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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安重根]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1879년(고종 16) ~ 1910년(순종 4)

안중근 대표 이미지

안중근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김구와 안중근의 만남

맏아들 중근은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서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실린 김구(金九)의 회고담이다. 김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른바 아기접주로 활약했으며 이듬해인 1895년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몸을 숨겨 간신히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당시 김구는 열아홉 살이었고 안중근(安重根)은 열여섯 소년이었다. 당시 김구는 안중근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을 뿐 깊이 교유하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다시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운동을 대표하게 될 두 인물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2 호걸이었던 아버지 안태훈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海州) 동대문 밖 광석동(廣石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안인수(安仁壽)는 미곡상을 경영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신천군(信川郡) 두라방(斗羅坊)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아버지 안태훈이 1884년에 상경하여 박영효(朴泳孝)와 접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한 후 수구파 정권의 탄압을 피해 청계동으로 이주한 것이라고 한다. 안태훈은 이후에도 종종 상경하여 중앙정계와 연결을 갖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시골에서 그저 평범하게 살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태훈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크게 활약하였다. 농민군으로서 활약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는 오히려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으로 감영으로부터 이른바 의려장(義旅長)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김구와 적대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됨을 보고 그를 품어준 것이다.

안태훈은 동학농민운동이 끝나고 난 뒤 더 큰 곤욕을 치러야만 하였다. 그는 농민군을 진압할 당시 농민군으로부터 정부의 양곡을 노획한 바 있다. 이 양곡은 군량미로 이미 써버렸는데 정부에서 이를 갚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1895년 5월이 되어서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종현성당에 머물면서 천주교 신부들의 보호를 받았다고 한다.

안태훈은 1896년 천주교에 정식으로 입교하였다. 안중근도 이듬해 아버지를 따라 입교하여 빌렘(Wilhelm, 홍석구洪錫九)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마스(多默)였다. 당시 지방에서는 천주교 신부의 치외법권에 기대 지방관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부들도 교인 보호를 명분으로 지방관과 정면으로 맞서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양대인을 빙자하여 행세한다’는 뜻으로 ‘양대인자세(洋大人藉勢)’라고 불렀다. 안태훈 일가의 경우도 그 전형적인 사례였다. 당시 신천 본당은 청계동에 있었는데 빌렘 신부와 안씨 일가가 힘을 합쳐 인근 지방관들과 맞서고 있었다. 천주교도 가운데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있으면 실력을 행사해서 빼내올 정도였다. 이 사안이 중앙정부에서까지 문제가 되어 안태훈은 한때 함종(咸從)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3 의병장 안중근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동아시아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소용돌이쳤으며 안중근도 이러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상해로 건너가 격변하는 정세를 탐문하였으며 그의 집안은 새로 개항한 항구도시인 진남포로 이주하여 시세에 적응하려 하였다. 진남포로 이주한 직후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그가 집안을 이끌어야만 하였다. 그는 평양에 삼합의(三合義)라는 석탄회사를 세우는 한편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하고 돈의학교를 경영하는 등 이른바 애국계몽운동도 전개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활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

안중근은 1907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에 선임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 활동에 들어섰다. 일대를 순행하여 300여명의 동지를 모았으며 당시 연해주 교민사회의 원로였던 최재형(崔在亨)의 재정 지원을 받아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안중근은 1908년 여름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먼저 두만강 건너 경흥군(慶興郡) 홍의동(洪儀洞)에 진입하여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국공법에 따라 일본군 포로를 석방할 것을 주장하여 동료 의병장 엄인섭(嚴仁燮)과 의견다툼을 빚기도 하였다. 그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회령 영산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하였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가 이끌던 의병부대는 해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1908년 가을 이후 안중근은 개인적으로도 곤경에 처했지만 연해주 의병운동 전체도 침체기를 맞고 있었다. 러시아 당국의 간섭과 통제가 심해졌으며 의병세력 내부의 알력과 갈등도 커져만 갔다. 이 무렵 연해주 교민사회에서는 즉각적인 무력투쟁보다는 교육 계몽 등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이른바 완진파(緩進派)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안중근은 의병운동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그는 1909년 3월 침체되어 있는 의병운동을 다시 일으키려는 의도에서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전반적인 상황은 좋지 않았다. 과거 의병항쟁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던 최재형마저 완진론에 기운 점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그에게는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무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북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4 이토가 하얼빈에 간 까닭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는 포츠머스조약 당시의 전선을 기준으로 만주를 나누어 가졌다.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기점으로 하는 남만주는 일본이 차지하였지만 동청철도를 중심으로 북만주는 여전히 러시아 세력권이었다. 하얼빈은 북만주의 중심 도시였다. 포츠머스조약 이후에도 일본은 러시아가 보복하기 위한 전쟁을 도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국제정세는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905년 일어난 모로코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가 신흥강국인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불협상을 성립시켰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전통적 동맹국인 러시아와 영국의 관계도 개선되어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협상이 성립하였다. 그리고 다시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도 개선되어 1907년 7월 제1차 러일협약이 체결되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당시 러시아가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1908년 이후 러시아 내부에서는 제1차 러일협약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되었으며 심지어 이를 폐기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대안으로 미국을 끌어들여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는 방안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러시아는 극동 문제를 재검토하기 위해 재무장관인 코코프체프(V. N. Kokovsev)를 만주로 파견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러시아의 분위기를 감지하였기 때문에 코코프체프를 만나 러시아를 회유하기 위해 이토를 하얼빈으로 보낸 것이다.

