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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朴容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 무장 독립 투쟁을 꿈꾸다

1881년(고종 18) ~ 1928년

박용만 대표 이미지

박용만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머리말 : 재미한인사회의 3대 지도자

박용만(朴容萬)은 안창호(安昌浩)·이승만(李承晩)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재미한인사회를 이끌던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1905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1909년 해외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미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선구자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914년 하와이로 거점을 옮겨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을 창립하였고, 3·1운동 이후에는 러시아와 중국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독립군기지 개척과 중국 군벌과의 연대를 통한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일찍부터 국권회복 후 수립될 국가의 정체(政體)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대한제국 멸망 직후인 1911년 그가 주창한 ‘무형국가론(無形國家論)’은 한인 최초로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것으로, 당시 미주 대한인국민회를 사실상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이자 임시정부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무형국가론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제국(帝國)’이 아닌 국민이 주인되는 ‘민국(民國)’을 건설하자는 것이었고, 이 논리는 6년 후인 1917년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시에는 ‘대한민국’으로 탄생되는 배경이 되었다.

2 숙부의 영향과 청년 시절

박용만은 1881년(고종 18) 음력 윤(閏) 7월 2일 현재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中里) 109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선병(朴善秉), 어머니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이다. 본관은 밀성(密城), 호는 우성(又醒)이다.

그의 청소년 시절,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는 10살 터울의 숙부 박희병(朴羲秉, 일명 박장현朴章鉉)이었다. 그는 13살 때부터 숙부와 함께 생활한 탓에 박희병의 개화사상과 문명개화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호를 ‘우성’이라 한 것은 숙부를 닮고픈 마음에서 숙부의 호 ‘성촌(醒村)’의 앞 글자 ‘성’을 따서 자신 또한 숙부처럼 되리라 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어릴 적 숙부를 따라 상경하여 한성일어학교(漢城日語學校)를 다닌 뒤 1895년(고종 32) 관립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숙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 졸업 후 한국 개화사상 형성에 한 줄기를 이룬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정치과에서 공부하였다고 하나, 게이오기주쿠 졸업생 명단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일본 유학 시절, 숙부의 소개로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朴泳孝) 등을 소개받아 ‘활빈당(活貧黨)’과 관련을 맺었는데, 이 일로 1901년 3월 귀국 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시기 옥중에서 중국의 계몽운동가 양계초(梁啓超)에게 심취하여 ‘조선의 양계초’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출옥 후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서 활동하던 중, 1904년 6월 보안회(輔安會)에서 일본에 대한 황무지개척권 반대운동을 벌이자, 이에 참여하여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2차 옥살이를 하였다. 이때 감옥에서 이승만(李承晩)·정순만(鄭淳萬)을 만나 결의형제를 하였으니, 후일 3인의 이름 끝자인 ‘만’을 따 이른바 ‘3만’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2차 옥살이 후 숙부가 근무하고 있던 평안남도 순천의 시무학교(時務學校)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만난 제자 중에 후일 미국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창립할 때 함께 했던 유일한(柳一韓)·정한경(鄭翰景) 등이 있었고, 의형제 정순만의 장남 정양필(鄭良弼)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와 러일전쟁 등으로 이미 한국이 준식민지 상태로 전락했음을 간파한 그는 해외 망명의 길을 택하였다.

