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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申櫶]

서세동점의 시대에 강온 양면으로 맞선 무관

1810년(순조 10) ~ 1884년(고종 21)

신헌 대표 이미지

신헌 초상 초본

서울대학교 박물관

1 개요

신헌은 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학문에도 능했던 장수였다. 정약용(丁若鏞)과 김정희(金正喜)의 실학을 받아들였으며 박규수(朴珪壽)·강위(姜瑋)와도 사상적 교류를 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내우외환의 시대였다. 안으로는 삼정문란으로 인해 임술민란이 일어났으며 바깥으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등 서양으로부터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무관으로서 이러한 시대에 맞서야 하였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한편에서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방위 태세를 강화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외국과 외교적으로 담판을 하는 것이었다.

2 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에 태어나다

신헌은 1811년 충청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신관호(申觀浩)였으며 1868년 무렵부터 신헌(申櫶)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는 국빈(國賓)이었고 위당(威堂)·금당(琴堂)·동양(東陽)·우석(于石)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장숙(壯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본관은 평산이고 아버지는 선전관과 대구영장 등을 거쳐 인동부사와 평산부사를 지낸 무관인 신의직(申義直)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윈 뒤 조부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조부 신홍주(申鴻周)는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훈련대장·병조참판 등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운 바 있다. 신헌은 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신헌의 아들 신정희(申正熙)와 신석희(申奭熙)도 무관이었다. 신정희는 포도대장과 어영대장을 역임하였고 동학농민전쟁 당시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 양호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의미함)로서 이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바 있다. 신정희의 아우 신석희도 병마절도사와 포도대장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내부협판·경무사 등을 역임한 무관이었다. 이외에도 신석희의 아들 신팔균(申八均)은 대한제국의 장교 출신으로 나라가 망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전사한 바 있다. 이렇게 신헌 집안은 한국 근대사의 주요 대목마다 등장하여 무관으로서 활약하였다.

3 글에도 능했던 장수

신헌은 무관이었지만 『심행일기(沁行日記)』·『민보집설(民堡輯說)』·『융서촬요(戎書撮要)』·『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유산필기(酉山筆記)』 등 많은 저서를 남긴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학문적 소양이 풍부한 장수(儒將)였다. 그는 정약용과 김정희의 문하에서 실학을 받아들였고 개화파의 스승으로 알려진 박규수와 강위 등과도 사상적 교류를 하였다.

신헌은 정약용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정약용과 깊게 사귀었던 초의선사(艸衣禪師)나 정약용의 장남인 정학연(丁學淵)과의 교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약용의 학문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인 『민보집설』은 정약용이 제창한 민간 자위 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신헌은 김정희에게 금석학(金石學)을 배워 『금석원류휘집(金石源流彙集)』을 남겼으며 예서(隸書)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갔을 때에도 자주 편지 왕래를 하였다. 김정희는 그를 수제자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김정희의 수제자로는 신헌 이외에 강위를 들 수 있다. 강위는 신헌에게는 9년 연하의 후배였다. 신헌은 강위와도 가까이 지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강위는 신헌이 무주로 유배되자 함께 내려와 주변을 지켰다. 신헌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하자 그를 따라 통영으로 내려가 막료(幕僚)로써 활약하였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강위가 그를 보좌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신헌은 이밖에 지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하는 것을 도왔으며 직접 『유산필기(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농법에도 관심이 많아 『농축회통(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직접 저술하기도 하였다.

4 효명세자에게 발탁되었지만

신헌은 17세 때인 1827년 별군직(別軍職)으로 등용되었다. 별군직이란 국왕의 시위(侍衛)와 경호를 맡아보던 관직이었다. 그가 별군직에 등용된 것은 조부의 후광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당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배려도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효명세자의 사부는 김정희였다. 신헌도 김정희에게 배웠다는 점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즉 그는 김정희의 문하에서 효명세자의 두 살 후배였던 것이다. 그해 효명세자는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代理聽政,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보는 것)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후배를 기용한 것이다.

신헌은 이듬해인 1828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이후 훈련원주부를 시작으로 주요 무반직을 역임하였으며 채 마흔도 되기도 전에 금위대장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승승장구는 여기까지였다.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그는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떠나야만 하였다. 그가 파직당한 표면적 이유는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궁궐에 들어가 헌종을 진찰하고 약을 지어 올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철종의 즉위로 권력이 더욱 공고해진 안동김씨의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영의정이자 내의원도제조였던 권돈인(權敦仁)이 차자(箚子, 간단한 형식의 상소문)를 올려 자신의 책임임을 밝힌 바 있다. 즉 이 사건은 실제로는 권돈인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돈인이 이렇게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라도 녹도(鹿島)로 유배를 떠나야 하였다.

