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순종

순종[純宗]

대한제국 마지막 비운의 황제

1874년(고종 11) ~ 1926년

순종 대표 이미지

순종 사진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출생과 성장과정

순종(純宗)은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할 때인 1907년부터 1910년까지 4년간 재위한 마지막 황제이다. 왕실에서 태어나 세자, 황태자를 거쳐 황제에 올랐지만 순종이 생존했을 당시는 개항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어지러운 시기로, 그 과정에서 순종은 어머니를 잃고, 부인 역시 잃었으며, 자의가 아닌 일본의 강제로 황위에 올라 황제로서 자국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장 비극적인 국왕이었다.

순종이 자신의 감상이나 생각 혹은 정치적 구상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 기록은 매우 적다. 다만 대내외적인 혼란 속에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건강하지 못했다고 한다. 『고종실록』이나 『순종실록』을 살펴보면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으로 『정헌집(正軒集)』이 있고, ‘장충단(獎忠壇)’ 비의 글씨와 여주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에 위치한 ‘명성황후탄강구리비’가 순종의 글씨라고 한다.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高宗)과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이며, 호는 정헌(正軒)이다. 순종은 둘째로 태어났지만 출생 당시 왕과 왕비 사이에는 생존한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순종은 태어나면서부터 원자(元子)로 불렸다. 이는 고종이 왕위에 오른 지 11년 만의 경사로, 고종은 왕자가 태어나자 원자의 탄생을 종묘와 사직에 고하는 것과 축하행사 등을 신료들과 의논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자 탄생 2개월 후인 9월 14일, 일찍부터 원자의 교육을 생각해 원자를 교육할 보양관(輔養官)과 유선(諭善)을 임명하였는데, 이는 순종에 대한 고종의 사랑과 기대를 보여준다. 순종 역시 총명을 드러내었으며 5세 경부터 천자문을 읽었다고 한다.

순종이 태어난 지 1년째인 1875년(고종 12) 1월 1일에 고종은 순종을 세자에 책봉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에 조정 중신들이 찬성하였고, 2월 18일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에서 순종의 세자 책봉의식이 거행되었다.

9세가 되던 1882년(고종 19) 1월 10일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15일에는 관례를 치렀고 동시에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으며 좌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의 집으로 정하여, 2월 19일 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바로 훗날의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로, 덕스러운 용모를 타고났으며, 성품이 유순했다고 한다.

2 어머니의 죽음과 계속된 시련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따라 정변이 계속되며 순종의 처지 역시 순탄할 수만은 없었다. 특히 순종 개인의 인생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것은 22세에 닥친 어머니 시해, 을미사변이었다. 어머니의 비통한 죽음만으로도 순종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충격이었겠지만 사변 당시 궁을 침범한 낭인들이 왕후를 해치려할 때 훗날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세자빈이 막아서다 넘어지면서 허리를 다쳤으며, 이는 순명효황후 평생의 지병이 되었다고 한다.

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왕후 민씨를 폐서인(廢庶人)으로 한다는 조령 을 내리자 왕태자였던 순종은 상소문을 올려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였고, 이에 고종은 곧바로 왕태자의 정성과 효성을 생각하여 폐서인시킨 왕후에게 빈(嬪)의 칭호를 내렸다.

이후 친일적인 인사들이 내각에 기용되는 가운데 갑오개혁(甲午改革)이 계속 진행되었고, 이를 타계하기 위하여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함에 따라 순종 역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년 후인 1897년 고종이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의 옛 이름)으로 환어(還御)하여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순종은 황태자로, 세자빈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그렇지만 황태자비는 1904년(광무 8) 11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2년 후인 1906년(광무 10)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태자비로 정하고, 이듬해 초 황태자비로 책봉하였다. 바로 훗날의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이다.

3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즉위

한편 후비를 맞아들인 이 해 순종은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는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비극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순종 개인적으로도 어머니의 죽음과 부인의 사별에 이은 또 하나의 불행이었다. 즉위의 과정이 순리에 따른 것이 아닌 일제의 강제력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벌인 헤이그 특사 사건을 벌였지만 각국의 정부에서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외교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일제는 이를 조약위반으로 규정하고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였으며, 고종은 어쩔 수없이 황위를 순종에게 대리하라는 명을 내렸고 1907년 7월 19일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작하였으며, 다음 날 순종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함께 외국 영사를 접견하며 대내외적으로도 순종의 대리청정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당시 고종은 황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퇴위’가 아닌, 언제든 황제의 자리에 돌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대리청정’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즉각적으로 순종의 황제즉위, 곧 고종의 퇴위로 연결되었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불과 6일이 지난 1907년 7월 25일 장례원경(掌隷院卿) 신기선(申箕善)은 황제 즉위의 장소와 날짜를 물으면서 즉위식 날짜는 양력 8월 27일로 정해지며, 순종의 즉위는 기정사실화 되었다. 8월 27일 순종은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치렀으며, 연호는 융희(隆熙)로 정하였다. 서양식 건물이었던 돈덕전에서 거행된 순종황제의 즉위식은 과거 조선의 국왕들은 물론 고종의 황제즉위식이 백관이 조복(朝服)을 입고 진행했던 데에 반하여 서구식 대례복(大禮服)이나 후록코트(frock coat, 厚錄高套)를 입고 진행되었다고 한다.

또 황제즉위식이 결정되고 난 8월 7일에는 귀비 엄씨(貴妃 嚴氏)의 아들로 순종에게는 이복동생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황태자로 책봉하기로 하고, 한 달 후인 9월 7일 이를 선포하여 만방에 알렸다.

