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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安熙濟]

백산상회를 경영하면서 임시정부의 자금을 대다

1885년(고종 22) ~ 1943년

안희제 대표 이미지

안희제 사진

공훈전자사료관(국가보훈처)

1 개요

안희제는 경상도 출신의 우국지사(憂國之士)였다. 그는 백산상회(白山商會)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회사의 영업망을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망으로 활용하였으며 이 회사를 통해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세운 백산상회는 당시 임시정부의 손꼽히는 자금줄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밖에 다양한 사회활동과 언론활동을 벌였다. 그는 1930년대에 들어 만주로 건너가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세워 이를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로 일구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일제가 자행한 대종교(大倧敎)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휘말려 순교(殉敎)하고 말았다.

2 경상도에서 올라온 우국 청년

안희제는 1885년 8월 4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친 안발(安鏺)과 모친 창녕성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태약(泰若)이고 백산(白山)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여기서 백산이란 백두산을 줄인 것으로 그는 자신이 세운 회사의 이름도 백산상회로 붙였다. 본관은 탐진이다.

안희제는 어려서 집안 친척인 안익제(安益濟)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그는 1905년 상경하여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경제과에 입학하였고 이듬해인 1906년 양정의숙(養正義塾) 경제과로 전학하였다. 그는 양정의숙에 다닐 때 경상도 출신 학생들과 함께 교남학우회(嶠南學友會)를 조직하여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경상도 출신 인사들이 조직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교남교육회에도 가입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안희제는 양정의숙을 졸업한 후 고향에 내려와 학교설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동래군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를 설립하고 의령군 의령면 중동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자신의 고향인 부림면 입산리에도 창남학교(刱南學校)를 세웠다. 이 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문중 재산을 투입하였는데 그의 일가이자 지사였던 안효제(安孝濟)가 큰 도움을 주었다.

안희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09년 10월 동래에서 조직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도 참여하였다. 대동청년단은 신민회(新民會) 계열 영남 지역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단체이다. 단장은 남형우(南亨祐)가 맡았고 그는 부단장을 맡았다. 이밖에 서상일(徐相日)·김동삼(金東三)·윤세복(尹世復)·박중화(朴重華) 등 참여하였다. 이 단체도 신민회처럼 항일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비밀결사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 단체의 구성원 가운데는 훗날 백산상회에 관련된 인사가 유독 많았다. 임시정부의 초대 법무차장이었던 남형우와 재무차장이었던 윤현진(尹顯振)도 이 단체의 구성원이었다. 즉 그가 참여한 대동청년단은 영남 출신 우국지사들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3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다

안희제는 나라가 망하자 1911년 조국을 떠나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를 유랑하였다. 그는 우선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하여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를 만났다.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건너가 국제 정세를 살폈으며 이후 만주로 돌아와 독립운동 단체들을 방문하는 등 다각도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안희제는 1914년 9월 배를 타고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곧바로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백산상회는 곡물이나 면화 그리고 해산물 등속을 거래하는 무역회사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그가 이 회사를 세운 실제 이유는 이 회사의 영업망을 독립운동을 위한 네트워크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안희제만 이러한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서상일은 1915년 대구를 근거로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면서 대궁상점(太弓商店)이라는 회사도 함께 설립하였다. 이 회사도 백산상회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회사였다. 대한광복회를 조직한 박상진(朴尙鎭)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회사들 사이에는 연락망이 구축되었으며 이는 영남지방의 독립운동을 뒷받침하는 인프라 역할을 하였다.

4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안희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백산상회를 통한 독립운동을 확대하였다. 그는 1919년 5월 28일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그가 백산상회를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한 것은 여러 사람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안희제·최준(崔浚)·윤현태(尹顯泰) 세 사람이 발기하여 자본금 100만원을 모아 출범할 수 있었다.

대주주인 최준은 흔히 경주의 최부자로 알려진 인물로 고려요업주식회사와 도동무역회사를 설립하였으며, 경남은행과 경성방직(京城紡織)의 주식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윤현태는 동래군 구포의 대지주인 윤필은(尹弼殷)의 장남으로 경남은행의 감사역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우인 윤현진은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맡고 있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을 지냈다. 이밖의 주주들도 대부분 영남지역의 대지주들이었다.

