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문일평

문일평[文一平]

조선의 문화와 조선의 마음에 주목한 국학자

1888년(고종 25) ~ 1939년

문일평 대표 이미지

문일평 사진

공훈전자사료관(국가보훈처)

1 개요

문일평은 일본 유학 1세대이지만 전통적인 교양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근대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와 함께 전통적인 지사(志士)로서의 풍모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과도기적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申采浩)의 민족주의 역사학을 이어받았지만 조선의 문화에 바탕을 둔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학을 정립하였다. 그의 사상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조선의 마음(朝鮮心)이었다. 문일평이 말한 조선의 마음은 박은식의 국혼(國魂)이나 신채호의 국수(國粹)와 일맥상통하면서도 또 다른 특색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2 일본 유학 1세대

문일평은 1888년 5월 15일 평북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 80번지에서 문천두(文天斗)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남평으로 서북지방의 무관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름은 정곤(正坤)이었으며 족보에는 항렬에 따라 명회(明會)라고 등재되었다. 호는 호암(湖巖)이고 자는 일평(一平)이었다. 문일평이라고 하는 이름은 본래 자였던 것이다.

문일평은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며 한글은 12세 때 결혼한 세 살 위의 부인에게서 배웠다. 그는 1905년 봄 열여덟 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최광옥(崔光玉)과 같은 하숙집에 기거하면서 태극학회가 운영하는 강습소에서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당시 이 강습소의 강사는 상호(尙灝)와 장응진(張應震) 등이었다. 그는 1906년 세이소쿠학교(正則學校)에 입학하면서 하숙집을 옮겼는데 이곳에서 홍명희(洪命熹)와 이광수李光秀)를 만났다. 1907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로 불리던 보통부 3학년에 들어가 이광수와 동급생으로 함께 공부하였다.

문일평은 평안도 출신 유학생들이 조직한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평의원과 총무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06년 10월 「자유론」이란 글을 태극학회의 기관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이후 많은 글을 이 잡지에 발표하였다. 주로 자유, 진보, 문명 등에 관한 계몽적 논설이었다. 그는 세이소쿠학교와 메이지학원에 다니던 시절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는 1910년 3월 메이지학원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3 다시금 방랑의 길을 떠나다

청년 문일평은 귀국한 후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한 학기를 보냈지만, 곧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로 옮겼다. 하지만 여기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시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로 옮겼다. 당시 경신학교의 교장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였으며 교감은 김규식(金奎植)이었다. 그는 1911년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서 개설한 토요강습소에서 지리 과목을 가르쳤는데, 당시 역사 과목은 최남선(崔南善)이 담당했다. 그는 이러한 인연으로 최남선이 운영하던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문일평의 방랑은 서울에 와서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11년 미국 유학을 가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여권을 발급받기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이렇게 방황하게 된 것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이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했다. 그는 1912년 고등예과를 1년 만에 수료하고 같은 대학 정치학부에 진학하였다. 그는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역사나 문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우키다(浮田和民) 교수의 서양사 강의와 쓰보우치(坪內逍遙)박사의 문학 강의를 청강하기도 하였다.

문일평은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시절 안재홍(安在鴻),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장덕수(張德秀)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1912년 4월 조선유학생친목회에서 발행한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의 편집을 맡아 창간호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잡지에 시 「성(星)의 일 순간」, 논설 「이용설」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무렵 자신의 호를 호암(虎巖)이라고 지었다.

문일평은 단 한 학기만을 마친 뒤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에 고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상해에서 『대공화보(大共和報)』라는 신문사에 수습기자로 채용되었다. 그는 이 신문에서 일본어를 번역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하지만 그가 쓴 논설이 이 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문일평은 1913년 신규식(申圭植)·신채호·박은식 등이 주도하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상해에 머물던 시절 김옥균(金玉均)이 피살된 장소인 동화양행(東和洋行)을 방문하기도 하고 중국의 혁명당 영수인 천치메이(陳其美) 등 중국 인사들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자(莊子)와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중국에서의 생활도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1914년 봄 무렵 귀국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고향에 칩거하면서 농사를 짓는 한편 독서를 하면서 지냈다.

