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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金佐鎭]

청산리 대첩의 영웅

1889년(고종 26) ~ 1930년

김좌진 대표 이미지

김좌진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가계와 유년시절

김좌진(金佐鎭)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고도면(高道面) 행산리(杏山里)에서 김형규(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아우 김동진(金東鎭)은 1920년대 비밀결사인 주비단(籌備團)과 의용단(義勇團)에 참여한 후 홍성지역 사상단체인 무공회(無空會)에 참여해 사회운동을 전개했고 이후 만주로 망명해 김좌진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었다.

김좌진의 집안은 많은 재산과 노비를 소유한 부호였다. 그러나 그가 3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해 편모슬하에서 성장했고, 13세 되던 해에 형 경진이 김덕규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떠난 후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게 되었다. 그는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말타기․병정놀이를 즐겨했는데 동네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노릇을 하였다. 특히 병정놀이 시에는 대장기에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고 썼다고 한다. 즉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뜻을 유년시절부터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김좌진이 유년시절부터 글공부보다는 병정놀이를 즐겨했던 이유는 그의 성격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서당에서 『통감(通鑑)』을 배우던 중 ‘서(書)는 족이기성명이이(足以記姓名已而)’란 구절, 즉 ‘글은 성명을 적을 수 있을 정도면 족하다’라고 배우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좌진은 삼국지․수호지를 통달할 정도로 읽었으며 군사학에 관련된 책을 탐독하였고 무술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런 강직한 성격 이면에는 약한 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은 친구를 보면 자신의 옷과 바꿔 입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걸인을 보면 밥을 먹이고 자신의 옷을 입혀 보냈다고 한다.

그는 유년시절 김광호․김동익․김복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김광호(金光浩) 선생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시국을 한탄하며 비분강개 할 줄 아는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또한 무인적 기질을 소유한 김좌진이 한문을 수학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노력 덕분이었으며 앞으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할 김석범(金錫範)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김석범은 김광호의 조카로 김좌진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는 고향인 홍성을 떠나 여러 해 동안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계몽의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김좌진이 일찍이 계몽의식을 갖게 되는데 그의 영향이 컸으며,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후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지가 되었다. 김좌진은 김광호 선생이 개인 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갈산면(葛山面) 부기리(富基里) 김동익이 훈장으로 있는 부춘서당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김동익은 부기리 자신의 집에 부춘서당을 개설해 교육 사업을 벌였으며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성지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이후 갈산면 초대와 3대 면장이었다.

김좌진은 김복한으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김복한(金福漢)은 1895~1896년 전개된 홍주의병의 총수였으며 을사늑약 반대항쟁과 파리장서운동(巴里藏書運動)에 참여하는 등 전생애를 항일운동에 바친 민족 지사였다. 김복한은 안동 김씨(安東 金氏) 수북공파(水北公派) 대종손으로 비록 김좌진이 항렬은 높았으나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김좌진은 김복한으로부터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으며 이것은 이후 그가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홍성은 한말의병전쟁이 2차례나 봉기했던 지역으로 항일의식이 드높았던 지역이었다. 김좌진은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홍주의병을 목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06년 홍주의병이 거병했을 때는 청년이 된 김좌진이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그의 강인한 성격과 무인적 기질을 통해서 볼 때 홍주의병은 그에게 민족의식 고취를 가져오는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2 교육계몽운동

