도 몇 가지 지엽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남북한이 대체로 동일하다. 남북한의 언어적 동질성이 유지된 데에는 국어학자 김두봉의 역할이 컸다. 그는 일제강점기 국어 연구에 그치지 않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넘나드는 폭넓은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해방 후 북한에 자리 잡았다. 그는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로서 최현배(崔鉉培)와는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해방 후 각기 남북한의 문법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한의 언어적 동질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쟁쟁했던 독립운동가 집안

김두봉은 1889년 3월 17일 경상도 기장현(현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김해이며 히못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한자로는 백연(白淵) 또는 백련(帛連)으로 적었다. 김두봉 자신도 훗날 독립운동가가 되었지만 그의 집안에서도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후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약수(金若水)는 본명이 김두전(金枓佺)으로 그와는 사촌간이었다. 일제강점기 기장 지역에서 3·1 운동을 벌였으며 이후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을 전개한 김도엽(金度燁)·김규엽(金圭燁) 형제와 1930년대 부산지역에서 노동운동과 반제운동을 벌인 김시엽(金時燁)·김주엽(金周燁) 형제도 그의 5촌 조카였다. 동래소년동맹에서 활동한 김응엽(金應燁)도 그의 일가였다.

한편 의열단(義烈團) 단장을 지낸 김원봉(金元鳳)은 그에게는 조카사위였으며, 그의 친동생은 『동아일보(東亞日報)』 사회부 기자로 일제의 감시 대상 인물이었던 김두백(金枓白)이었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쟁쟁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3 주시경의 으뜸가는 제자

김두봉은 어려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아버지 김돈홍에게 한문을 배웠다. 그는 1908년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 설립한 기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 학교를 1회로 졸업한 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이 무렵 주시경을 처음 만났다.

김두봉은 주시경이 운영하던 국어강습소에 들어가 국어 연구를 시작하였다. 당시 주시경은 배재학당과 보성학교(普成學校) 등 여러 학교의 강사를 맡아 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국어강습소는 운영하고 있었다. 국어강습소는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부득이 조선어강습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고 있었다. 김두봉은 1910년 조선어강습원에 입학하여 1913년 3월 이 강습원의 고등과를 마쳤다. 그는 이후 조선이강습원의 강사를 맡았다. 조선어강습원은 그 이외에도 이규영(李奎榮)·이병기(李秉岐)·신명균(申明均)·최현배·정열모(鄭烈模) 등 여러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사전편찬 사업을 도왔다. 주시경은 제자들과 함께 최남선(崔南善)이 세운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를 통해서 『말모이』란 제목으로 우리말사전을 편찬을 추진하였다. 『말모이』편찬은 주시경이 1914년 7월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중단되었지만, 김두봉은 주시경의 뜻을 이어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사전 원고를 계속 작성하였다. 김두봉은 사전 편찬과는 별도로 그 바탕이 되는 문법책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16년 4월 『조선말본』이 발행되었다. 이 책은 주시경의 『국어문법』에 바탕을 두고 더욱 확충한 것이었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으뜸가는 제자였다.

4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김두봉은 1911년 9월 무렵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당시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대종교는 단군(檀君)을 교조(敎祖)로 하는 민족 종교로서 1910년대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당시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대종교에 입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16년 대종교의 1대 교주인 나철(羅喆, 나인영)이 자결을 결심하고 구월산 삼성사로 떠날 때 전송한 교인 가운데 김두봉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상해에 망명한 이후에도 대종교와 관련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박은식(朴殷植)·조완구(趙琬九)·신규식(申圭植)·박찬익(朴贊翊) 등과 함께 대종교 서이도본사의 핵심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김두봉은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만들어진 비밀단체로 초대 단장은 남형우(南亨祐)이고 김동삼(金東三)·박중화(朴重華)·신백우(申伯雨)·신채호(申采浩) 등이 참가하였다. 이 단체의 구성원 가운데는 경상도 출신 신민회(新民會) 계열 인사들이 많았다. 남형우·이우식(李祐植)·윤병호(尹炳浩) 등 훗날 조선어학회와 관계한 사람도 많았다. 경상도 기장현 출신인 김두봉이 이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두봉은 일본에 탈취당한 경제권을 되찾기 위해 1915년 조직된 항일운동단체인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도 참여하였다. 조선산직장려계에는 김두봉뿐 아니라 총무 윤창식(尹昶植)과 평의원 남형우 등 조선어강습원 관계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5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다

주시경의 뜻을 이어받아 강습소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던 김두봉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즉각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한 달 동안 피신하다가 그해 4월 신의주에서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중국 단동에서 망명객들의 안내역을 맡고 있던 장건상(張建相)의 도움을 받았다. 이 무렵 그의 조카사위인 김원봉도 장건상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김두봉은 상해에 도착해서 임시정부 산하 임시사료편찬위원회의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 이 사료집은 일제의 침략 과정과 3·1 운동의 내막을 담은 것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가장 시급한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선출되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해임되었다. 대신 당시 임시정부의 방침에 비판적이었던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신대한(新大韓)』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김두봉은 이렇게 임시정부에서는 밀려났지만 상해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상해에서 그의 삶에 있어서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국어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1922년 『깁더조선말본』을 펴낼 수 있었다. 깁더란 깁고 더했다는 뜻으로 1916년 국내에서 펴낸 『조선말본』을 수정·보완한 것이었다. 그는 1924년 상하이교민단 의사원 선거에 당선되어 다시금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김두봉은 1924년 상하이에 거주하는 교민의 자녀를 위한 인성학교의 교사가 되어 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1928년에는 상하이교민단 학무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인성학교(仁成學校)의 4대 교장을 맡아 학교의 살림을 떠맡았다. 그는 이후 1932년까지 인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다.

