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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羅喆]

민족종교 대종교를 다시 일으키다

1863년(철종 14) ~ 1916년

나철 대표 이미지

나철 사진

공훈전자사료관

1 개요

우리 민족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여러 방식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종교를 통한 국권회복운동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단군을 교조(敎祖)로 하는 민족 고유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종교(大倧敎)를 들 수 있다. 나철은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다시 일으킨(重光) 인물이다. 그는 대종교를 다시 일으키기에 앞서 외교와 암살 등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국권회복운동을 벌인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민족종교였다. 그가 다시 일으킨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2 전라도의 선비들

나철은 1863년 12월 2일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에서 나용집(羅龍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혹은 나인영(羅寅永)이었다. 나철(羅喆)이란 이름은 그가 대종교를 다시 일으키면서 고쳐 지은 이름이었다. 원래 경전(經田)이라는 아호(雅號)를 사용하였지만, 마찬가지로 대종교를 다시 일으킨 후 홍암(弘巖)이라는 도호를 사용하였다.

나철은 아홉 살부터 구례에 사는 시골 선비인 왕석보(王錫輔)에게 글을 배웠다. 왕석보는 역술(曆術)과 경학(經學)에 능한 학자로서 당시 담양의 고정주(高鼎柱)와 함께 전라도 지역의 큰선비로 꼽히고 있었다. 왕석보는 이기(李沂)나 황현(黃玹)과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황현은 광양 출신의 시인이자 문장가이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자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왕조가 무너져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다.

이기는 김제 출신의 유학자이다. 1905년 이후 민간외교나 오적(五賊, 을사오적) 처단 시도, 대종교의 중광 등에서 시종일관 나철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이기는 고려 말의 충신인 이암(李嵒)의 후손으로 집안에 고대사와 관련된 많은 옛 기록들을 소장하고 있던 인물이다.

3 김윤식과의 인연

나철의 첫 번째 스승이었던 왕석보는 그가 어렸을 때 사망하였다. 왕석보를 이어서 나철의 스승 역할을 한 인물로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윤식(金允植)을 들 수 있다. 나철은 일찍이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는 김윤식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집에 살면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그는 스무 살에 소과(小科)에 급제하였으며 스물아홉 살 때인 1891년에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하는 응제(應製)에 합격하였다. 김윤식은 자신의 일기인 『속음청사(續陰晴史)』에 이를 매우 기쁘게 여겼다고 기록해 놓았다.

나철은 1891년 승정원가주서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893년 10월 승문원부정자로 임명되었지만, 곧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버리고 말았다. 1895년에 다시금 징세서장에 임명되었지만, 이것도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징세서장은 갑오개혁 당시 새로 만들어진 관직이었다. 개화파 정부는 삼정문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왕의 지방행정조직과 별도로 조세징수조직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주로 청렴결백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징세서장에 임명하였다. 2년 전 이미 관직을 버린 나철이 다시금 징세서장에 임명된 데에는 그의 스승인 김윤식의 배려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윤식은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실각하였고 이듬해인 1897년 12월에는 제주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나철은 스승인 김윤식을 따라 제주도로 건너가서 스승의 주변을 지켰다. 그는 1901년 부인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제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김윤식도 제주도에서 이재수(李在守)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전라도의 지도(智島)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나철은 김윤식이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자주 왕래하였다. 그는 김윤식의 가장 가까웠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김윤식과의 인연은 그의 아들 대에도 이어졌다. 김윤식의 일기에는 나철의 아들 나정문(羅正紋)이 1912년 무렵 자신의 집에 살면서 선린상업학교를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철 일가는 대를 이어 김윤식의 집에서 신세를 진 것이다.

4 일본에 건너가 민간외교를 전개하다

나철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일본으로 건너가 민간외교를 전개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동양평화론이라고 하는 것을 내세운 바 있다. 일본이 백인종에게 맞서서 동양을 지키기 위해서 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당시 동양 사람들은 동양평화론을 액면 그대로 믿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이 과연 약속을 지킬 것인지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나철도 이러한 걱정 때문에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당시 나철은 미국에 건너가려 하였다. 당시 미국 포츠머스에서는 러일전쟁을 끝내기 위한 강화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을 이 회담에서 배제하였다. 나철은 한국 사람들도 이 회담에 직접 참석하여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외부(外部, 현재의 외무부 역할을 하는 관청)에 여권을 신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나철은 1905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등 정계 요인을 방문하는 한편 ‘한중일 3국이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의 독립을 보존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의견서를 일본 정부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시 각계에 서한을 보내 항의하였다.