5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를 처단하다

을사늑약 이후 국권침탈의 원흉을 처단하려는 시도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안중근의 이토 처단도 그 연장선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1907년 3월 25일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이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였다. 1908년 3월 23일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이 대한제국의 외부고문을 역임한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urham White)를 처단하였다. 이 가운데 전명운은 재판 끝에 무죄로 풀려났으며 이후 연해주로 건너가 사건경위를 알리고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였다. 전명운의 러시아 방문은 같은 공립협회 회원이었던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주필 이강(李剛)이 주선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명운의 활동으로 연해주 교민사회는 큰 자극을 받았다.

1909년 9월 이토가 하얼빈을 방문하여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갖는다는 소식이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등의 매체를 통해 연해주 교민사회에 알려졌다. 대동공보사에서는 즉각 극비회의가 열려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대동공보의 주필이었던 이강은 당시 연추(煙秋: 러시아 연해주에 있었던 한인 마을)에 머물고 있던 안중근에게 연락을 하였다. 안중근은 의병운동을 다시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이강에게 이토 처단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자원하였다. 안중근은 급진파였던 반면에 『대동공보』의 극비회의에는 완진파들도 다수 참석하고 있었다. 이토 처단은 급진파와 완진파 모두 합의할 수 있는 방안이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였다. 의거에 사용될 무기는 유진률(兪鎭律)이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던 것을 쓰기로 했다. 안중근이 실행책임자, 우덕순(禹德淳)이 보조역, 조도선(曺道先)과 유동하(劉東夏)가 통역과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일행은 치밀한 사전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다가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처단하는 데 성공하였다.

6 비겁한 재판, 당당했던 안중근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한 후 곧바로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러시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은 후 곧바로 일본에 인계되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그의 신병을 일본에 인계한 것이다. 당초 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은 거사 후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전례도 있었다. 재판을 대비해서 변호사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그의 신병을 일본에 넘겨주는 바람에 이러한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안중근은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구금된 상태에서 관동도독부(関東都督府)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에게 1차 심문을 받았으며 여순감옥으로 이송된 후 다시금 심문을 받았다. 1910년 2월 7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마나베 주조(眞鍋十藏) 재판장의 심리 하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연해주 한인사회에서는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安秉瓚) 변영만(卞榮晩),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 러시아인 변호사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등으로 이루어진 다국적 변호인단을 구성하였지만 재판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인 관선변호사 가마다 세이지(鎌田正治)와 미즈노 기치다로(水野吉太郞)만을 인정하였다. 1주일 만에 6차례 공판이 연달아 열리는 졸속 재판 끝에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심문과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시종 당당한 태도로 임했다. 우선 자신의 신분이 대한제국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이므로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접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아울러 자신이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그의 죄악 14개항을 조목조목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모두 묵살되었고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저술한 후 3월 26일에 처형되었다. 순국할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7 이토 처단이 일으킨 파장

안중근의 이토 처단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친일파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대적인 사죄 캠페인을 벌였다. 이른바 13도 인민을 대표해서 일본에 건너가 사죄한다는 임시회의소라는 것이 세워지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한국 황제로 하여금 일본에 건너가 사죄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일진회(一進會)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합방을 청원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편 일본은 이 사건의 배후에 독립운동 세력이 있다고 보았다. 직접적으로는 『대동공보』의 주필 이강(李剛)을 의심하였으며 국내에서는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신민회(新民會)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일세력을 일망타진하려 하였지만 증거가 없어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비밀리에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신민회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활동의 제약을 더욱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다. 결국 신민회는 일제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국외에 독립전쟁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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