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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범[徐光範]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 앞장선 청년 정치가

1859년(철종 10) ~ 1897년(고종 34)

서광범 대표 이미지

서광범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중 한 명이었던 오세창(吳世昌)은 자신의 아버지 오경석(吳慶錫)이 일찍이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북촌(北村)의 양반 자제들 가운데 동지를 구해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려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서광범은 바로 오경석이 키우려 한 북촌 양반 자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들 북촌 양반 자제들은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개화당(開化黨)을 구성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킨 바 있다. 개화당의 정치적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10년 뒤 다시금 근대 개혁을 시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갑오개혁이다.

2 북촌 명문가의 도련님

서광범은 1859년 11월 8일 이조참판을 지낸 서상익(徐相翊)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서구(敘九)이고 호는 위산(緯山)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서용보(徐龍輔)가 순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5대에 걸쳐서 규장각 관원을 배출할 정도의 명문가였다. 그와 함께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徐載弼)은 13촌에 해당하는 먼 일가였다. 어머니는 반남박씨로서 외조부 박제완(박제완)은 생원에 그쳤지만, 외가 쪽 조상들도 대대로 영의정과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명문가였다.

서광범은 성장하면서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와 같이 북촌에 거주하는 명문가 자제들과 어울렸다. 이들 북촌 양반 자제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을 들 수 있다. 박규수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서 북학(北學)에 뿌리를 둔 현실적이고 개방적인 사상을 북촌 양반 자제들에게 가르쳤다. 훗날 박영효는 개화파의 신사상은 모두 재동 박규수 대감집 사랑방에서 나왔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오경석은 당시 역관(譯官)으로 세계의 정세에 밝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펴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촌의 명문가 자제들 가운데 동지를 구해 이들을 통해 이른바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서광범도 이러한 북촌의 명문가 자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3 세 차례에 걸친 외국 출장

서광범은 1880년 치러진 증광시(增廣試,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과거)에서 21세의 나이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는 명문가 출신이었던 만큼 과거에 급제한 후 승문원부정자, 규장각대교, 홍문관부수찬, 승정원동부승지, 참의군국사무 등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승승장구하였다.

서광범은 관직 생활 초창기에 외국 출장이 잦았다. 그는 1882년부터 1884년까지 3년 동안 모두 세 차례 외국 출장을 다녀왔다. 첫 번째 출장은 1882년 1월 고종의 밀명으로 일본에 파견된 김옥균을 수행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발행되던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은 김옥균이 일본 주재 영사를 맡을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당시 고종은 김윤식(金允植)을 영선사(領選使)로 중국에 보내 새로운 문물을 배워오도록 했던 것처럼, 김옥균도 일본에 상주하도록 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옥균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급히 귀국해야만 했다. 이것으로 서광범의 첫 번째 외국 출장이 막을 내렸다.

서광범은 귀국한지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아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야만 했다. 1882년 8월 박영효를 정사(正使, 대표를 맡은 사신)로 하고 김만식을 부사(副使)로 하는 제3차 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종사관으로 이 사절단에 참가하였다. 제3차 수신사는 임오군란으로 비롯된 일본과의 외교 문제를 마무리짓기 위한 사절단이었다. 그런데 고종의 특명을 받은 김옥균이 이 사절단과 동행하였다. 박영효를 비롯한 수신사 일행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서광범이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남은 것으로 미루어 그의 실제 임무는 김옥균을 보좌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옥균의 임무였던 차관 도입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는 1883년 3월 김옥균과 함께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서광범은 1883년 6월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다시금 외국 출장에 나섰다. 보빙이란 답례로 보내는 외교 사절을 의미하며, 서광범은 조미조약이 체결된 것에 대한 답례 형식으로 미국에 파견된 것이다. 보빙사의 정사는 민영익(閔泳翊)이었고 부사는 홍영식이었으며 그는 종사관(從事官)을 맡았다. 보빙사 일행은 1883년 6월 조선을 출발하여 미국과 유럽을 순방한 후 이듬해인 1884년 6월이 되어서야 귀국하였다.

이렇게 서광범의 초창기 관직 생활은 잦은 외국 출장으로 채워졌다. 처음 일본에 건너간 1882년 1월부터 미국에서 유럽을 거쳐 귀국한 1884년 6월까지 약 2년 5개월 가운데 국내에 있었던 기간은 채 반년이 넘지 않는다.

4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간 갑신정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사건을 신호탄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은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 등 일군의 청년 정치가들이었다. 당시 이들을 개화당이라고 불렀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은 젊었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은 김옥균만이 30대였다. 홍영식은 29세였으며 서광범은 25세였다. 박영효는 서광범보다도 두 살 아래였다. 이들은 박규수와 오경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항 초기 외교 활동을 주도하면서 정치적으로 결집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었다.

