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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裵說]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한국인의 벗이 되다

1872년 ~ 1909년

베델 대표 이미지

27세 때 배설의 모습

배설선생기념사업회

1 대한민국의 건국훈장을 받은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裴說)은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언론인이다. 그는 1904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여 일제 침략을 비판하는 보도를 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일제의 집요한 추방 공작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몸과 마음에 치명적인 병을 얻어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대한민국은 1968년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追敍)하였다.

2 한국에 오기까지(출생부터 1904년까지)

베델은 1872년 11월 3일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톨(Bristol) 북부지역에 위치한 애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핸콕 베델(Thomas Hancock Bethel)은 양조회사 서기, 회계원 등을 지내다가 런던으로 이사한 후 극동지방을 상대로 하는 무역상을 경영한 인물이다. 베델은 1885년부터 이듬해인 1886년까지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Merchant Venturers School)을 다녔다. 이 학교는 당시 브리스톨의 상인조합이 운영하던 실업전문학교였으며 뒷날 브리스톨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아버지 토마스 핸콕이 아들에게 경제적으로 자립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 학교에서의 학창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1886년 아버지 토마스 핸콕는 일본에 건너와 니콜(P. A. Nicoll)이란 인물과 함께 고베 외국인 거류지 42번지에 니콜사(Nicoll&Co)를 차리고 무역업을 시작하였으며 1888년에는 아버지가 런던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가 일본으로 건너와 아버지의 동업자인 니콜의 일을 도우면서 상업 실무를 익히기 시작했다. 1896년에는 아버지가 여러 무역업자들과 힘을 합쳐 무역회사 프리스트(Priest), 마리안(Marians), 베델(Bethell), 모스앤코리미티드(Moss & Co Limited)를 차리자 이 회사의 고베지점을 운영하면서 실무 경험을 넓혀가기 시작했으며 1899년에는 아우 허버트(Herbert)와 함께 ‘베델 브러더스 무역상’을 설립하여 상업에 종사했다. 이 회사는 고베와 요코하마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는데 베델은 고베에서, 아우 허버트는 요코하마에서 활동했다.

1900년에는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과 결혼하여 외아들 허버트 오웬(Herbert Owen)을 낳았으며 무역업 이외에 고베에 양탄자(rug)를 만드는 공장을 설립하는 등 사업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같은 업종의 일본인 경쟁회사의 방해와 거듭된 소송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업은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결국 1904년 한국에 오기 직전에는 양탄자 회사는 거의 파산상태에 직면했으며 고베의 무역에도 손을 뗀 상태였다. 베델은 무언가 획기적인 돌파구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러일전쟁은 서양 각국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여러 매체들은 취재진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여가 지난 3월 10일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별 통신원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본국에서 정규 취재진을 파견하기 앞서 현지에 거주하고 있고 현지어가 가능한 베델을 급파한 것이다. 유럽에서 온 취재진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이보다 한 달여가 흐른 4월에 들어서였다.