4 삼일운동 덕택에 세상에 다시 나오다

이렇게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문일평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3·1 운동이었다.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3월 12일 서울에 올라와 자신이 작성한 일종의 독립선언서인 「애원서(哀願書)」를 보신각에서 낭독하면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8개월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문일평은 감옥에서 출옥한 후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과 잡지에 시나 논설, 번역 등을 발표하는 등 정력적으로 문필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중동학교(中東學校)와 송도고보(松都高等普通學校)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역사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보다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1925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문학부 사학과를 청강생으로 다녔다. 하지만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귀국하고 말았다. 그는 이후 1939년 타계할 때까지 역사학자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문일평은 귀국한 후 역사 연구와 함께 언론 활동도 겸했다. 그는 중앙고보(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잠시 재직하다가 『중외일보(中外日報)』 논설부 기자로 옮겼다. 그는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출범할 때 『중외일보』 기자 자격으로 참여하여 중앙위원과 간사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는 같은 해 8월 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임되었고 기관지인 『자활(自活)』의 주필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문일평은 1928년 『조선일보(朝鮮日報)』로 옮겨 1931년까지 재직하였다. 이후 중앙고보에서 역사를 가르치다가, 1933년 동향 출신인 방응모(方應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자 다시 편집고문으로 초빙되었다. 그는 이후 1939년 타계할 때까지 『조선일보』를 통해 수많은 역사와 관련된 글들을 발표하였다. 그는 1934년부터 안재홍·정인보(鄭寅普) 등과 더불어 조선학운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 4월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5 자신만의 독특한 민족주의 역사학을 정립하다

문일평은 일본 유학을 통해서 근대 학문의 세례를 받았지만, 전문적인 학자가 되지는 않았다. 이보다는 지사이자 교육자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와세다대학을 다녔지만 제대로 마치지 못했으며 도쿄제국대학의 청강생 생활도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의 사상 형성에 있어서 대학에서 배운 근대 학문보다는 어려서부터 배운 전통적 교양이 더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격적인 학술 논문보다는 계몽적인 사론을 주로 발표하였다.

사상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1905년 1차 도일로부터 1919년까지이다. 문명개화론으로 출발하였지만 점차 그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주의 역사학을 흡수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19년부터 1927년 신간회 활동 이전까지로 신채호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세 번째 단계는 1927년부터 1939년 타계할 때까지이다. ‘조선심(朝鮮心)’과 ‘민중’을 키워드로 하는 자신만의 민족주의 역사학을 정립하였다.

당시 신채호와 안재홍 등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고대사 연구에 치중했던 반면에 문일평은 근대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민족문제를 풀어갔다는 점에서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의 정치사 서술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으로는 민중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그는 민중운동이 역사의 동력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사회주의의 영향을 직접 받지는 않았지만, 진보적 사조를 일정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6 조선의 문화에 주목하다

정인보와 안재홍 등은 1934년 다산 정약용(丁若鏞) 서거 99주년을 기념하여 정약용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면서 조선학운동을 시작하였다. 문일평도 조선학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는 조선학운동을 벌이면서 조선의 문화에 주목하였으며 그 연장선에서 조선의 마음(朝鮮心)을 강조하였다.

문일평은 정치사적으로는 한국사의 진행이 낙후되고 정체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조선 문화가 한 팔로 만주를 껴안고 다른 한 팔로 일본을 껴안아 동방 일대에 군림하였지만, 현재는 신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의 문화를 조선심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박은식의 국혼이나 신채호의 국수보다는 더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그는 조선심의 발로로서 가장 위대한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라고 하였다. 그가 훈민정음을 높이 평가한 것은 민중의 문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민족이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민중적인 문화가 발전해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민중문화의 바탕인 조선학을 잘 발전시킴으로써 민족문화를 소생시킬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