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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羅錫疇]

조국의 제단에 온 몸을 던진 의열투쟁의 화신

1892년(고종 29) ~ 1926년

나석주 대표 이미지

나석주 의거를 보도한 동아일보(1927년 1월 14자 호외)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나석주(羅錫疇)는 1910년 약관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나선 이래 1926년 자결 순국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황해도 일원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변절한 밀정 3명을 사살하여 의열투쟁의 서막을 열었다.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임시정부의 보위에 힘썼다. 한편 의열단, 병인의용대, 다물단(多勿團) 등 의열투쟁 단체에 참여하며 투쟁방안을 모색하였다.

1925년에는 다물단과 연계하여 독자적으로 국내 의열투쟁을 추진하였다. 국내로 침투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착취기관을 폭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된 운동 자금이 마련되지 않아 국내침투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1926년 김창숙(金昌淑)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귀국하여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경찰 경부보를 포함한 7명을 살상한 후 자결 순국하였다.

2 국내활동과 중국 망명

나석주는 1891년경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북률면(北栗面) 진초리(進礎里) ‘나무리’ 동네에서 소작인 나병헌(羅秉獻)과 부인 김해 김씨의 독자로 태어났다. 향리의 보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안악의 양산학교를 다녔다. 이 당시 백범 김구와 만나 평생 뜻을 함께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운동에 나서 그해 10월 권총을 구입하여 황해도 봉산군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이어서 11명의 동지들과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려 했으나, 장연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4년 북간도 모아산(帽兒山)으로 이주하였다. 이동휘가 나자구(羅子溝)에 설립한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에 입학하여 8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으나 모친의 병이 위중하여 1916년 귀향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황주군(黃州郡) 겸이포(兼二浦)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20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국내파견대 이명서(李明瑞) 등이 국내에 진공하여 은률군수를 처단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입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음력 11월에는 서간도의 한족회(韓族會) 국내 특파원 홍원섭(洪元燮) 등과 한족회 본부에 군자금 지원을 추진했다. 1921년 1월 19일 주비단원 이광복(李光福), 김덕영(金德永) 등과 함께, 변절하여 일본의 밀정노릇을 한 주비단원 3명을 사살하였다.(「형공제30호(이광복 등) 판결문」, 해주지방법원, 1936년 4월 28일) 이후에도 권총을 휴대하고 안악 등지에서 여러 차례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국내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았다. 1921년 10월경 황해도에서 목선을 타고 진남포를 거쳐 중국 천진으로 망명하였다.

3 중국 상해에서의 활동

1922년 6월 중국 상해에서는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둘러싸고 여러 의견들이 제기되어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유호청년임시대회(留滬靑年臨時大會) 개최를 촉구하는 청년 발기인 중 한명으로 참여하였다. 청년임시대회에서 조사위원들이 임시의정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주비회 측의 의견을 보고하였다. 그는 6월 19일의 제2회 임시청년대회에서 ‘임시정부 옹호의 건’을 결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결의 안건은 의결되지 못하였다.

같은 해 10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가 창립되자 특별회원으로 참여하였다. 특별회원은 군사와 기술 교육을 이수하고 군인이 되어 병역에 복무할 의무가 있었다. 12월 5일의 이사회에서 한단군사강습소(邯鄲軍事講習所)로 군사교육 파견이 결정되었다. 한단군사강습소는 중국 군벌인 오패부(吳佩孚)가 설립한 군사교육기관이었다. 그는 1923년 한단군사강습소의 교육을 수료한 후 중국군에 배속되었다가 1924년 4월경 상해로 돌아왔다.

1924년 6월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 경호원에 임명되었다. 경무국은 일제 경찰과 정탐, 밀정 등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위하는 업무를 맡은 곳이었다. 그는 김구의 지시를 받아 임시정부의 보위와 옹호를 위한 행동대로서 활동했다. 아울러 상해 교민단을 호위하는 의경대(義警隊) 사무도 겸하였다. 의경대는 교민단 소속으로 친일 조선인이나 일제 관헌과 내통하는 조선인 등의 조사 임무를 맡았다.

4 의열단, 다물단 가입과 1925년의 일제기관 폭파 거사 추진

1924년 임시정부의 활동이 극히 침체된 상황이었으므로 그에게는 독자적인 활동공간이 필요했다. 결국 의열단과 다물단 등의 의열투쟁 단체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로 나섰다. 그는 1924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8월 18일 단원인 장덕진(張德震), 이승춘(李承春) 등과 상해 프랑스 조계의 중국인 도박장을 습격하여 도박금전을 탈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프랑스 경찰과 중국인 탐정의 사격을 받아 장덕진은 순국하고 이승춘은 체포되고 말았다.

1924년 경 그는 무정부주의 계열의 의열투쟁 단체인 다물단에도 참여하였다. 다물단은 1923년경 북경에서 신채호, 이회영, 류자명 등의 지도로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학과 황익수(黃翊秀) 등이 조직하였다.