김좌진은 국권회복운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집에서 거느리고 있던 노비를 해방시켰다.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분배하였다. 노비해방을 단행한 이후에는 호명학교(湖明學校)의 설립에 참여해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호명학교의 교명은 호서지역을 개명(開明)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개화와 신학문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갖고 있었다. 호명학교의 설립에는 김좌진뿐만 아니라 당시 홍성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던 안동김씨 문중에서 재원을 지원하고 참여하였다. 김좌진을 비롯해 김병익(金炳翊)․김병수(金炳秀)․김병원(金炳鵷)․김선규(金善圭)․윤필(尹泌) 등이 호명학교의 설립에 참여했는데, 이중 윤필을 제외한 인물이 모두 안동김씨 문중 인물이었다. 이들은 홍성지역의 유지들로서 김병익은 판서, 김병수는 참판, 김병원과 김선규는 군수를 지낸 관력의 소유자들이었고, 윤필은 군수였다. 호명학교의 설립 주체들을 보면 전․현직 관료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립학교는 전․현직관리들이 설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은 관료생활을 통해 국내 사정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상황을 절감하는 위치에 있었고 을사늑약 이후 사립학교의 건립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교육 보급에 노력하고 있었다. 호명학교의 설립주체들도 안동김씨 문중 인물들이면서 모두 전직 관료출신이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호명학교의 규모는 갈산공립보통학교의 연혁을 통해 그 규모를 찾아 볼 수 있다. 갈산공립보통학교는 호명학교 교사(校舍)를 가교사(假校舍)로 이용해 1917년 3월 6일 고도면(高道面: 현재 갈산면) 상촌리에서 개교한 후 1923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갈산공립보통학교의 구교사(舊校舍)는 호명학교 교사였으며 구교사의 평수는 62평, 교지 평수는 865평이었으며 학교 실습지가 219평이었다. 호명학교 학생 수는 1908년 100여명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고, 1908년부터 중등과와 소학과를 나누어 가르쳤다. 또한 법률전문과를 설치하는 등 홍주지역에서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 할 정도였다. 교과목은 1908년 호명학교에 사용했던 산술학 교재가 전해질 뿐 어떤 교과목을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호명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위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위국가의 내용은 학문에 정진하여 세계맹주가 되어보자는 내용으로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한말 사립학교의 교육이념이 1905년 이전에는 개명과 부강이었으나 신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의 이념으로 변화되었고, 호명학교가 이러한 교육이념으로 학생들을 교육했음을 알 수 있다.

김좌진은 노비해방과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한 후 부인 오씨와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김좌진은 서울로 상경했을 때 김덕규에게 양자로 출계한 형 경진의 집에 머물면서 무관학교에 재학했다고 하나 아직 이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김좌진의 서울 생활은 그에게 많은 교훈과 앞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 새로운 인물들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상경한 이후 윤치성(尹致晟), 노백린(盧伯麟), 유동열(柳東說), 이갑(李甲) 등과 접촉하여 새로운 군사학을 배우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사관학교와 구한국군인 출신이었고, 고전적인 군사학밖에 몰랐던 김좌진에게 일본의 군사전략과 군사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그가 상경했던 시점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준식민지 상황이 되면서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계몽운동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김좌진은 1907년 김항규(金恒圭)․김홍진(金弘鎭) 등과 함께 자진하여 상투를 잘랐다고 한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고,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하기 위한 의식의 변화였던 것이다.

3 기호흥학회 활동

김좌진은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기호흥학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학문증진과 민중계몽을 위해 1908년 1월에 조직되었으며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교육사업이었다. 기호흥학회 지회 중 충남지회는 교육운동에 전념했고, 그 중에도 홍주지회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홍주지회는 1909년 1월 16일에 인가를 받았는데 회장에 서병태(徐丙台), 부회장에 김시원(金始元)을 비롯해 회원이 53명에 달하였다. 당시 홍주지회원 중에는 김좌진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는데 그의 서당선생이었던 김동익(金東益)과 호명학교설립에 군수로서 지원을 했던 윤필, 그리고 1910년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기필(李起弼)이었다.

김좌진은 홍주지회 설립초기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1909년 2월과 4월 사이에 가입했다.『기호흥학회월보』제7호 (1909년 2월 25일 발행) 회원명부에 없지만 『기호흥학회월보』제9호 (1909년 4월 25일 발행)에 비로소 그의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김좌진이 홍주지회에 가입하는 시기에 지회장이 김병수, 부회장이 김열제(金烈濟)로 각각 교체되었는데 임원 교체의 특징 중에 하나는 김좌진 문중인물들이 대다수 신규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것이다.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김좌진을 비롯해 호명학교의 설립주체였던 김병익․김병수․김선규․김병원이 그들이다. 이때 기호흥학회 홍주지회 보고서를 보면 학교설립에 3면 1숙의 원칙을 정하면서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

三面一塾으로 定區合設함은 惑行惑不에 人心을 可驗이라 贊務長 金炳翊씨가 白首殘年에 退居江湖하야 憂國一念이及於敎育이라 矢死血心이 老而益壯하야 會務를 擴張키로 特別贊務會를 定期召集일새

