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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金玉均]

갑신정변의 풍운아, 준비되지 못한 개혁가

1851년(철종 2) ~ 1894년(고종 31)

김옥균 대표 이미지

김옥균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오경석이 얻으려 했던 북촌의 양반 자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세창은 19세기 후반 그의 아버지인 오경석(吳慶錫)이 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얻어 이들을 통해서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는 개화파가 형성된 경위와 관련된 증언인데 오경석은 당시 상당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역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신 양반집 자제들 가운데 똑똑한 사람을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변화를 도모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경석이 얻으려 했던 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바로 김옥균(金玉均)을 들 수 있다.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2 성장과 사상 형성

김옥균은 처음부터 북촌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851년 충청도 공주군(公州郡) 정안면(正安面) 광정리(廣亭里)에서 김병태(金炳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의 일원이기는 하였지만 크게 출세하지 못했고 시골에서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의 나이 6세 때인 1856년 일가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그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김병기는 병자호란 때 절의를 지킨 김상용(金尙容)의 직계 후손으로 여러 지방관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양부를 따라 서울 북촌 화개동(花開洞)으로 옮겨왔는데 현재 정독도서관 자리에 그의 집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하여 북촌 양반집 자제가 되었다.

그는 북촌으로 옮겨오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양반 자제와 사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양부가 1861년 강릉 부사로 임명되는 바람에 그도 강릉으로 따라가야만 했다. 강릉에 가서는 율곡의 사당이 있는 서원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그의 나이 16세가 되는 1866년이 되어서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북촌의 양반 자제들과 본격적인 교유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옥균을 비롯한 북촌의 양반 자제들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오경석과 유홍기(劉鴻基)를 들 수 있다. 오경석은 역관으로서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밝은 인물이었고 유홍기는 의원(醫員)으로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등 신서를 연구한 인물이었다. 그를 비롯한 북촌의 양반자제들 사이에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당시 항간에서는 백의정승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도 김옥균 등 북촌 양반 자제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갑신정변 당시 그의 동지였던 박영효(朴泳孝) 회고에 따르면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자신을 비롯하여 김옥균,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이 평등사상을 배웠다고 하였다. 이렇게 그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모두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강화도조약 전후에는 통상개국론을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3 민씨 척족과의 갈등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제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대외정책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강화도조약의 체결도 그 일환이었으며 1880년대에 들어서면 수신사(修信使), 영선사(領選使),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연이어 파견하는 등 문호개방에 따른 후속조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종이 추진하던 일련의 개화정책을 뒷받침하는 신진정치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신진정치세력 가운데 하나가 김옥균이 이끈 정치그룹이었다. 이 그룹에는 그 이외에 홍영식, 박영효 형제, 서광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개화당 혹은 독립당이라고 불렀다. 이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박규수와 오경석은 이미 사망하였지만 유홍기는 여전히 생존하여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통도사의 승려 이동인(李東仁)도 이들과 협력하고 있었다.

개화당이 형성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대체로 1879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개화당의 활동의 흔적은 1879년 김옥균이 봉원사(奉元寺)에서 이동인을 만나는 것부터 확인된다. 이동인은 개항 직후 개설된 일본 불교 일파인 동본원사 부산별원을 통해 일본 문물을 섭취하고 있던 인물이다. 그는 김옥균과 만난 직후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는데 이를 김옥균이 권유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동인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인 1880년 일본을 방문한 수신사 김홍집을 만나 함께 귀국하였는데 귀국한 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참모관으로 등용되어 조선이 이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펴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김옥균도 1881년 11월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직접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6월까지 머물면서 일본의 실태를 시찰하고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주선으로 일본 정계의 여러 인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의 두 번째 일본행은 1882년에 있었다. 그 해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이를 사과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때 정사를 맡았던 인물이 박영효였고 서광범은 서장관이었으며 김옥균은 공식적인 직위 없이 일종의 고문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이 사절단이 개화당 중심으로 구성된 것은 당시 이들이 일본통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임오군란으로 불거진 한일간의 외교적 갈등을 수습하는 데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김옥균은 일본에서 17만원의 차관을 조달하는 데 성공하여 이 가운데 5만원으로 임오군란의 1차 배상금을 상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옥균은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치도약론(治道略論)」을 발표하여 근대 개혁의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기 시작하는 한편 외무아문 참의로 승진하는 것과 동시에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道島開拓使兼管捕鯨事)를 겸직하는 등 개화 정국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씨 척족의 견제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가 민씨 척족과 충돌한 가장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가 화폐 주조 문제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국가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는 당오전이라고 하는 화폐를 발행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당시 표면상 묄렌도르프가 이 정책을 주관했지만 그 배후에는 민씨 척족이 도사리고 있었다.