나철은 당시 이기·오기호(吳基鎬) 등 호남 출신 지식인들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이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오기호도 1863년 전라도 강진에서 태어난 호남 출신 지식인이었다. 오기호와 나철이 동갑이었음에 비해서 이기는 나철보다는 열다섯 살 연상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들 호남 출신 지식인들의 리더 역할은 이기가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기가 부친의 상을 당하는 바람에 나철도 그를 모시고 1906년 1월 귀국해야만 하였다.

5 오적 처단을 시도하다

나철은 1907년 자신회(自新會)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이름은 스스로 새로워지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이 단체는 실제로는 을사늑약에 책임이 있는 다섯 역적(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그와 이기·오기호 등 일본에 함께 다녀온 호남 출신 지식인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박대하(朴大夏)·김동필(金東弼)·이홍래(李鴻來)·강원상(姜元相) 등 행동파 젊은이들이 가담하였다. 김인식(金寅植)과 이용태(李容泰) 등 고관들이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윤주찬(尹柱瓚)도 가세하였다.

오적 처단을 실행하기에 앞서 이기가 자신회의 취지서를 지었으며, 나철은 애국가와 동맹서를 지었다. 윤주찬이 일본 정부와 사령부, 각국 영사관에 보내는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오적 처단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모집한 18명의 결사대원이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거사는 원래 2월 13일로 예정되었으나 몇 차례 연기되어 3월 25일에야 실행되었다. 하지만 을사오적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처단하지 못한 채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나철은 다시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사전에 계획이 노출되어 관련자들이 검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나철은 오기호 등과 함께 이번 거사의 정당성을 담은 자현장(自現狀)을 가지고 자수하였다. 그는 재판 결과 10년 유형(流刑, 먼 지역으로 귀양보내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는 전라도에 위치한 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12월 7일 황제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6 대종교를 중광(重光)하다

망국이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자 당시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라가 망하더라도 민족정신을 지켜야만 장차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에 제기되었다. 민족정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와 언어가 강조되었으며 종교도 주목을 받았다. 나철은 민족종교를 일으키는 방법을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려 하였다.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한성부 북촌 재동에 위치한 취운정에서 이기· 오기호·강우(姜虞)·유근(柳瑾)·정훈모(鄭薰謨)·김인식·김윤식 등과 함께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고 단군을 교조로 하는 민족종교의 부활을 선포하였다. 그는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하고 직접 초대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였다. 자신의 이름도 나철이라고 고쳤으며 홍암이라는 도호도 지었다. 그는 포교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약 2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옛 양반관료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단군교는 양반 종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단군교에 대한 일제의 의심의 눈길이 한국 병합 이후 더욱 날카로와졌기 때문에 부득이 명칭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교단의 중심을 옮겨야만 하였다. 나철은 1911년 백두산 북쪽 기슭의 청파호까지 직접 답사하였으며 1914년 총본사를 청파호로 옮겼다.

하지만 일제는 대종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총독부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였다. 나철은 만주로부터 급히 돌아와서 「신교포교규칙(神敎布敎規則)」에 따른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지만 끝내 허가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1916년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올라가 자결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김교헌(金敎獻)이 2대 교주가 되었다. 나철은 자신에 비해 온건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김교헌을 내세워 일제의 탄압의 예봉을 피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이었다. 그가 목숨을 바쳐가며 지켜낸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7 그나마 체면을 살린 독립청원서

김윤식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용직(李容稙)과 연명으로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보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그 결과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자작 작위는 박탈되었다.

당초 김윤식은 3·1 운동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최남선(崔南善)으로부터 독립선언서에 서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바 있다. 박영효·한규설(韓圭卨)·남정철 등도 이러한 요청을 받았다. 당시 그는 이 요청을 완강하게 거절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3·1 운동이 시작되고 거족적인 만세시위를 목격하면서 과거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떨쳐버리고 독립청원서를 보내게 되었다.

김윤식이 독립청원서를 보내게 된 데는 더 구체적인 이유가 하나 있었다. 항간에서는 3.1운동 당시 ‘일제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인들이 독립을 바라지 않는다는 내용의 문서를 발송했으며 여기에 김윤식이 유림대표로 서명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는 이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밝혀야만 하였다. 독립청원서는 이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는 이로부터 3년 뒤인 1922년 1월 22일 자택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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