3 미 대륙에서 중국대륙까지,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다

1905년 2월 미국에 도착한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군사학교 설립이었다. 1908년 1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Denver)에서 그는 애국동지대표자회 개최를 제안하였고, 그에 따라 7월에 정식으로 회의가 열렸다. 이승만·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한 국내외 대표 36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이 회의에서는 국내외 통일기관 조직, 각지에 통신국 설치 및 연락 등을 의결하는 한편, 그가 주장한 둔전병제(屯田兵制)에 바탕한 군사학교 설립안을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그는 1909년 6월, 네브라스카주 커니(Kearney)에서 해외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창립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914년 샌프란시스코 일본총영사관 측에서 소년병학교의 편의를 제공한 헤이스팅스대학에 한인의 군사훈련에 대해 항의하자, 결국 1914년 여름 6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한인소년병학교는 이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도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1910년대 미주·하와이·멕시코 한인사회에 군인양성운동을 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후 1912년 12월 하와이 한인사회의 요청으로 북미에서 하와이로 거점을 옮겨 1년 동안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제도 확립에 주력하는 한편, 재차 군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13년 1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鍊武部)에서 추진하던 군인양성운동을 기반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하와이군사령부로부터 설립 인가받고 1914년 6월 오아후(Oahu) 카훌루(Kahuluu)에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과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을 창설하였다. 국민군단은 사령부로서 모든 한인 독립군을 총괄하려는 목적이었고, 사관학교는 군단의 핵심이 될 사관양성기관으로 설치된 것이었다. 그러나 1915년 여름 연합국 일원이던 일본이 미국 국무장관에게 대조선국민군단의 군사훈련 중지를 강력히 요청하자, 1917년경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박용만의 국민군단 활동은 러시아와 중국으로 거점을 옮기게 된다. 1919년 2월 하순, 3·1운동이 일어날 것을 전해들은 그는 3월 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하와이지부를 조직하였다. 이는 하와이를 비롯하여 국내와 중국·러시아 등 한인이 거류하는 지역에 독립군단을 설치한 후 이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함이었다. 대조선독립단 설립 직후 5월 하와이를 출발한 그는 8월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조성환(曹成煥) 등과 만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국민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총사령에 조성환, 자신은 총참모로 취임하였다. 이어 이동휘(李東輝) 등을 만나 하와이 대조선독립단(大朝鮮國民軍團)을 비롯하여 국내 및 해외 각지에 국민군을 확대·조직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먼저 평안북도 태천(泰川)에 국민군을 조직하려고 시도하였으나, 1920년 2월 말 조직이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이처럼 일제의 탄압과 자금 부족 등으로 국내와 러시아 지역내 국민군단 설립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를 떠나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거점을 옮겨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8월까지 러시아내 한인세력 중 독자적 군사세력화 할 수 있는 이동휘의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계열과 문창범(文昌範)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세력과 연합하여 군사적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각 그룹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편성하는 바람에 통합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그는 1920년 9월 베이징에서 국내를 비롯한 서북간도·러시아의 한인대표를 소집하여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개최하였고, 1921년 4월에는 임시정부를 제외한 만주지역 군사단체를 통일하는 군정부를 만들기 위해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국내를 비롯하여 하와이·북간도·서간도·러시아 등지에서 10개 단체 대표가 참석하여 군사단체 통일과 군사상 총기관 설립을 의결하였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도 수립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러시아정부의 지원 불이행, 1921년 6월 발생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600여명의 독립군이 전사·행방불명된 점, 한인공산당 세력의 비협조 등으로 인해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4 제국에서 민국으로-임시정부를 향한 그의 꿈

1905년 미국으로 건너오면서부터 그는 줄곧 군사학교 설립과 더불어 국민주의에 입각한 임시정부 수립을 열망하였다. 이에 대한인국민회에서 1911년 1월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로 그를 초빙하자, 그는 자신이 주필 취임을 허락한 것은 ‘무형국가(無形國家)’를 조직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가 밝힌 ‘무형국가’란 임시정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해외 한인을 통일하고 결속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정치적으로 복종시켜 무형국가(無形國家) 또는 가정부(假政府)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조선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무형한 국가를 먼저 설립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임시정부건설론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건설론이 여론의 반대에 부딪치자, 그는 방향을 전환하여 대한인국민회를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 결과,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선포식이 결행되었다. 그가 기초(起草)한 결성 선포문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자치제도를 실시할 것”, “각지에 있는 해외 동포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도를 받을 의무가 있으며 대한인국민회는 일반 동포에게 의무 이행을 장려할 책임을 갖을 것”이라고 하여 사실상 대한인국민회를 한인의 대표기관으로 설치하려던 그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1910년대 초반 대한인국민회는 러시아와 만주를 비롯하여 북미·하와이·멕시코 등지에 116개의 지방회를 조직하는 등 사실상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점차 국민회 회원들도 중앙총회를 임시정부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중앙총회 결성선포문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민주주의국가’로 발흥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는 근왕주의(勤王主義)를 청산하고 공식적으로 공화주의(共和主義)를 표명한 최초의 선언으로, 개항 이래 추진되어왔던 근대 국민국가 수립 노력이 처음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공화주의 선언은 1917년 그가 서명자 중 1인으로 참여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과 1919년 3·1운동을 거쳐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대한민국’으로 태동하는 틀을 마련하였다.

