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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金炳魯]

법률가로서 독립운동과 새 나라 건설을 뒷받침하다

1887년(고종 24) ~ 1964년

김병로 대표 이미지

김병로

공훈전자사료관(국가보훈처)

1 개요

김병로(金炳魯)는 파란만장한 한국의 근대를 법률가로 살아낸 인물이다. 일찍이 근대 법학을 공부한 조선인 변호사 1세대로서 일제 강점기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였으며 해방된 이후에는 미군정청 사법부장을 거쳐 대한민국의 초대와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의 사법체계가 제 자리를 잡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2 개화와 척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병로는 1887년 12월 15일(음력) 전북 순창 복흥면 하리에서 사간원 정언을 지낸 김상희(金相熙)와 어머니 장흥 고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이고 호는 가인(街人)이다. 그가 성장하던 무렵 조선은 개화와 척사의 물결이 교차하면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도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하였다.

김병로는 그 무렵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어려서 한학을 익혔다. 그는 1902년 14세의 나이에 계화도에 은거하고 있던 간재 전우(田愚)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전우는 적극적인 행동파는 아니었지만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수하던 인물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위정척사파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병로는 위정척사파의 제자로서 생애를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우가 김병로의 지적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1904년 새로 개항한 목포로 건너가 친구들과 함께 일신학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신학문의 선생님을 초빙하여 영어, 일어, 산수 등의 과목을 배웠다. 이 무렵 그는 《황성신문》을 구독하고 『월남망국사』, 『애급망국사』 등의 서적을 읽으면서 당시 세계 정세를 깨우쳐가기 시작하였다.

김병로가 신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성리학을 완전히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다. 1906년 당시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최익현이 이웃 고을인 태인에서 봉기하자 그는 의병들을 모아 순창읍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그는 개화와 척사의 사이에서 크게 요동을 치면서 자신이 살아갈 길을 찾아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3 일본에 건너가 근대적인 법학을 배우다

의병봉기가 실패한 후 김병로는 한말에 승지를 지낸 고정주(高鼎柱)가 담양에 세운 창흥의숙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당시 이 학교에는 고정주의 아들 고광준 이외에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 등이 함께 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일본 유학을 다녀왔을 뿐 아니라 이후로도 평생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되었다.

김병로는 1910년 4월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는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에 청강생으로 등록하고 강의록으로 공부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술국치의 비보가 전해지고 폐결핵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2년 뒤인 191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과에 편입하여 1년 뒤인 1913년 3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후 메이지대학교와 주오대학이 공동 운영하는 고등연구과에서 법학공부를 계속하였다.

김병로는 일본 유학 시절 법학 공부와 함께 학생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는 재동경조선인유학생회의 간사를 맡았으며 이 단체의 기관지인 《학지광》의 편집도 맡았다. 한편송진우, 김성수, 안재홍 등과 금연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무렵에는 이미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뒤였지만 그가 일구어 놓은 유학생 네트워크는 2.8독립선언을 실행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4 인권변호사의 원조였던 김병로

그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일단 경성법학전수학교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1916년 이 학교의 교유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조교수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에도 강사로 출강을 하였으며 사법협회의 기관지인 《법학계》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김병로는 3·1 운동 후에 판사로 특별 임용되어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는 1년 만에 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1920년 12월 24일 정식으로 변호사 등록을 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변호사가 될 무렵 조선에는 독립운동과 사회운동과 관련하여 형사 사건이 쏟아지고 있었다.

김병로는 이들에 대한 법률적 뒷받침을 위해 허헌, 이승우, 김용무, 김태영 등의 변호사들과 함께 형사공동연구회를 만들었다. 이 연구회는 한 사람의 변호사에 대한 보수로 다섯 명의 변호사가 먹고 살면서 독립운동 사건을 무료 변호하자는 취지로 만든 것이었다. 이 연구회 소속 변호사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미리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무료 변론을 할 수 있었다. 이 연구회는 이것뿐 아니라 수감자에 대한 옥바라지를 하고 남겨진 가족들을 돌보는 등 다각도로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그가 직접 변론을 맡았던 사건을 들자면 먼저 상해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사건으로 안창호, 여운형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을 꼽을 수 있다. 이밖에도 김상옥 사건, 6.10만세운동 관련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간도공산당 사건, 제2차 의열단 사건, 고려혁명당 사건, 광주학생 항일운동 사건, 원산총파업 사건, 백두산 화전민 학살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본격적인 형사재판 이외에도 장진댐 부지 강제 수매 사건 등 여러 사회경제적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그 실태를 조사하여 관련 당국에 문제점을 추궁하고 대책을 요구하는 활동도 꾸준히 전개하였다.