개화당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후 이른바 혁신내각을 구성하였는데 서광범은 좌우영사 겸 우포도대장(左右營使兼右捕盜大將)과 대리외무독판(代理外務督辦)을 맡았다. 군사력과 경찰력 등 신정부의 물리력을 그가 한 손에 틀어쥔 것이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청 군대의 신속한 개입으로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광범은 김옥균·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하였다. 홍영식만이 국왕의 곁을 지키고 있다고 목숨을 잃었다. 서광범을 비롯한 개화당의 남은 가족은 수난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의 아버지 서상익은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서광범은 일본 정부의 냉대 때문에 서재필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가 그의 미국 망명을 주선하였다. 그는 미국 동부의 뉴욕과 뉴저지 등지에서 거주하였으며. 1892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미 연방정부의 교육국에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취직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미국식 이름은 케네스 서(Kenneth Suh)였다.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잡지에 「조선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민담(Korean Stories)」이라는 글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5 10년만에 귀국하여 갑오개혁에 뛰어들다

서광범은 망명의 길을 떠난 지 10년만인 1894년 귀국하였다. 국사범(國事犯, 국가 자체를 위협하는 범죄행위 또는 행위의 주체)이었던 서광범의 귀국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 조정에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서광범과 박영효등 이른바 갑신파를 투입하려 하였다. 고종도 흥선대원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의 귀국과 복권을 허락하였다.

서광범은 1894년 12월 수립된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법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였다. 그의 동료 박영효는 내부대신이 되었다. 서재필은 이로부터 약 1년 뒤에 귀국하였는데 서광범과는 달리 미국 시민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재필은 중추원고문에 임명되는데 그쳤고 대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정부 바깥에서 활동하였다.

갑오개혁은 1894년 연말에 이르러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이것을 제2차 갑오개혁이라고 한다. 제2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것은 서광범과 박영효 등 갑신파였다. 박영효가 내부대신으로서 행정개혁을 시도했다고 한다면, 그는 법부대신으로서 사법제도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서광범은 재판소구성법을 제정하여 사법을 행정에서 분리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법관양성소도 설치하였다. 그는 재판소구성법에 따라 설치된 고등재판소의 재판장을 겸하였다. 그는 고등재판소재판장으로 조병갑(趙秉甲)과 조병식(趙秉式) 그리고 조필영(趙弼永) 등 동학농민전쟁의 불씨를 제공한 탐관오리들을 엄하게 처벌하였다. 동시에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華仲)·최경선(崔景善)·김덕명(金德明) 등 동학농민전쟁을 일으킨 주역들에게도 사형을 선고하였다.

6 정치적 암투에 휘말리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서광범이 귀국하여 법부대신으로 입각한 것 자체가 고종과 흥선대원군 그리고 일본 사이의 정치적 암투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이러한 정치적 암투에 휘말려야만 하였다. 그 시발점이 된 사건이 바로 이준용(李埈鎔) 사건이었다.

이준용은 흥선대원군의 장손으로 고종에게는 조카였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을 몰아내고 대신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준용이 1895년 3월 김학우(金鶴羽)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었다. 갑오개혁 당시 법부협판이었던 김학우는 1894년 10월 자객에 의해서 암살된 바 있다. 이준용이 그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된 것이다. 서광범은 특별재판소 재판장으로 이준용에게 극형(極刑)을 선고하였다. 이준용은 고종이 감형하여 준 덕택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놓고 고종이 서광범과 박영효 등 갑신파와 손잡고 흥선대원군 세력을 견제하려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정국은 1895년 7월 다시 한번 소용돌이쳤다. 이번에는 내부대신 박영효가 왕비를 살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박영효가 실제로 왕비를 살해하려고 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시 박영효는 일본의 요구와 청탁을 거절한 까닭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공사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고종도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 세력에 의지하기 시작하면서 박영효의 정치적 가치가 줄어들었다. 박영효가 축출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암투의 결과물이었다. 박영효는 쫓겨났지만 서광범은 이후에도 법부대신 자리를 그대로 지켰다. 하지만 이후 그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암투는 결국 을미사변이라고 하는 비극을 초래하고야 말았다. 일본이 낭인을 동원하여 궁궐을 습격하여 왕비를 살해한 것이다. 서광범은 이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도 그는 법부대신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학부대신서리까지 겸직하면서, 왕비를 폐위하는 조칙에 서명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적 때문에 을미사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7 자의 반 타의 반 미국으로 떠나다

서광범은 1895년 12월 법부대신 자리에서 물러나 미국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다. 이것을 놓고 그가 당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내각에서 축출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윤치호(尹致昊)는 당시 자신의 일기에 그가 미국 주재 공사로 가는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는 아마도 왕비를 폐위한 조칙에 서명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미국으로 떠난 셈이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개화파 내각은 붕괴되었다. 그 여파는 태평양 건너 미국에도 몰아닥쳤다. 그는 곧바로 공사직에서 해임되었다. 대신 이범진(李範晉)이 신임 공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해임된 뒤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다시 망명자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그는 지병이었던 폐병이 악화되어 1897년 7월 17일 숨을 거두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아직 마흔을 넘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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