라고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판서를 지낸 김병익이 기호흥학회에 홍주지회에 가입했고, 이를 계기로 비용을 마련하는 등 직접 개입해 활동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김좌진과 그의 문중 인물들이 호명학교의 설립뿐만 아니라 기호흥학회 홍주지회 활동에 참여해 홍성지역에서 계몽운동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김좌진이 기호흥학회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 김좌진이 홍성지역의 재능 있는 학생들을 선발해 서울로 유학시키는 일을 꾸준히 추진한 것으로 볼 때 서울에서의 활동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좌진은 이밖에도 대한협회(大韓協會)에 참여했다고 하나 구체적인 활동상은 찾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상경해서 교류했던 윤치성, 노백린, 유동열, 이갑 등이 신민회 인사였고, 오성학교에 관여했다는 기록과 국망 이후에 국내에서 신효범·감익룡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해 자금을 모집했는데 이들이 모두 신민회 인사였던 점을 통해서 보면 당시 신민회에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김좌진은 일찍이 계몽의식을 소유했고 신교육운동의 전개와 계몽운동단체에 참여해 국권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독립운동 거점마련과 군자금모집

김좌진은 국망이 되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 신의주에 염직회사(染織會社)를 차려 해외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이창양행은 서울 관수동에 있었으며 일제경찰의 수색을 받기도 하였다. 염직회사의 경우 김좌진이 처음에는 서울에 설립하기 위해 신청을 했으나 이를 철회하고 신의주에 설립하였다. 이것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해외와의 연락을 취하기 쉬운 국경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의도였으며 책임을 이효식에게 맡겼다. 상점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거점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단체들이 비밀을 유지하면서 자금모집과 활동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용했던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김좌진도 일찍이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자금모집과 연락거점으로 이창양행과 염직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자금의 확보였다. 김좌진은 이를 마련하고자 안승구(安承龜)·민병옥(閔丙玉)·조형원(趙亨元)·김찬수(金燦洙) 등과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으나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김좌진은 이 사건으로 1911년 6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은 김좌진에게 또 다른 인연을 제공하였다. 김좌진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이후 대동단(大同團)에서 활동하게 되는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을 만났다. 최익환은 서천군 재무주사로 있으면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이때 전협도 토지불법매각 사건이 발각되어 1912년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투옥되었다. 전협과 최익환은 이미 만주에서 활동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활동하던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만난 상황이었고, 김좌진도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것이다.

김좌진과 전협은 서대문형무소에서의 인연으로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며 최익환과는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함께 활동했는데 그 계기가 바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최익환은 홍주군 주북면(洪州郡 州北面) 평리(坪里) 출생으로 김좌진과 동향이었기 때문에 쉽게 의기투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김좌진은 국망 이후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고 자금모집을 시도했으나 체포됨으로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5 대한광복회 활동

김좌진은 옥고를 치른 뒤에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 혁명기지 건설, 친일부호 처단, 무기구입, 독립군양성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1910년대 대표적인 비밀결사였다. 김좌진의 대한광복회에서의 활동은 만주부 사령이었던 이진룡(李鎭龍)의 후임으로 파견되었다는 단편적인 사실만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김좌진이 1915년 12월에 설치하는 길림광복회 조직에 참여 했고, 평안도․황해도 지부원 이었던 이근영․이근석과도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보면 그는 대한광복회가 조직된 1915년부터 국내외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고 주요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김좌진은 1917년 3월 최익환․이기필․감익룡(甘翊龍)․신효범(申孝範)․성규식(成奎植)․강석룡(姜錫龍)․성욱환(成郁煥) 등과 함께 군자금모집을 하다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기필․감익룡․신효범만 재판에 회부되고 김좌진, 최익환을 비롯해 나머지 5명은 예심에서 면소판정을 받았다. 또한 재판에 회부된 이기필·감익룡·신효범은 경성지방법원과 복심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과정에서도 김좌진과의 관련은 언급하지 않았다. 때문에 김좌진과 이들과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파악되지 않지만 1915년 11월경부터 독립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계획은 군자금모집 사실외에도 김좌진이 감익룡·신효범과 함께 활동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들이 신민회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신효범은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룬 인물이었다. 특히 감익룡은 신민회에서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건설 사업을 추진할 때 만주시찰단으로 참여했고, 안동현에 연락거점을 마련해 독립군기지와 무관학교에 입학할 이주민을 모집하는데 참여했었다. 이를 통해 보면 김좌진은 신민회 인사들과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김좌진이 청년학우회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가 상경해서 교류했던 윤치성·노백린·유동열·이갑 등이 신민회 인사였던 점을 통해서 본다면 김좌진이 신민회에서 활동했을 개연성은 높아 보인다. 이 계획에 참여했던 최익환도 주목된다.

