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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徐載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주도하다

1864년(고종 1) ~ 1951년

서재필 대표 이미지

서재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머리말

서재필(徐載弼)은 1864년 1월 1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 있는 외가에서 아버지 서광언(일명 서광효)과 어머니 성주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가담했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학사가 된 서재필은 1895년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운영하고 독립협회 활동을 했으나, 곧 미국으로 돌아가 평생 미국에서 생활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도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와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2 갑신정변 참여와 미국 망명 후 의학 공부

출생 후 서재필은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에서 성장하였다. 그 후 서재필은 대덕군에 살던 칠촌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의 양모 안동 김씨의 동생인 김성근의 서울 집에 보내져 그곳에서 공부하며 유년을 보냈다. 서울에서 서재필은 김옥균(金玉均), 서광범, 박영효 등과 교류하면서 외국의 사정과 근대적인 지식을 접하게 되었으며, 개화승(開化僧) 이동인 등과 접촉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꿈꾸게 되었다.

서재필은 1882년 중궁(中宮)의 병환이 나은 것을 경축하기 위해 실시한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병과(丙科)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국방을 충실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김옥균의 권유를 받고 일본에 건너가서 군사학을 배울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다른 생도 14명과 함께 1883년 5월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개화파 핵심인물들의 시종(侍從)이었기 때문에, 서재필은 유일한 양반관료로서 이들의 대표를 맡았다. 게이오(慶應)의숙에서 6개월 간 일본어 교육을 받은 후 육군 도야마(戶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군사훈련 7개월 만인 1884년 7월 국내의 정치적 사정과 재정적인 이유로 귀국 길에 올랐는데, 당시 그들은 ‘사관생도’라고 불리었다.

귀국 이후 서재필은 1884년 10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갑신정변 준비 과정에서 일본 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무라가미(村上) 중대장 간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거사 당일 정변 참가자들은 모두 서재필의 집에서 회합을 가진 후 정변을 일으켰다. 당시 김옥균과 서재필의 집은 이웃 간이었다고 한다. 갑신정변 직후 서재필은 비록 사흘에 불과했지만 신정부의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결국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그는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는 역적으로 낙인찍혔으며 그의 부모, 처, 형은 음독자살하였고 두 살 된 어린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아사(餓死)하였으며, 그의 동생 재창은 체포되어 참형되었다. 결국 멸족이 화를 입은 것이다.

일본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일본의 냉대를 견디다 못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서재필은 일행들과 헤어져 독자적인 생활을 하였다. 서재필은 품팔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영어를 배웠다. 이렇게 시작한 서재필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그의 사상과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어렵게 생활하던 서재필은 교회에서 사귄 친구의 집에서 홀랜백(J. W. Hollenback)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펜실바니아(Pennsylvania) 윌크스 배리(Wilkes Barre)에서 탄광을 경영하던 사람으로 해리 힐맨 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의 이사였다. 서재필은 홀랜백의 도움으로 1886년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n)으로 바꿨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서재필은 학비조달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는 1888년 1월 워싱턴으로 갔다. 이곳에서 데이비스(Davis) 교수가 소개해 준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오티스(Otis)를 찾았다. 오티스는 그와 친분 관계가 있던 육군 군의 사령부 도서관장인 존 빌링스(John Billings)를 소개시켜 주었다. 당시 사령부 도서실에는 중국과 일본의 많은 의학잡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서재필은 일본어와 중국어 시험을 통과하여 이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빌링스는 당시 50세로 육군 군의관 중령이었는데, 그는 서재필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그는 서재필이 의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줬다. 또한 서재필도 의학도서들을 정리하면서 관련 지식을 풍부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1888년 가을 워싱턴의 콜롬비아대학 야간부인 코크란 단과대학(Corcoran Scientific School)에 입학한 서재필은 1년을 전공 없이 주로 자연과학을 배웠고, 이듬해 가을학기에 3년제였던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92년 3월에 콜롬비아 의대를 졸업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서양 의학사 학위를 얻었다. 의학 공부를 하면서 서재필은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또 1890년에는 완전히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서재필은 대학 졸업 후 가필드병원에서 1년간 인턴으로 생활하면서, 빌링스 박사의 도움으로 계속 박물관에서도 근무하였다. 박물관 근무 과정에서 서재필은 군의관 월터 리드(Walter Reed)를 알게 되었다. 월터 리드는 빌링스가 여러 우수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볼티모어에 미국 최고의 의과대학을 창설하자 그곳에 초빙되었다. 서재필은 리드 박사가 소장으로 있는 의학연구소에서 조수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병리학과 세균학 연구를 하였다.