한편 순종의 즉위 전, 그러니까 대리청정의 기간 동안 일제의 국권 침탈은 더해갔다. 1907년 7월 24일 소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또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통감이 조선의 국정 전반을 간섭할 수 있게 됨은 물론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차관정치’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재정부족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

4 일본에 의한 영토 순행

이처럼 일제는 내외적으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을 모두 탈취하였으며, 이에 따라 순종은 이름뿐인 황제로 전락하였다. 비록 순종은 명목뿐인 황제였지만 여전히 대한제국의 황제라는 상징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로, 일제는 이를 자신들의 침략과 통치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기획된 것이 순종황제의 순행(巡幸)이다. 물론 과거 조선의 군주들 역시 궁 밖으로 행차를 하긴 했다. 그렇지만 과거 국왕의 행차는 도성 주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의 원행(園行)이나 능행(陵幸)이었던 반면 순종의 순행은 국토의 남단인 영남지방과 북단인 서북지방이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순종은 1909년 1월 초 지방으로 순행을 결정했다는 조칙(詔勅)을 내려 순행사실을 대내외에 알렸다. 이에 따르면 순행의 목적은 황위 계승 후 ‘시정개선(施政改善)’을 결심하였지만 오히려 지방에서는 소요가 빈발하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어 직접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요는 바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병투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따라 조선의 백성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침략에 대항했는데, 특히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의 봉기가 증가함은 물론 해산된 병력이 의병에 참여하게 되면서 전투력 역시 급증해 통감부(統監府)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필두로 한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조중응(趙重應) 등 친일인사들은 황제의 순행을 기획했던 것이다. 즉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던 의병의 활동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대한제국 황제가 일제의 보호 하에 건재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직접 보여주어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엄동설한이라 할 수 있는 1월 초와 말 두 차례의 지방순행이 이루어졌다. 그 첫 번째는 영남지방에 대한 순행으로 이른바 남순행(南巡幸)이었다.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6박 7일간 순종은 대구, 부산, 마산 등지를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둘러보았다. 남순행이 끝난 지 2주가량 지난 1월 27일에는 경의선(京義線)을 타고 다니며 서북지방을 돌아보는 서순행(西巡幸)에 나서 2월 3일까지 7박 8일간 평양, 신의주, 의주 등지를 돌아보았다. 당시의 순행은 이토 히로부미가 동행하며 순종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즉 순종과 나란히 서있는 이토의 모습을 연출하여 한일우호의 모습을 지방민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순종은 가는 곳마다 지방의 관민을 만나고, 그 지역의 이름난 선배와 관리들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주는 한편 이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일의 우호 증진과 일본이 한국의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위해 힘을 쓰고 있다는 연설을 하며 지방민의 인심을 우호적으로 돌리려 했다.

5 국권 피탈과 최후

이처럼 일제는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순종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권위를 침략과 통치에 이용하고자 하면서도 제국으로서의 국권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황제로서의 실질적인 권한은 더욱 제한하였다. 순행이 있던 해인 1909년 7월 12일 대한제국의 사법과 감옥 업무를 일본정부에게 위탁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기유각서(己酉覺書)가 체결되었다. 이완용과 2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사이에 교환된 이 각서에 의해 대한제국의 법부(法部)와 재판소는 사라지고 통감부의 사법청에서 그 사무를 대신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감옥 사무 역시 일본인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인들이 의병을 비롯한 항일운동이나 반일적인 행위들을 강력하게 규제할 수 있게 됨은 물론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경제적․사회적 약탈에 대해서 면죄부를 줄 수도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대한제국에서는 사법권을 탈취하던 1909년 7월 당시 본국 일본의 각의(閣議)에서는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며 한국의 강제 병합과 대륙 침략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1909년 10월 러시아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한국과 만주에서의 이권 문제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사전협상을 위해 한국의 통감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한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10월 26일 이토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V. N. Kokovsev)와 20여 분간 열차에서 회담을 마치고 하얼빈(哈爾賓)역에 내려 러시아군의 사열을 받고 환영 인파들 쪽으로 이동할 때 대한의군사령관이었던 안중근(安重根)이 이토를 저격, 3발을 명중시켜 사살하였다.

이토 사후 일본 정계는 군부 인사들이 득세하면서 이토의 저격을 구실삼아 한국 강점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이때는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 친일인사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여론을 조작하여 합방은 한국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라며 순종을 더욱 압박하였다.

결국 융희 4년(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이 국제법상 유효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지만 이 조약은 순종이 아닌 이완용과 당시 통감으로 조선에 주재하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사이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조약의 제 1조와 2조에는 한국 황제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또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겨준다는 것과 일본 황제는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로서 519년간 유지되어 온 조선왕조는 종언을 고하고,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1907년 고종을 이어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즉위한 이래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기까지 황제로 재위한 순종은 보통 무능한 군주라고 인식된다. 하지만 순종은 즉위 자체가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으며 즉위 직전 일제의 침략기관으로서 통감부가 설치되어 대한제국의 외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로서 운신할 수 있는 여지는 그다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순종 즉위 이후에는 친일관료들과 손잡은 일제는 내정을 하나 둘 잠식하였으며, 이에 따라 군주권은 제약당하며 별다른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이름을 조선으로 변경하고, 고종을 이태왕(李太王), 순종을 이왕(李王)으로 호칭토록 하였다. 한편 당시 고종은 덕수궁에 머물렀기 때문에 ‘덕수궁 전하’, 순종은 황제즉위 후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이래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창덕궁 전하’라고 지칭되기도 하였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은 만년을 창덕궁에서 고독하게 보냈다. 51세가 되던 192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지만,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에서 5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남양주시 금곡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