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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린[盧伯麟]

항일 공군 양성에 앞장선 대한민국임시정부군무총장·국무총리

1875년(고종 12) ~ 1926년

노백린 대표 이미지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하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게이오의숙, 세이조학교에서 수학한 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귀국 후 대한제국 육군의 주요 보직을 담당했다. ‘한국병합’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항일독립전쟁론을 강하게 주장하였으며 공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비행기학교를 설립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국무총리직을 역임하였다.

2 대한제국 육군 장교

노백린(盧伯麟)은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하리에서 부친 노병균(盧秉均)과 모친 밀양박씨 사이의 3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풍천(豊川), 이명은 진방(鎭邦), 경보(景輔), 진영(珍榮)이다. 1880년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21세가 되던 1895년 황해도 대표로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같은 해 4월 일본에 도착하였으며, 2개월 후 게이오의숙(慶㒣義塾) 보통과(1년 과정)에 입학하였다. 1896년 졸업하였고, 윤치성(尹致晟) 등과 함께 세이조학교(成城學校) 예비과에 진학했다. 재학 중 대조선유학생친목회에서 편찬한 『친목회회보』 5호 강연란에 「군제유래약서(軍制由來略敍)」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게재하였다. 1898년 세이조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11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년 뒤 일본육군사관학교 제11기로 졸업하였으며, 도쿄에 있던 보병 제1연대, 제3연대, 공병대, 포병대에서 견습사관 생활을 하였다.

일본군 연대에서 실무를 마친 이후 1900년 6월 귀국하였으며, 대한제국 육군참위로 임명되었다. 1901년 4월에는 원수부(元帥府) 회계국 총장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이 되어 군대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부위, 정위, 참령으로 진급하였고, 군제의정소 위원,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장, 연성학교 교환 겸 교성대장 직을 역임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관전사(觀戰使)가 되어 만주의 다롄·뤼순 등을 시찰하였다. 1905년에는 부령으로 진급하였으며 육군 헌병대장이 되었다. 1906년 헌병대장에서 면직된 후 정령으로 진급하였고 연성학교 교장직을 수행했다. 이와 함께 서우학회 교무원 및 평의원, 월보규정기초위원협찬원으로 당선되었다. 1907년에는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앞장섰다. 1909년 대한제국 군부와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자 윤치성을 비롯한 군부 출신들과 함께 대한공업회를 조직하고 실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3 미국 윌로우스에 비행기 학교를 설립하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병합이 되었다. 노백린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고민했다. 유길준, 최린, 권동진, 오세창과 서울 시내 중학생을 동원하여 시위를 전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총독부의 회유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1914년 원산 기독병원에서 근무하는 장녀 내외를 방문하고 해외로 망명할 것임을 밝혔다. 노백린의 망명 계획은 1916년 구체화되었다. 대한광복회에 김좌진·신현대·신현두·윤치성·권태진·임병한·김홍두·이현·이관구 등과 가입하고 국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조명구 외 1인과 단둥과 다롄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약 2개월간 만주와 상하이 등지에서 국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하였고, 하와이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16년 10월, 조명구, 조용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선편 차이나를 타고 하와이로 출발했다. 12월 5일. 하와이 도착에 도착했으며, 박용만이 조직한 대조선국민군단의 별동대 주임으로 활동했다. 노백린은 하와이에 도착한 소감을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나 노백린은 한국 인민 중에 남들이 나를 군사상 학술이 좀 낫다고 하므로 각각 장기를 바치는 중에 나도 이것을 바치고자 나라를 떠나서 시베리아 등지로 중국 각처로 돌아다니다가 필경은 하와이까지 왔는데, 근일에 다니는 나의 길도 오직 이것이외다.
[신한민보, 1919.10.18]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국내외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국내에서는 한성정부가 수립되었음이 알려졌다. 이때 한성정부의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연해주, 상하이, 국내에 있던 정부가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군무총장이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미주 한인들의 후원을 받고, 항일독립전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와이를 떠나 시애틀, 시카고, 뉴욕 등 미국 주요 도시 순방에 나섰다.

1920년 1월 24일에는 「군무부 포고 제1호」 발표하여,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의 해로 선포하고 군대의 양성과 편성을 준비했다. 그리고 비행기학교를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1920년 2월, 비행학교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서 군단과 비행기학교 설립하였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편지를 보내 미주 진행되고 있는 군사활동에 대해 보고하였다. 1922년 한인비행사학교 학생 수는 41명에 달하게 되었고, 1923년 11명 졸업생을 배출했다.

4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다

1920년 7월, 노백린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가기 위해 윌로우스에서 하와이로 출발했다. 이곳에서 이승만·김규식과 교류하며 상하이행을 준비했다. 1921년 2월, 상하이에 도착하였으며, 성대한 환영회가 열렸다. 노백린은 그동안 미주에서 활동을 보고하면서 독립을 위해 단결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 무엇보다도 단결이외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단결을 잘하면 왜놈이 두려워하고 세계가 두려워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사업도 이룰 것이외다. 그런데 이러한 힘이 있는 단결도 해이케 될 수 있소. 그것은 양반과 상놈, 서울 놈과 시골 놈의 분별과 계급과 세력 다툼의 감정이외다. 이것이 성하면 우리의 사업은 분리되어 영영토록 망국노의 멍에를 벗지 못할 것이외다. … [독립신문, 1921.02.25]

1921년 10월, 텐진에서 김좌진, 나중소, 박기헌, 손정도, 신규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고 국내 침투를 위해 전 병력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방향 등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을 때 이를 수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2년 4월,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임시정부가 처한 어려운 처지를 해결하자고 하였다. 이와 함께 안창호, 여운형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최선의 방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22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이시영, 조영은과 함께 정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6월 4일. 국무총리 자격으로 개조파, 창조파, 정부를 대변하는 인사들을 소집하고 국민대표회의의 향후 방향을 논의하였다. 1924년 4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으며, 새롭게 구성된 이동녕 국무총리 내각에서 군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박은식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는데, 군무총장·교통총장직을 맡게 되었다. 1925년 3월에는 대통령 박은식의 추천과 의정원이 동의하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군무·교통총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노백린은 말년에 육군 정령 제복을 즐겨 입었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1926년 1월 22일 심장질환 악화로 프랑스 조계 한 양옥에서 순국하였다. 장례는 상하이 한인 사회장으로 진행되었으며, 징안쓰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1950년 상하이 만국공묘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인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였다. 1993년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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