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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安在鴻]

중도의 길을 걸은 신민족주의자

1891년(고종 28) ~ 1965년

안재홍 대표 이미지

안재홍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안재홍(安在鴻)은 비타협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였으며, 8․15해방 후에는 민주주의 통일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식민지시기에는 언론민족운동·한국고대사 연구를 통하여 민족정신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신간회운동을 주도하는 활동 등으로 모두 9차례 9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8․15해방 후에는 6․25전쟁 기간 중 납북될 때까지 신(新)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 좌익과 우익의 협동을 실현한 통합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2 3·1민족운동 이전- 민족운동가로서 성장 과정

안재홍은 1891년 경기도 진위군(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에서 태어났다. 6~7살(1897년)부터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수학하는 동안 ‘조선의 사마천(司馬遷)’이 되기를 결심하였고, 17세 되던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평택의 진흥의숙(振興義塾)을 거쳐, 부친이 권유함에 따라 이해에 상경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YMCA) 중학부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다. 안재홍은 이곳에서 이상재·남궁억·김규식 등의 민족지사를 만났고, 윤치호와도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졸업반이던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9월 이상재의 충고에 따라 구국의 뜻을 품고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는 1년 남짓 어학 준비를 끝낸 뒤, 1911년 9월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장대한 기개와 포부”를 담아 ‘민중의 세상’이라는 뜻의 ‘민세’(民世)라는 아호를 짓고 삶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안재홍은 1914년 7월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1915년 5월부터 중앙학교의 학감(學監 : 현재의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이 동안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 의 일반 계원으로 활동하다가, 이 단체가 보안법 위반으로 발각되자 1917년 3월 중앙학교에서 해직되었다. 1916년 12월부터는 윤치호가 주선하여 1917년 5월까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황성기독교청년회의 후신)의 교육부 간사로도 활동을 이어가다가 낙향하였다. 이즈음 대종교로 개종하였다.

3 9차례 7년 3개월의 옥고를 이겨낸 ‘고절’(高節)의 ‘국사(國士)’

3·1민족운동의 여진이 계속되던 1919년 7월, 안재홍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가르쳤던 연병호의 추대로 비밀결사 대한민국 청년외교단(동년 6월 결성)에 가담하여 총무로서 단체를 주도하였다. 이 결사가 동년 11월 일경에게 발각되자 검거되어, 1921년 5월 징역 3년을 받고 첫 옥고를 치렀다. 물산장려운동이 쇠퇴하던 1924년 4월, 안재홍은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참여하여 '토산(土産)장려'를 주장하면서 민족자본의 성장을 추구하였다. 동년 5월에는 『시대일보』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언론활동을 시작하였고, 9월에는 『조선일보』의 주필 겸 이사로 입사하여 1932년 퇴사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필화(筆禍)로만 두 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1928년 1월 『조선일보』 사설 「보석(保釋) 지연의 희생」(필자는 이관구)을 발행한 책임으로 구속·기소되어 금고 4개월을 당한 일이 첫 번째였다(제2차 옥고). 두 번째 필화는 같은해 5월 『조선일보』 사설 「제남(濟南) 사건의 벽상관(壁上觀)」을 집필하여 일어났는데, 『조선일보』 발행인에서 물러나는 한편 금고 8개월을 당하였다(제3차 옥고). 식민지시기 안재홍의 항일운동의 정점은 신간회운동이었다. 그는 1927년 1월부터 2월 사이 비타협 민족주의자(좌익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으로서 자치운동에 대항하여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신간회 를 발기·창립한 주역이었다. 이후 그는 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의 진상 보고를 위하여 주도한 민중대회사건으로 1929년 12월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4차 옥고). 1931년 5월 안재홍은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1932년 3월 만주동포 구호 의연금을 유용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옥중에서 사장직을 사임하고 징역 8개월을 받고 11월 미결 통산으로 출옥하였다(제5차 옥고).

1931년 일제가 만주전쟁을 일으켜 제국주의-파시즘 체제를 더욱 강화하자, 안재홍은 민족해방을 위한 ‘차선’의 활동으로 “국사를 연찬(硏鑽)하여 민족정기를 불후에 남기는 사명”을 자각하였다. 파시즘 체제가 강화되던 1934년 다산(茶山) 정약용 서거 99주년을 계기로, 그는 민족의 과거와 현실을 탐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할 목적에서 “조선문화에 정진하자”는 구호를 내세워 ‘조선문화운동’을 제안하였다. 이때 “민족으로 세계에, 세계로 민족에”라는 구호 아래 ‘민족적 국제주의’·‘국제적 민족주의’로서의 ‘민세주의’(民世主義)를 제창하였다. 1936년 세칭 ‘군관학교 학생사건’으로 검거되어 2심 재판에서 2년 징역형을 받았으나(제6차 옥고), 1937년 보석으로 출감하여 한국상고사와 관련한 저술을 시작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거되어 3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제7차 옥고), 군관학교 학생사건에 징역 2년이 확정되어 다시 투옥되었다(제8차 옥고). 1941년 『조선통사(通史)』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는데,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100여 일 동안 수감되었다가 1943년 3월 불기소로 석방되었다(제9차 마지막 옥고).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 섬을 점령하자, 안재홍은 일제가 곧 패망하리라 확신하였다. 그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동맹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12월부터 민족자주를 첫째 구호로 내세워 여운형과 함께 일제에 민족대회소집을 요구하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4 민족의 통합을 추구한 정치인