6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이유

김두봉은 1920년 상해에서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결성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다. 이 정당은 상해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동휘는 1917년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결성한 바 있다.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어 상해로 건너오면서 상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하여 이 정당을 조직하였다.

김두봉이 가입한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역사적 내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1910년대 초 주시경을 지도자로 결성된 비밀결사 배달말글몯움에 이르게 된다. 배달말글몯움 구성원들이 주축이 되어 1915년 신아동맹당(新亞同盟團) 한국 지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920년 국내에서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을 결성하였다. 사회혁명당 구성원들은 연해주의 한인사회당과 제휴하여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만들었다. 이렇게 배달말글몯움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역사적 뿌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만큼 주시경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김두봉이 이 정당에 가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비록 겉으로는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했지만, 역사적 내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김두봉도 1920년대 초 겉으로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였지만, 그의 사상 전체를 살펴볼 때 그는 여전히 민족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7 독립운동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

김두봉은 1920년대 후반 국내외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으며 중국에서도 이것에 자극을 받아 민족유일당운동이 벌어졌다. 중국 북경에서는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가 결성되었으며 이듬해인 1927년 3월 상해에서도 촉성회가 조직되었다. 김두봉은 상해촉성회의 집행위원이었다. 상해에 이어 광동·무한·남경 등지에도 촉성회가 만들어졌으며 같은 해 11월 중국 관내의 여러 촉성회들의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그는 상해촉성회를 대표하여 연합회의 상집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7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국공합작이 파탄나면서 중국 관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좌우합작 운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좌파와 우파는 결별하게 되었으며 1930년 1월 우파들만이 결집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김두봉은 이때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비서장이 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될 무렵 그는 좌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거치면서 좌파에서 우파로 바뀌었다.

김두봉은 이후 한국독립당을 기반으로 우파 진영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이하 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통일동맹에는 한국독립당을 비롯하여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열단·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등의 5개 정당이 참가하였다. 그는 통일동맹의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통일동맹은 1935년 6월 3차 대회를 통해 발전적으로 해소되었고, 새롭게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조직되었다. 그는 새로 만들어진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에 선출되었다.

8 태항산의 호랑이

1937년 7월 일어난 중일전쟁은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당장 일본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피신을 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은 장기적으로 일본과 맞서 본격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간 것처럼 김두봉이 몸담고 있던 민족혁명당도 중경으로 옮겨갔다. 그도 민족혁명당 구성원들과 함께 중경으로 길을 떠났다. 하지만 민족혁명당의 소장파들과 그들의 군대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주력은 중경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화북(華北)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화북에는 민족혁명당 소장파뿐 아니라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들은 1941년 1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를 결성하였으며, 이 단체는 1942년 7월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으로 개칭하였다. 김두봉은 바로 이 무렵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화북에 도착하자마자 조선독립동맹의 주석(主席)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김두봉은 화북으로 넘어와 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통합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즉 그는 조선독립동맹에서 민족주의자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김두봉은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서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본군과 싸웠다.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확대 개편하여 일본군에 맞서 이른바 반소탕전(反掃蕩戰)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군은 상당한 인적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였다. 한편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은 중경의 임시정부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했다. 독립동맹의 간부인 김학무(金學武)가 중경과 연안을 오가면서 임시정부의 김구(金九)와 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 사이의 서신 연락을 담당하였다. 즉 김두봉은 조선독립동맹 내에서 민족주의자를 대표하였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와의 가교 역할까지 맡았던 것이다.

9 해방 이후 북한으로 귀환하다

김두봉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귀환하였다. 그가 이끌던 조선독립동맹은 1946년 2월 26일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신민당이라는 명칭은 당시 중국 공산당이 채택하고 있던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에서 따온 것이었다. 신민당은 1946년 8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쳐서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다. 그는 북조선노동당의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국가수반을 맡았다. 이렇게 그는 해방후 북한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이는 명목상 지위였을 뿐 실권을 갖지는 못했다.

김두봉은 1948년 봄 남북한의 분단을 막기 위해 추진된 남북협상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김구와 김규식(金奎植)이 연명(連名)으로 북측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면서 남북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시 김구는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과거 임시정부 시절 중경과 연안에서 연락을 주고 받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남북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안하였다. 김두봉과 김일성(金日成)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남북협상은 실질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

김두봉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학자였다. 해방 후 북한에서도 학자로서 나름대로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46년 10월 김일성대학이 창설될 때 초대 총장을 맡았다. 이후 이 대학이 개설한 조선어문학 강좌는 물론 이 대학에 설치된 조선어문연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김두봉이 일제강점기에 펴낸 『조선말본』과 『깁더조선말본』은 북한의 언어정책에 강령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같은 경상도 출신 국어학자인 이극로(李克魯)가 월북한 것도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북한의 국어 정책은 김두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북한의 유일지도체제 구축 과정에서 숙청되었다. 1961년 전후 지방의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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