그가 『데일리 크로니클』에 송고한 기사로는 4월 16일자에 실린 ‘Korean Emperor's Palace in Ruins[폐허가 된 경운궁]’이란 기사가 확인된다. 이 기사는 4월 14일에 경운궁에서 발생한 화재를 다룬 것인데 그는 이 기사에서 경운궁에서 화재가 일어난 것은 일제의 방화 때문인 것으로 의심된다고 썼다. 공교롭게도 이 기사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특종 기사가 되었다. 이 기사가 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데일리 크로니클』에서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베델은 훗날 해임 사유에 대해 『데일리 크로니클』은 일본에 우호적인 편집 방침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그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해고된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3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베델은 『데일리 크로니클』에서 해임된 지 약 3개월 뒤인 7월 18일 국문판인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인 The Korea Daily를 창간하는 것을 통해서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베델과 마찬가지로 『데일리 크로니클』 통신원이었던 토마스 코웬(Thomas C. Cowen)과 양기탁(梁起鐸)이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에 함께 참여하였다. 영문판은 원래 The Korea Times라는 제호로 창간하여 제1호를 발간한 후 The Korea Daily News로 개제하여 발행되었다. 창간 초기에는 한 호에 국문판과 영문판을 함께 찍는 이중언어 방식을 취하다가 뒤에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별도로 발행하였다. 과거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행할 때도 바로 이러한 방식을 취했었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 창간 당시 고종의 자금이 여기에 흘러들어간 것으로 의심했다. 하지만 베델은 창간 당시 순수하게 자기 자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창간 당시에는 자체 인쇄시설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고정비용이 그리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창간 초기 『대한매일신보』의 인쇄는 당시 헐버트(Hulbert)가 책임자로 있던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를 통해서 인쇄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8월 11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는 『대한매일신보』와 The Korea Daily News라고 하는 두 개의 신문이 따로 발행되기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이 무렵 또 하나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국문판에 국한문을 혼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한문판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의 지사들을 영입하였다. 여태까지 『대한매일신보』는 한국에 거주하던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한 영문판에 중점이 두어졌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국내 지식인들의 여론과 동향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대한매일신보』의 반일적인 논조도 더욱 강해졌다. 황현(黃玹)이 지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인의 악행을 게재하여 들으면 들은 대로 폭로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신문을 구독하여 한때 품귀상태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907년 1월 고종이 영국의 『런던 트리뷴(London Tribune)』을 통해 자신이 을사늑약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칙서의 형식으로 알린 바 있는데 중간에 연결고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베델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당시 같은 내용이 『대한매일신보』에도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베델이 세운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일개 평범한 신문사가 아니었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 이외에도 신민회(新民會)의 산파 역할을 맡았으며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귀국한 임치정(林蚩正)은 대한매일신보사의 회계사무를 맡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대한매일신보』가 독립운동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매일신보사는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도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사의 사장 자격으로 의연금 관리에도 관여하였다. 이것이 후일 그에 대한 일제의 추방공작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4 집요했던 일제의 추방공작

일제는 베델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초기부터 베델을 의심하고 있었다. 창간을 위한 자금도 고종 황제의 비자금 중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창간 이후 『대한매일신보』의 논조가 반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를 견제하였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당시 서울에서 영국인 하지(J. W. Hodge)가 발행하고 있던 영문 주간지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대한매일신보』에 대항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에게 베델의 추방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당시 영국 정부는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본 측 요청을 대놓고 무시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1월 16일에 영국 『트리뷴』지에 을사늑약을 부인하는 고종황제의 칙서가 게재되면서 베델에 대한 추방 공작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국에서 릴리라고 하는 영국인이 신문을 발행하다가 추방당한 사례가 검토되기도 하였다. 베델에 대한 추방공작이 본격화된 것은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한일신협약이 체결된 이후부터이다. 일제는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내부 고시를 통해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발매 금지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영국 사법당국에 고소하여 베델로 하여금 두 차례에 걸쳐서 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에 있었다. 재판은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관에 설치된 법정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베델에게 적용된 혐의는 치안 방해였다. 재판 결과 베델에게 6개월 근신을 명하고 이에 대한 보증금으로 3,000원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압박을 가했음에도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러자 일제는 베델에게 치안 방해라는 기존의 주장에다가 공금횡령의 혐의까지 뒤집어 씌워 다시 고소하였고 베델은 또 다시 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공금횡령이란 국채보상운동의 과정에서 모아진 의연금을 베델이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이 재판은 1908년 6월 15일부터 3일 동안 열렸는데 재판 결과 베델에게는 3주간의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이 판결에 따라 베델은 영국 군함 클리오(Clio)호에 실려 상해로 호송되어 그곳 영사관에 설치된 감옥에 수감되었다.

5 베델의 마지막 모습

베델이 형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 7월 5일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베델은 심신이 매우 쇠약해진 상태였다. 귀국 즉시 『대한매일신보』 사장직을 동료인 만함(萬咸, Alfred W. Marnham)에게 넘겼으며 이듬해인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원인은 심장병이었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楊花津)에 안장되었으며 5월 5일 그를 기리는 추도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양기탁, 안창호, 심의성(沈宜性), 여병현(呂炳鉉) 등 여러 사람들이 참석해서 추도사를 낭독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감동을 준 인물은 안창호였다. 안창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추도사를 낭독하자 부인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그에게서 『대한매일신보』를 넘겨받은 만함은 그가 사망한 지 1년여가 지난 1910년 5월 이 신문을 일제에 7000원을 받고 넘겨버리고 말았다. 일제는 이 신문의 제호에서 ‘대한’이란 글자만 떼어버린 『매일신보』란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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