3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활동

서재필은 1894년 6월 미국 여인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결혼하고, 결혼 직후 개업을 하였지만 인종차별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 서재필은 워싱턴에서 살면서 주미 조선공사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는 주미 조선공사관으로부터 조선의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재필은 주미 조선공사관의 방 하나를 무료로 빌려 생활하였으며 식비까지 지원받았다. 그리고 1895년 11월 주미 조선공사관으로부터 여비는 물론 양복까지 제공받으며 조선으로 귀국 길에 올랐다.

훗날 서재필은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고 회고했으나, 당시 조선의 김홍집 정권이 1895년 11월 9일자로 서재필을 주미 공사관의 3등서기관에 임명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정부에서 그의 귀국을 권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서재필은 1895년 11월 미국을 떠나 12월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조선인이 아니라 ‘미국인’ 신분으로 외국인 거주 지역에 기거하면서, 10년 계약에 월봉 300원을 받는 중추원 고문에 취임하였다. 당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서재필로 쓴 적이 없었고, 제손 박사 또는 피제선(皮提仙)이라고 하였다. 또한 『독립신문』에 글을 쓰면서도 미국의 이미지를 우호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미국식 풍습을 모범으로 조선인들에게 생활개량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독립신문』 창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 창간 작업을 서재필에게 맡겼다. 서재필은 자신의 회고에서 『독립신문』의 모든 논설을 자신이 썼다고 주장했으나, 영문판의 경우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국문판은 주시경 등 다른 인물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서재필은 언론 활동과 함께 독립문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로 조직되었으나 점차 정치단체로 변모하고 있던 독립협회 조직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헐린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모금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여 독립문을 건립하고,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축하는 등의 대중 활동을 벌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미, 친러 정권이 수립되자 서재필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새로운 조선 정부는 『독립신문』의 토지 및 건물, 개인주택 구입비 등을 부담하면서도 이 신문을 서재필 개인 소유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해줬다. 또 서재필이 신문 담당 관서인 농상공부(農商工部)의 임시 고문직을 겸하도록 배려했다. 그밖에도 조선 정부는 학부(學部)를 통해 각급 학교의 생도들에게 신문을 구독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내부(內部)에서는 각 지방 관청에 구독을 명령하는 동시에 우송상의 혜택까지 부여하였다.

이렇듯 애초 『독립신문』은 신정부의 기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서재필 역시 명시적으로 『독립신문』을 정부대변지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고, 실제로 초기에는 신문을 통해 반일(反日), 친로(親露)적인 색채를 띠고, 정부의 시책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동, 즉 러시아의 만주침략과 조선 침투정책은 서재필의 입장을 반정부, 반러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에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러시아의 대한정책을 포함한 동아시아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정책변화는 미국의 이해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러시아와 친러적인 신정권은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결국 서재필은 남은 계약 기간 7년 10개월분의 봉급 28,200원을 모두 받는 조건으로 1898년 4월 다시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단, 여기서 『독립신문』의 창간 비용은 공제되었다.

4 3·1운동 직후 미국에서의 독립운동과 해방 후 정치활동

미국으로 돌아간 후 서재필의 모습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다. 서재필은 회고를 통해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에 군의관으로 종군했고 전쟁이 끝난 후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해부학을 가르쳤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1904년 윌크스배리(Wilkes-Barre)에서 디머라는 사람과 디머 앤드 제이슨 상회(Deemer and Jaisohn Company)를 세웠다가, 이듬해에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자리를 옮겼고, 1914년부터는 단독으로 필립 제이슨 상회(Philip Jaisohn Company)를 1924년까지 운영하였다. 이 가게는 인쇄업과 함께 각종 장부를 취급하는 한편 사무실용 각종 장부를 파는 곳이었는데, 한때 번성하여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본점을 두고 두 곳의 분점을 운영할 만큼 성장했다.

