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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金昌淑]

혁신유림계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백절불굴의 독립운동가

1879년(고종 16) ~ 1962년

김창숙 대표 이미지

심산 김창숙

전통문화포털(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1 개요

김창숙은 1879년 음력 7월 10일 경북 성주에서 출생하여 1962년 5월 10일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전통적인 유학을 공부하여 곽종석, 이승희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9년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를 추진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경상도의원이 되고 1926년에 의정원 부의장이 되었다. 독립운동기지건설계획으로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그 자금으로 나석주 의거를 지원하였다. 1927년 피체되어 변호사를 거절하고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해방 후 반분단, 반독재투쟁을 하였고 1946년 유림을 정비하여 성균관대학교 를 설립하여 총장을 지냈다.

2 성장과정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1962)은 1879년 7월 10일(음) 경북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峯洞)에서 아버지 하강(下岡) 김호림(金頀林)과 어머니 인동장씨(仁同張氏) 사이에서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문좌(文佐), 호는 직강(直岡), 심산(心山), 이명은 우(愚)이다. 직강은 13세 때 부친이 앞산 직준봉(直峻峰)을 가리키며 항상 직강불요(直岡不撓)하기를 가르치며 지어준 호이고, 심산은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 맹자의 사십부동심(四十不動心)이란 말에 깊이 느낀 바 있어 스스로 지은 것이다. 그는 ‘우(愚)’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지기를 자청하였는데 이는 국권을 강탈당한 피지배 민족으로서의 역사적 현실 앞에 자신을 자책한 것이다. 피체 후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인해 하체의 불구를 얻게 되어 ‘벽옹(躄翁)’이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원래 영남의 문벌사족인 의성김씨 중에서도 조선 중엽의 명현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 남다른 지위와 명망을 지니고 있었다. 타고난 재주가 남달랐으나 성품이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13세에 사서(四書)를 읽었다.

1896년 부친상을 당한 후 이종기, 곽종석, 이승희, 장석영 등 대유(大儒)들의 문하를 두루 찾아가 경서에 대해 질의하였는데 특히 이승희를 각별히 따랐다. 성주에서 한주 이진상을 중심으로 심즉리(心卽理)의 한주학파(寒洲學派)가 형성되어 그의 아들 이승희와 곽종석 등 제자에게 전수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승 이승희를 따라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罰勒約疏)」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결성하여 총무를 맡아 구습 타파와 신분과 계급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혁신적 사고로 국권회복을 꾀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수구유생들과 대립하였다.

1909년 일진회가 한일합방론을 주창할 때는 「일진회성토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하고자 서명 작업을 주도하였으며, 이 일로 성주 헌병분견소에 8개월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된 단연금(斷煙金)을 기반으로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보수유림과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교육체계로 무장한 인재를 길러 내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이러한 고투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큰 치욕이다”라고 외치면서 매일 술에 취해 통곡했다. 이후 타락하고 방종한 생활을 자초하니 주위에서는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하였다.

1913년 방탕한 생활 끝에 모친의 엄중한 꾸짖음을 받고 스스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게 되었다. 이후 집에 있는 경서와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독서에 열중하며 1919년 3·1운동 직전까지 학문에 열중하였다.

3 파리장서 추진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

국권 피탈은 그로 하여금 깊은 좌절에 빠지게 하였고, 유교적 인생관과 근대 문명론의 틈새에서 학문 정진을 위안으로 삼고 있던 김창숙에게 3·1운동은 새로운 시간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일제가 친일유림을 동원하여 조작한 ‘독립불원서 사건’과 3·1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빠졌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의 작성 및 전달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곽종석을 중심으로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화이론적 세계관 대신 만국공법적 국제정세관이 나타나고, 왕정복고의 정치이념이 약화되고 민주공화제를 대세로서 수용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신분과 계급 질서의 타파를 주장하며 만국공법과 외교론을 수용하고 있었던 김창숙의 영향을 살필 수 있는 것이었다.

김창숙은 상해 망명 초기 임시의정원에 관계하여 1919년 4월 30일에 경상도의원에 선임되는 등 임정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민주공화정의 국가 체제를 선포한 임정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이렇듯 그는 더이상 근왕사상의 복벽론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이 공개되자 신채호·박은식과 더불어 이승만을 성토하는 한편, 그를 비호하는 임정 각료와 의정원을 비판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승만의 외세 의존적인 행동은 반민족적·굴욕적 행위로 인식되었고, 이는 그의 유교적 가치에 용납될 수 없는 사도(邪道)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대안 모색 속에서 1923년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동의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확립하게 된다. 이후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신채호를 중심으로 한 북경 지역 한인 세력과 궤를 같이하였다.