안재홍은 8․15해방 당일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자가 주도하고 공산주의가 협조하는 ‘민공(民共)협동’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졸속하게 좌경화하자 9월 10일 탈퇴하고, 동월 24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안재홍은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영립보강(迎立補强 : 현 임시정부를 국내외의 혁명 세력으로 확대·강화)을 주장하며, 인민공화국을 임시정부 안으로 끌어안으려 하였다. 안재홍에게 민공협동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시대정신이었으며, 이 점이 그와 보수 우익 세력을 가르는 차별성이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1945년 10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여하였으나, 이승만의 독선에 불응하여 탈퇴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12월 말 이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 를 둘러싸고 좌우익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정국에서, 임시정부와 반탁노선을 공유하면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의 부위원장이 되어 반탁운동의 선두에 섰다. 1946년 2월 우익 정치세력의 결집체였던 재(在)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의 대표위원으로도 피선되었으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1946. 5)되자 좌우합작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안재홍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협조가 한국독립의 절대 전제임을 인식하였다. 그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가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안임을 받아들이면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촉구하였다. 이해 12월 좌우합작운동의 부산물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官選)의원 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47년 2월 미군정의 민정장관에 취임하여 1948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이 기간 동안 미군정의 행정권을 인수받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성공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안재홍은 1950년 5·30 선거 시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0년 9월 납북된 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1965년 3월 1일 평양 시내의 한 병원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안재홍은 해방정국기 분망한 정치활동 속에서도 식민지시기 한국고대사를 연구한 결실들을 『조선상고사감(鑑)』 상·하(1947. 6, 1948. 4)로 간행하는 등 역사가의 소임도 잊지 않았다. 대한민국정부는 1989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追敍)하였다.

5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신민족주의는 안재홍이 8․15해방 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뛰어넘는 신국가 건설의 이상과 방략으로 제창한 정치이념이다. 그는 국민당의 창당 이념을 정립하기 위하여 1945년 9월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작은 책자를 탈고하였고 이해 12월 출간하였다.

안재홍은 식민지시기 제창하였던 ‘민세주의’를 기반으로 신민주주의를 채용한 신민족주의를 주창하였다. 신민족주의는 민족 안의 모든 계급, 즉 국민(지주·자본가·소시민·노동자·농민을 다 끌어안는 국가의 구성원)이 정치·경제·사회의 온갖 방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초계급적(超階級的) 통합민족국가’의 민족공동체를 국가 건설의 목표로 내세웠다. 무엇보다도 민족 안의 불필요한 계급대립의 요인을 제거하여, 극좌의 무산계급독재와 극우의 부르주아계급독재를 모두 청산하려 하였다. 그는 구(舊)민주주의의 법주에 부르주아(자본) 민주주의는 물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포함시켰다. 신민족주의는 서구 민주주의를 소수의 특권계급이 부(富)·권(權)·지(智)를 독점한 자본독재·금권(金權)정치라고 비판하였다. 또 “진정한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한 자기식별(自己識別)”이라고 경고하면서, 공산주의체제를 무산계급 독재라고 규정하여 배격하였다.

신민족주의는 의회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에, 경제균등을 실현하는 사회주의 제도를 입법화하여 부의 독점과 불균등 현상을 막으려 하였다. 이를 실현하는 구체안으로 ‘중요산업을 국유화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대자본가·대지주의 독점을 미리 막고, 국민개로(國民皆勞)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불로소득을 제거해야 한다’, ‘국가가 노동자·농민 등 근로자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방안을 입법·시행하여야 한다’ 등을 주장하였다.

안재홍은 신민족주의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등치시키면서 ‘다사리 주의’로도 표현하였다. 그는 한국어 ‘다사리다’를 ‘다 사뢰다’와 ‘다 살리다’로 풀어, 신민족주의가 ‘조선적 이념’에서 도출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다사리’의 첫째 뜻은 국민의 총의(總意)를 좇아서 국정을 처리하는 만민공화(萬民共和) 즉 정치평등을, 둘째 뜻은 모든 사람을 모두 생활·생존케 하는 대중공생(大衆共生) 즉 경제균등을 가리켰다. 해방정국에서 신민족주의는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사회주의를 수용한 국가건설론으로서 좌우합작운동을 비롯하여 중간우파의 정치이념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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