최익환은 일찍이 김좌진과 친분이 있었고 이때 군자금모집을 함께 하면서 대한광복회에 참여했던 것이다. 최익환은 만주를 자주 왕래했으며 김좌진의 만주 망명 이후에도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조선독립운동에 대해 상의했다고 한다. 또한 대동단사건 이후에 홍성지역 사상단체인 무공회(無空會)에 가입해 활동했는데 무공회는 김좌진의 친동생인 김동진을 비롯한 홍성지역 청년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사상단체였다. 이를 통해 보면 최익환과 김좌진은 1915년경부터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후 홍성에서 김동진과 사회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김좌진은 무죄로 풀려난 후 바로 활동을 재개했고 이번에는 지폐를 위조하는 방법으로 군자금 모집을 시도했다. 이들은 중국 안동에서 중국지폐를 위조할 것을 계획하고 1917년 음력 4월중 자금마련에 착수했다. 방법은 중국 안동에서 유통되는 중국지폐를 위조 한 후 정화(正貨)로 교환하여 자금으로 사용하려던 계획이었다. 먼저 이기홍․윤영상으로부터 570원, 이현삼으로부터 600원을 기계구입비 명목으로 자금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음력 6월초 홍성에서 오영근․홍상희로부터 600원의 자금제공을 약속받았으나 결국 제공받지 못했다. 이때부터 일제경찰의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1918년 1월 관련인물들이 체포되고 계획은 실패하게 되었다. 화폐위조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국내에서도 이루어졌다. 김석연․이기정․이철순은 당시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던 일화(日貨) 50전 은화를 위조하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실제로 위조를 시도해 동전 제작에 성공했으며 이를 대량으로 제작하기 위해 기계구입비용을 마련하고 설계까지 마쳤으나 발각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의 활동은 대한광복회의 자금 모집이었다. 당시 김좌진은 대한광복 회원이었고, 함께 활동한 김석범도 대한광복회원이었다. 김석범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김좌진의 서당 훈장이었던 김광호의 조카로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고, 이후 김좌진이 계몽의식을 갖게 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다. 그는 국망 이후에도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김좌진과 함께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했던 것이다.

대한광복회는 “南鮮 富豪에게 脅迫文을 보내 軍資金을 徵收하고, 만약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處斷한다. 그밖에 忠南 稷山 金鑛을 습격하고, 中國에 가서 통화를 위조해 正貨로 바꾼다. 그런 뒤에 만주에서 鮮人 壯丁을 훈련하여 군대를 편성하고(후략)”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광복회가 통고문과 고시문을 발송해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금광을 습격하는 등의 활동상은 밝혀졌으나 화폐를 위조해 자금을 조달한다는 계획은 그 활동상이 찾아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을 통해 대한광복회에서 화폐를 위조해 군자금을 모집하려던 계획이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김좌진이 중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김좌진이 광복회 총무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대한광복회에서 자금모집의 책임을 맡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사건기록에 따르면 김좌진이 화폐위조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17년 음력 4월중이었고, 일제경찰이 이 사건의 정보를 입수한 것도 1917년 중 이었다. 실제로 일제경찰의 수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좌진이 대한광복회 만주부 사령으로 파견되는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다. 이 시기 대한광복회는 전국적으로 부호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해 자금을 모집하고 있었고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이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즉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후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던 시기에 김좌진이 군자금모집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대한광복회에서 자금을 모집하고 있던 김좌진이 이 계획을 계기로 일제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었으며 때마침 만주부 사령인 이진룡이 체포되면서 대한광복회는 김좌진을 만주 부사령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또한 김좌진의 화폐위조사건과 함께 대한광복회 조직이 1918년초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국내조직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만주로 파견된 김좌진은 체포를 면할 수 있었고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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