권돈인도 이로부터 2년 뒤인 1851년 다른 사안으로 안동김씨의 공격을 받아 파직되었으며, 1859년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신헌은 1853년 말 무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가, 185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5 내우외환에 맞서다

1860년대에 접어들면 조선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안으로는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 나라가 온통 뒤집어졌으며 바깥으로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관 신헌은 이러한 내우외환의 시대에 직면해야만 하였다.

신헌은 임술민란이 일어났을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었다. 임술민란은 경상도 진주에서 불붙기 시작했는데, 진주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사령부가 있었던 통영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그는 임술민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군포(軍布, 병역을 대신하여 부담하던 세금)를 양반과 상민 구분 없이 평등하게 징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 시절 강위가 그를 보좌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강위의 아이디어일 가능성도 있다. 이 방안은 뒤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채택되었다.

신헌은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얻어 더욱 중용되었다. 흥선대원군도 그와 마찬가지로 김정희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그에게 흥선대원군은 아홉 살 연하였다. 따라서 그는 흥선대원군 집권기 국방문제를 도맡다시피 하였다. 그는 186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방문제에 대한 건의안들을 속속 제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바다로 쳐들어오는 적들을 막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신헌은 중국의 해방론자(海防論者) 위원(魏源)이 지은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많이 참고하였다. 그는 조선의 군사제도가 이미 무너져 있는 현실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해안 요충지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정약용의 『민보의(民堡議)』를 참고하여 『민보집설』을 지었다.

신헌은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 당시 총융사였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양화진 부근에 진을 치고 프랑스군의 서울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는 병인양요가 끝나고 난 뒤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당시 그는 군사 문제에 관한 여섯 가지 조목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이후 대부분 채택되어 국방 정책의 기본 방향이 되었다. 그는 신무기 개발에도 나섰다. 그는 주로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바탕으로 신무기를 개발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수뢰포(水雷砲)를 들 수 있다. 수뢰포는 수중에 설치하여 일정한 조건이 되면 폭발하는 것으로 일종의 기뢰였다.

신헌은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 친정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용되었다. 그는 1874년 진무사 겸 강화유수로 임명되어 광성진·덕진진·초지진 세 곳에 포대를 설치하는 등 강화도 요새화 작업을 수행했다. 고종도 국방문제만은 그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6 강화도에서 젊은 구로다와 상대하다

조선은 1876년 1월 강화도에서 일본과 외교교섭을 시작하였다. 이때 신헌이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일본측 대표인 구로다 기요타가(黑田淸隆)를 상대하였다. 당시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후 이것을 빌미로 문호개방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양에 당한 바 있는 포함외교(砲艦外交)를 조선을 상대로 써먹은 것이었다. 운요호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군사적 긴장상태가 조성되었으므로 무관인 신헌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신헌은 무관이었지만 결코 완고한 강경파는 아니었다. 당시 강위와 오경석(吳慶錫)이 그를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당시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로서 문호개방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고종도 그에게 현지에서 재량껏 결단하라는 명을 내린 바 있다. 고종의 생각도 군사적 충돌보다는 외교적 해결로 기울고 있었다.

신헌은 1876년 1월 16일 구로다를 처음 만났다. 구로다는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젊은 사무라이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당시 나이는 37세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해서 신헌은 66세의 노장이었다. 그는 구로다의 혈기에 노련한 경륜으로 맞섰다. 두 사람은 지리한 줄다리기 끝에 2월 3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서명하였다. 강화도에서 체결되었다고 해서 강화도조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화도조약은 흔히 불평등조약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화도조약의 내용에 불리한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코 일본의 무력시위에 일방적으로 굴복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독소조항의 경우 아직 서양식 외교 논리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였다. 고종은 당시 이 조약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전권대관이었던 그를 칭찬하기도 했다.

7 마지막 임무가 된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1882년 체결된 조미조약(朝美條約)이었다. 이번에도 신헌이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과의 협상에 나섰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72세가 되어 있었다.

조선과 일본이 직접 체결한 강화도조약과는 달리 조미조약의 체결과정에는 청의 거중조정(居中調整, 제3자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개입 조정 중재하는 행위)이 있었다. 사전에 청이 개입하여 세부조건을 절충한 상태에서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당시 영선사(領選使)로 중국에 머물고 있던 김윤식(金允植)과 조선에서 파견된 어윤중(魚允中)이 청과의 사전 협의를 담당하였다.

또한 미국과의 최종적인 협상 과정에서는 부사(副使) 김홍집金弘集)의 역할이 컸다. 즉 조미조약의 체결과정에서 김윤식·어윤중·김홍집과 같은 젊은 개화파들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특히 김홍집은 조미조약 이후 서양의 다른 국가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마다 부사 역할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신헌은 조미조약을 계기로 이들에게 외교협상의 권한을 넘겨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그는 1884년 12월 10일 74세의 나이로 고향인 진천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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