다물단의 황익수는 1925년 1월 의열단원들과 연계하여 국내와 일본 동경 등지에서 일제기관 파괴와 암살을 추진하였다. 나석주는 같은 해 3월경부터 상해를 떠나 다물단 단장 황익수와 함께 서울에서 일제기관을 폭파하는 의열투쟁을 준비하였다. 투탄 대상 기관으로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조선식산은행, 조선은행의 4곳을 주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정책의 중심기관이며, 동척, 식산은행, 조선은행은 우리 민족을 멸망시키는 기관이라는 이유였다.

그중에서도 동척과 식산은행, 조선은행을 주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경비가 삼엄한 관계로 희생만 생길 뿐 미수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동척과 식산은행, 조선은행의 경우는 첫째 미수에 그칠 리가 없으며, 둘째 업무 특성 상 진열식으로 앉아서 사무를 보기 때문에 폭탄 1~2개로 최소 10인 이상을 살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독으로 실행할 경우에는 동척과 식산은행이 적당하다고 보았다. 동척과 식산은행이 황금정 4거리의 3층 양옥으로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연이어 거사를 실행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동척은 황금정 2정목(지금의 을지로 2가), 식산은행은 남대문통 2정목(지금의 남대문로 2가)에 있었다. 동척과 식산은행을 파괴 대상으로 삼은 데에는 그의 고향 재령평야가 동척과 일본인의 소유로 변한 데 따른 통분도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1924년 가을부터 1925년 봄에 걸쳐 격렬하게 전개된 북률소작쟁의는 그의 가슴을 뛰게 했을 것이다.

투탄 거사를 위해 무기도 준비하였다. 권총과 폭탄(파괴탄) 3개였다. 그 외에 투탄 5~6개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귀국 비용 등 거사 자금 몇백원을 마련할 수 없었다. 일제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개인 소유의 어선을 이용하려 했으나, 귀국선을 물색할 비용이 없었다. 황익수가 보내기로 한 운동자금을 기다리며 연태에서 이도(伊島), 석도(石島)까지 280리를 걸어서 귀국 배편을 구해보려는 생각도 하였다. 국내 침투를 위해 귀국 배편을 약정하였으나 황학수의 운동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결국 국내 투탄계획은 중지되고 말았다.

5 김창숙의 자금 지원과 국내 투탄의거

1926년 1월 활동이 침체된 한국노병회는 회원 중 의열투쟁 경험이 있는 회원을 중심으로 의열투쟁 방략으로의 전환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결성된 것이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였다. 이후 병인의용대는 일제 기관 파괴, 밀정, 주구배, 주요 요인 처단 등의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1925년 국내투탄의거를 추진했던 그는 병인의용대의 결성 초기부터 참여하며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김창숙이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상해로 돌아왔다. 김창숙이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儒林團義擧)’로 모집한 자금이었다. 상해로 돌아온 후 김창숙은 김구, 이동녕 등의 동지들에게 국내 활동의 결과를 설명하였다. 이어서 국내의 적 기관 파괴와 친일부호 응징계획을 피력했다. 이에 김구가 나석주와 이승춘을 추천하며 류자명과 상의하기를 권했다. 상해에서 의열단원 류자명과 한봉근을 만난 김창숙은 국내에서의 의열투쟁을 위해 권총구입비로 400원을 지급하였다. 한봉근은 권총 7정과 실탄 490발을 구입하여 정세호에게 맡겼다. 폭탄은 신채호가 보관하던 것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1926년 음력 4월 초순경 김창숙은 류자명과 함께 천진에서 나석주를 만나 거사를 논의하며 폭탄 3개를 건네주었다. 이후 7월에는 거사자금 1,000원을 지원하였다. 1925년 자금부족으로 국내투탄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던 나석주는 마침 김창숙이 의열단에 자금을 지원한다고 하자 오랜 숙원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흔쾌히 찬성하였다. 거사계획은 나석주에 의해 주도되었다.

12월 26일 나석주는 홀로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하여 중국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자동권총 1정과 폭탄 2개를 소지하였다. 거사 장소를 사전 답사한 후 12월 28일 오후 2시경 서울의 식산은행 대부계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기둥에 맞고 폭발하지 않았다. 곧이어 동척 경성지점으로 달려가 토지개량부 기술과실에 폭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역시 폭발하지 않았다. 한 개는 뇌관이 물에 젖었고 다른 한 개는 너무 오래되어 폭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일본인 기술과장 등 6명을 쏘아 살상하였다. 황금정 거리로 나와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를 사살한 후 자신의 가슴에 권총 3방을 쏘아 자결 순국하였다.

나석주는 중국 망명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지들에게 국내에서의 의열투쟁과 자결순국의 뜻을 밝히고는 했다. 동척과 식산은행 투탄 의거 당시에도 거사 계획과 거사 후 자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힌 편지를 신문사에 보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온 몸을 조국 독립의 제단에 바치기를 갈망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우리 의열투쟁사에서 그의 활동이 돋보이는 이유이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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