공화주의에 대한 그의 꿈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선임된 박용만은 임시정부에 취임하지 않고 군사주의에 입각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임시정부로부터 비판을 받자, 1920년 3월 말 상하이로 가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취임할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임시정부와 결별하였다. 이는 박용만이 대미(對美) 위임통치(委任統治)를 청원한 이승만과 그를 묵인한 임시정부를 못마땅하게 여긴 탓이었다. 이에 1921년 4월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한 박용만은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모두 불승인하는 한편,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조선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천명하였다. 박용만 등 군사통일회의 참여 인사들은 1921년 11월 베이징에서 대통령에 이상룡(李相龍), 국무총리 신숙(申肅), 외무총장 장건상(張健相), 학무총장 한진산(韓震山), 내무총장 김대지(金大池), 재무총장 김갑(金甲), 군무총장 배달무(裵達武), 교통총장 박용만을 선출하여 발표하였으나, 정식 발족하지는 못하였다.

5 독립군기지 개척과 의문의 죽음

1922년 이후 박용만은 둔전병제에 입각한 독립군기지 개척과 중국군벌과의 연계한 독립투쟁을 모색하였다. 베이징 인근 석경산(石景山)에 농장을 마련하여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극심한 자금난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중국 군벌과 하와이의 대조선독립단으로부터 군자금 모집과 더불어 독립군기지 건설에 동분서주하였다.

1926년 그는 만일 미국이 중국 군벌 우페이푸(吳佩孚)를 원조해서 그가 세력을 얻으면 장쭤린(張作霖)을 협공하여 궁극적으로는 만주지방에 또 하나의 조선국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구상하였다. 박용만은 이를 미국 측에 전달하였으나, 미국의 거절로 이 계획 또한 실현되지 못하였다. 1년간 하와이에 머물다 1926년 6월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하와이에서 모금한 돈으로 베이징 부근의 땅을 구매하여 대륙농간공사(大陸農墾公司)를 설립하고 영정하(永定河) 부근에서 수전(水田)을 경영하였다. 또한 베이징의 숭무문(崇武門) 밖에서 소규모의 정미소를 설립하여 부근 수전에서 나오는 벼를 사들여 수만 석의 정미를 만들기도 하였으나 뜻처럼 성공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1928년 10월 17일 대륙농간공사로 2명의 청년이 찾아왔다. 그들은 박용만에게 1천원의 자금을 요구하였고, 이에 그는 농장의 형편을 설명하며 거절하였다. 이때 그들은 권총을 뽑아 그를 쏘아 절명시켰다. 그중 1인은 이해명(李海鳴)이었다. 이러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24~5년경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진영에 유포되었던 박용만의 국내 밀입국설과 조선총독 밀회설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소문의 실상은 이러했다. 김현구(金鉉九)가 쓴 『우성유전(又醒遺傳)』에 의하면, 박용만은 1924년 말경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사절단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였다 한다. 펑위샹이 득세하자, 박용만은 펑위샹의 세력기반이자 일본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내몽고에서 한인에 의한 둔전병 양성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매료된 펑위샹은 3인의 밀사를 일본관동군과 조선총독부에 파견하였다. 파견 목적은 내몽고에 둔전을 개척하는 것은 러시아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본에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박용만은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밀사 3인 중 한 사람으로 조선에 밀입국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결국 독립운동진영으로부터 친일파 또는 밀정으로 오인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암살되었다는 것이 당시에도 나돌았다.

이처럼 박용만은 광복사업을 일생이 아닌 영원한 사명으로 삼고 있었으며, 독립 또한 내정자치나 위임통치가 아닌 무장투쟁을 통한 완전한 독립을 꿈꾸었다. 그리고 무장독립투쟁을 하기 위해서 만주·시베리아·몽고 등 형편이 닿는 곳에 한인을 이주시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사망 직전인 1928년 중국국민군의 옌시산(閻錫山) 장군이 베이징에 입성하자, 그는 옌시산 장군에게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청원서를 작성해 놓았다. 그러나 예기치 않던 죽음으로 그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여하튼 이해명의 군자금 모집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인 살인은 한국독립운동계에 너무도 큰 손실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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