한편 김창숙은 언론을 통한 한인 독립운동의 선전 활동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1920년 박은식과 함께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운영하였으며, 신채호·박숭병 등과 함께 잡지 『천고(天鼓)』의 간행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승만 탄핵’ 이후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학문적 교양과 유림이라는 배경 아래 대(對) 중국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중국의 정치지도자인 손문 등과 교류하면서, 김창숙은 중한호조회·한국독립후원회 등의 결성을 이루어냈다.

4 군자금모금운동 추진과 나석주의거 지원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서 떠나 독립운동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김창숙은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중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기지의 임차를 승인받고 소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김창숙은 1925년 8월부터 1926년 3월까지 약 8개월에 걸쳐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김창숙의 민족운동은 한 차례 전환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일제 식민기관의 파괴라는 의열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었다. 1926년 나석주 의거가 바로 김창숙의 자금 지원으로 감행된 의열투쟁이었다. 김창숙의 의열 투쟁은 일제 밀정 김달하의 처단과 나석주 의거로 대표되는데, 이 단계에 이르러 김창숙의 민족운동 방향은 폭력·파괴·살해 등 적극적 투쟁을 통해 민중 직접 혁명을 목표로 하는 의열단 활동과 연결될 만큼 뚜렷해져 갔다. 이 시기에 김창숙은 1926년 8월 임시의정원에서 부의장에 추대되었다.

김창숙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과 밀정의 밀고로 1927년 6월 체포되었다. 그는 옥중 투쟁을 통해 불구의 몸이 되면서까지도 일제의 집요한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불굴의 항일 의지를 과시하였다.

1928년 대전형무소에서 ‘변호사를 사절하다’를 남겼는데 천안 독립기념관 경내에 〈어록비〉로 새겨져 있다.

“나는 대한사람으로 일본법률을 부인한다.
일본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그는 ‘포로’를 자임하면서 변호인단의 변호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간수나 전옥에게 결코 허리를 굽혀 절하지 않았다. 또한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나온 이후에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모두 거부하는 등 백절불굴의 기개를 드러내었다.

5 반분단, 반독재투쟁과 성균관대학교 설립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던 김창숙은 해방 후에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건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방 후 김창숙은 신탁통치 파동을 계기로 활발한 정치 활동을 벌였다. 1945년 말부터 전개된 당시의 반탁 투쟁은 우익의 정부 수립 방안이었던 중경임시정부 추대 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으며 동시에 반소 반공 투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김창숙이 1946년 1월 반탁담화문을 발표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정황에서였다. 김창숙은 미소의 신탁통치를 일제의 식민통치와 같이 이민족에 의한 민족자주권의 박탈로 인식하고, 쓸데없는 파벌적 투쟁을 청산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뭉치’가 되어 ‘의혈(義血)’로써 싸우기를 호소하였다. 이렇게 신탁통치에 대한 절대 반대의 입장에서 김창숙은 당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의 ‘총체적 지지’를 내걸고 탁치를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던 공산당 세력을 ‘매국’과 ‘반역행위’라고 질타하고 비판하였다.

김창숙은 1949년 김구의 암살로 절망하기도 했지만, 1950년대 들어 이승만의 권위주의적인 독재정치가 강화되고 장기집권 음모가 노골화되자 다시 노구를 이끌고 반독재투쟁의 전선에 나섰다. 세 번씩이나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며 이승만 정권에 맞섰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 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고, 1952년에는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 대회’를 주도하여 40일간 재차 투옥되었다.

1946년 친일유림의 척결과 유학을 통한 새로운 건국사업에 이바지하기 위해 유도회를 결성하였으며,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육영사업을 목적으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의 건립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6년 5월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맡았으며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하야권고 성명을 발표한 뒤 성균관과 유도회는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점차 분규에 휩싸이게 되었다. 1955년부터는 유도회와 성균관에 정치세력이 개입하여 전국 유림은 갈피를 잡지 못했으며 수년에 걸쳐 유림의 고질적인 분열상이 드러났다. 계속해서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과 독재에 항거하다가 1957년에는 유도회, 성균관, 대학총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당하였다.

김창숙은 집 한 칸도 없이 여관을 전전하다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서거하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성북구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안장하였다.

김창숙은 1962년 3·1절에 생존자로서는 유일하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저술로는 『심산유고(心山遺稿)』가 있는데 여기에는 독립운동 관련사실을 기록한 「벽옹73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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