5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는 틈틈이 전개한 사회 활동

김병로는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변론 와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 여러 사회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1920년 조선교육협회가 창립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21년에는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사의 법률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그가 동아일보사의 법률고문을 맡음으로써 과거 창흥의숙에서 시작된 인연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그는 1922년 보성전문학교의 상임이사를 맡았다. 이는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뒤 보성전문학교에 출강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이 인연으로 1932년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도록 알선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1923년에 만들어진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도 발기인이 되었으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이렇게 활발한 사회활동을 통해 조선인 사회의 주요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김병로가 일제강점기에 참여한 사회 활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신간회를 들 수 있다. 신간회는 1927년에 창립된 사회단체로서 일부 타협적인 세력들이 추진한 자치론에 대항하기 위해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단체였다. 그는 당초 신간회가 창립할 당시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창립 당시 회장이던 이상재가 작고한 후 조직을 개편할 때 회계 담당으로 간부진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진상조사단을 파견할 때 이를 이끌었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들의 재판도 맡았다. 형사공동연구회 회원이었던 허헌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가 허헌을 뒤이어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 무렵 신간회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집중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신간회 내부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이 해소를 주장하고 나섬에 따라 신간회는 1931년 해체되고 말았다. 그는 불행히도 신간회의 문을 닫는 고약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였다.

신간회가 문을 닫은 뒤 그는 경기도 양주군 창동으로 주거를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양돈과 양계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는 일이 잦아졌던 것도 그가 은둔을 선택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후 해방될 때까지 약 13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창동은 기차를 타면 서울에 다니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아주 완벽한 은둔은 아니었다.

6 해방 직후 제2의 신간회를 꿈꾸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김병로는 은거지를 떠나 정치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그의 이름을 올렸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좌파들이 주도하고 있었던 점도 그가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대신 당시 대표적인 우파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의 결성에 참여함으로써 우파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였다. 여기에는 창흥의숙 때부터 동지인 김성수와 송진우가 한민당 창당을 주도했던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병로는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면서도 좌우합작에는 적극적이었다. 그는 1946년 1월 7일 한민당, 인민당, 국민당, 공산당 등 좌파와 우파를 망라한 4개 정당이 합의하여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할 당시 한민당 대표로 협상과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민당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좌우합작을 주도한 것은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여 제2의 신간회 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병로는 4당코뮤니케가 발표된 이후에도 좌우합작운동을 계속하였지만 이후 여건은 그의 생각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대표적인 좌파정당인 공산당이 이후 좌우합작에 소극적으로 돌아섰으며 이러한 점은 그가 속해 있던 한민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46년 11월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가 제시한 합작 7원칙을 지지하면서 한민당을 탈당하고 대신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세력의 집결체인 민중동맹에 가담하였다. 이후 그는 좌우합작파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였지만 현실정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7 한국 사법부의 기틀을 세우다

김병로는 1946년 7월 12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약 2년 간 미군정청의 사법부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당시 가장 큰 과제였던 일본의 법을 대신할 새로운 법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그는 1947년 6월 미군정청 사법부 안에 법전기초위원회를 발족하여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려 하였지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는 사법부장의 임무를 마치면서 ‘조선법률을 전부 새로 만들려다가 예산부족으로 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는 소감을 남겼다.

김병로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53년에 제2대 대법원장으로 연임되어 195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9년 3개월의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사법부를 지켰다. 당시는 아직 삼권분립의 원칙이 채 정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법부의 독립이 위협받을 위험성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당시 대통령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회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김병로는 대법원장 재임 기간 중에 친일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이 제정되자 국회에서 이 법에 따라 구성된 특별재판부의 부장으로 선출되어 친일청산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는 1958년 법관회의의 대법원장 제청권을 없애려는 정부의 처사를 규탄하고 진보당 사건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관제시위대가 법원을 난입했을 때 이를 맹렬히 규탄하는 등 대법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8 4·19 혁명 이후 정치의 무대에 나서다

김병로는 4·19 혁명 직전 당시 자유당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1959년에 민권수호국민연맹의 고문을 맡았으며 《경향신문》의 강제폐간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에도 이를 규탄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그가 자유당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부가 무너진 후 정치의 무대에 다시금 나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존 정당인 민주당에 입당하는 대신 자유법조단이라는 보수정당을 새로 창당하여 고향인 순창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하지만 이 선거에서 민주당 신파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하는 바람에 정계 진출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다시금 야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김병로는 1963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다시금 정치의 무대에 소환되었다. 당시 야당 세력들은 분열되어 있었으며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야권통합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는 스스로 민정당을 창당하여 야권 통합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여의치 못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는 이것으로 자신에게 부과된 숙제 마친 것인지 1964년 1월 13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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