비록 미국 시민으로 돌아간 서재필이었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1919년 식민지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서재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과 여론 선전 활동에 적극 나섰다. 우선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기독교 예배 형식으로 필라델피아 시내의 목사, 교수들을 초청하여 연설을 듣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또 행사 직후에는 퍼레이드를 하기도 하였다. 서재필은 자신이 오랜 미국생활에서 경험한 미국적인 방식의 운동을 통해 미국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이 대회의 결과 한국통신부(Korean Information Bureau)가 만들어졌다. 이 부서는 원래 대회 결의에 의하면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이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승만이 워싱턴으로 떠나버려 서재필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 부서는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잡지, 책자를 발행하여 미국 내 지방순회 강연 때 홍보책자로 활용하였다. 또한 서재필은 이 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친우동맹(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을 병설하여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1920년과 1921년 3·1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열기도 하였다. 또한 이승만이 위원장을 맡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부위원장을 맡아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군축회의(태평양회의)에 조선 문제를 상정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실망한 서재필은 경제난을 이유로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 활동을 일체 정지하고 말았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서 좌절을 맛본 서재필은 다시 의학에 매진하였다. 1926년 9월 펜실바니아 대학 의학부 특별학생으로 등록하여 세균학, 병리학, 면역학 등의 강좌를 수강하였다. 이와 동시에 종합병원에서 여러 가지 실험과목도 경험하였다. 당시 서재필은 가정을 돌볼 수 없는 경제적 곤궁 속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928년 서재필은 집을 저당 잡힌 돈으로 펜실바니아대학 의과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929년 병리학 전문의 자격을 얻었다. 이후 서재필은 1930년에서 1934년까지 필라델피아 서부에 있는 리딩(Reading)을 비롯한 몇몇 병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하지만 1929년부터 불어 닥친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서재필은 폐결핵까지 걸려 상당 기간 고생하였다. 1935년 펜실바니아 체스터 병원에서 외래 환자를 돌보면서 동시에 피부과 과장으로 일하던 서재필은, 다음해 그의 거처인 필라델피아 메디아에서 개업을 하였고, 점차 병원 경영이 호전되면서 그 지방에서 유력한 의사 및 의학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당시 서재필은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은 계속 갖고 있었다. 그는 1920년대와 30년대 국내에서 발행된 『동광(東光)』〉 『신민(新民)』, 『삼천리(三千里)』, 『동아일보』 등에 민족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에 입각하여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글을 종종 보내기도 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이 전쟁에 뛰어들자,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징병 검사관으로 활동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 항복하면서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해방된 한국은 곧바로 독립되지 못하고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을 당했다. 38선 이남 지역을 점령한 미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한반도 남쪽에 군사정부, 미군정청(美軍政廳,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을 수립했다. 미군정은 처음에 우파 정치인 중 가장 핵심인물이 할 수 있는 이승만과 김구를 앞세워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1945년 말부터 시작된 신탁통치 파동 과정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자신의 뜻에 맞춰 움직이지 않자, 미군정은 미국에 있던 서재필을 귀국시켜 이승만과 김구의 역할을 맡기고자 했다. 그 결과 1947년 7월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장군의 초청으로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귀국한 서재필은 미군정 고문과 남조선과도정부(南朝鮮過渡政府, South Korea Interim Government)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을 맡아 해방된 조선의 정치 일선에 나섰다. 그러나 요동치던 당시 정치 상황에서 이미 80이 넘은 고령에,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서재필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결국 현실 정치의 벽 앞에서 한계를 절감한 서재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과거의 절제된 생활을 계속 유지했지만, 한국에서의 정치적 좌절로 인해 생기를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되었으나 둘로 갈라져 분단된 조국이 마침내 한국전쟁을 시작한 1950년 서재필은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51년 1월 필라델피아 근교 노스타운의 몽고메리 병원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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