김옥균은 당오전 발행이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반대하였다. 당오전은 액면가가 실제 가치보다 훨씬 높은 악화(惡貨)이므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당오전 발행 대신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당면한 재정난을 해결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차관 도입을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차관 도입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를 비롯한 개화당과 민씨 척족 간의 갈등만 심화되고 말았다.

4 갑신정변 일어나다

차관 도입에 실패한 채 일본에서 돌아온 김옥균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그와 개화당은 정치적으로 고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언가 획기적인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정변을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우선 일본으로부터 자객을 불러들여 조정의 중신들을 일시에 암살하는 방안부터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곧 김옥균과 개화당에게 긍정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1884년에 들어서면서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 병력 가운데 1,500명을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해 8월에는 양국 간에 청불전쟁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따라서 김옥균과 개화당은 조선에서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청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본국에서 귀임한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일본공사가 개화당에 접근하여 일본군의 동원 문제까지 타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개화당이 구상한 정변의 규모는 한일 합작의 쿠데타로 확대되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을 틈타 갑신정변이 시작되었다. 개화당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 군대가 폭동을 일으켰다고 국왕을 속이는 방법으로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개화당은 다음날 신정부를 구성하였으며 14개조의 혁신정령(革新政令)도 공포하였다. 하지만 사흘째 되는 12월 6일 오후 3시 청국군이 전면적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 인사들과 함께 인천에서 일본 상선을 얻어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남아있던 홍영식은 피살되었으며 유홍기는 행방을 감추었다.

5 망명객 김옥균

갑신정변 직후 일본은 김옥균 등의 망명을 일단 받아들였다. 그것은 갑신정변이 한일 합작의 쿠데타였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김옥균을 돌려보낼 경우 일본이 이 정변에 관여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김옥균 일행에 대해서도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이제는 이들이 별로 이용 가치가 없어진데다가 앞으로 조선과의 외교적 분쟁의 빌미만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제외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徐載弼) 등은 모두 신변의 불안을 느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조선 정부는 외교 경로를 통해 김옥균의 송환을 요구하는 한편 비밀리에 자객을 보내는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1885년에는 서상우(徐相雨)와 묄렌도르프를 일본으로 보내 그의 송환을 요구했으며 이듬해에는 자객 지운영(池雲英)을 밀파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조선 정부가 이렇게 그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당시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와 고바야시 쿠스오(小林樟雄) 등 일부 일본인들이 김옥균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하자고 주장하는 사건 즉 오사카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옥균은 지운영 사건 직후 이에 대해 해명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김옥균이 양국 간의 마찰의 불씨가 되자 일본 정부는 그를 변방으로 추방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모면하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1886년에는 남쪽 바다 건너 인적이 드문 오가사와라(小笠原)섬으로 추방당했고 1888년에는 다시 북쪽 끝 홋카이도(北海道)에 있는 삿포로(札幌)로 옮겨졌으며 189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도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일본의 냉대에 지쳐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희망을 걸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 과정에서 이홍장의 아들이자 당시 주일청국공사관의 외교관이었던 이경방(李經芳)이 꾸민 유인공작에 말려들게 되었다. 그는 1894년 2월 제 발로 상해로 건너가 그곳의 한 여관방에서 자객 홍종우(洪鍾宇)가 쏜 총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6 그가 죽고 난 뒤

김옥균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본국으로 송환되어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되었다. 하지만 그는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 그것은 청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조선에서는 일본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 개화파 정권이 수립되었고 갑신정변 당시 그의 동지였던 박영효가 이 정권에 참여하여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김옥균이 죽은 후 그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추모 분위기를 틈타 청국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방법으로 청국에 대한 적대감을 자국 국민들 사이에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를 청국과 전쟁을 일으키는 데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김옥균은 죽고 나서야 일본에게는 이용가치가 생겨난 것이다.

김옥균은 해방 후 남북한에서 모두 근대화의 선각자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북쪽에서는 1950년대 중반부터 갑신정변을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개혁운동’이라고 규정하였으며 남쪽에서도 ‘근대화 운동의 용감한 선구자’라고 이해하여 북쪽의 인식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지주제의 철폐가 아닌 개량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개화지상주의에 함몰되어 자주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도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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