안희제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최준·윤현태 두 사람과 의기투합한 바 있다. 백산상회는 1917년 11월 합자회사(合資會社)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최준과 윤현태가 참여하였다. 당시 윤현태가 합자회사의 대표를 맡았고 안희제와 최준이 무한책임사원을 맡았다. 1919년에는 다시 합자회사를 주식회사로 개편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하여 회사의 규모가 7배로 커졌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설립 당시 상당한 투자금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결손이 커져만 갔다. 그런데 대주주들을 결손이 생길 때마다 추가로 자금을 불입(拂入, 납입)하여 파산 위기를 막아 주었다. 1921년에 제2차 불입이 있었고 1923년에도 두 차례 추가 불입이 있었다. 이렇게 결손이 늘어난 것은 부실한 경영 때문은 아니었다. 회사의 자금이 임시정부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대주주 윤현태의 아우인 윤현진이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을 맡은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일제도 백산상회를 의심하였다. 백산상회가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사법부 총장이 된 남형우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윤현태와 함께 총독부 당국의 수사를 받기도 하였다. 일제가 이러한 의심을 하였던 것은 남형우가 1918년 가을 백산상회에서 사무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 후배들의 해외 유학을 돕다

안희제는 1919년 11월 백산산회 관계자들과 영남지방 유지들과 힘을 합쳐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만들었다. 기미육영회는 설립된 지 6개월 만에 회원이 43명에 이르렀고 불입액은 5천원에 달하였다. 기미육영회는 매년 유학생을 선발하여 해외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유학생을 선발하였다. 제1회 유학생으로는 김정설(金鼎卨)·이병호(李炳虎)·이제만(李濟晩)·전진한(錢鎭漢)·문시환(文時煥) 등 다섯 명이 뽑혔다.

기미육영회는 부산에서 조직된 만큼 유학생은 주로 부산 근처에서 선발되었다. 하지만 전진한처럼 경상북도 출신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이들은 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들 가운데 김정설은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친형으로서 흔히 김범부(金凡夫)로 알려진 인물이다. 전진한은 일본에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를 설립하여 이끌었고 해방 후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다. 문시환처럼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다.

안희제는 기미육영회와는 별도로 고향인 의령의 후배들의 해외 유학도 도왔다. 안호상(安浩相)·이극로(李克魯)·신성모(申星模) 등이 그 혜택을 입었다. 이극로와 안호상은 독일로 건너가 각각 베를린대학과 예나대학을 다녔으며 신성모는 영국으로 건너가 킹에드워드해양대학을 다녔다.

6 언론계에 뛰어들다

안희제는 일제강점기 경제계뿐 아니라 언론계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1920년 4월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 78명 가운데에는 안희제·최준·윤현태·윤상은(尹相殷)·문상우(文尙宇) 등 백산무역 관계자들 대다수가 참여하였다. 안희제와 백산무역은 경남 지방의 차원에서 『동아일보』의 창립을 뒷받침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창립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에 그치지 않고 『동아일보』의 부산지국장을 맡기도 하였다. 당시 대구지국장은 그의 동지인 서상일이 맡았다.

안희제는 1929년 『중외일보(中外日報)』 사장에 취임함으로써 다시금 언론계와 인연을 맺었다. 백산무역이 1928년 해산함에 따라 언론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외일보』는 그 뿌리를 최남선(崔南善)이 1924년 창간한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두고 있다. 『시대일보』는 발행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영권이 보천교(普天敎)로 넘어가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다가 1926년에 발행이 중단되었다. 그러자 이상협(李商協)이 이 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 『중외일보』라고 제호를 고쳐서 발행을 시작하였다. 『중외일보』는 비판적인 논조 때문에 총독부로부터 발행정지처분을 자주 당하는 바람에 경영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안희제가 『중외일보』의 사장에 취임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안희제는『중외일보』의 사장에 취임한 후 주식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지면도 8면으로 늘리는 등 공격적인 경영 전략을 구사하였다. 1930년 2월부터는 발행인 겸 편집인까지 직접 맡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외일보』는 주식회사 체제로의 전환이 실패로 돌아가고 총독부의 탄압도 가중되는 바람에 1931년 6월 부득이 발행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7 만주에 건너가 발해농장을 개척하다

안희제는 1930년대에 들어서는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는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 동경성에 발해농장을 개척하여 이를 거점으로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을 시도하였다. 백산무역이 1928년 해산하고 『중외일보』가 1931년 발행을 중단함에 따라 그에게는 새로운 활동 공간이 필요하였다. 이때 새로운 활동무대로 떠오른 곳이 바로 만주였던 것이다.

안희제가 만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일찍부터였다. 그는 1926년에 이미 동만주 일대를 답사한 바 있다. 그는 당시 협동조합운동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이를 적용할 무대로 만주를 떠올린 것으로 보인다.

안희제는 1927년 이시목(李時穆)과 함께 『자력(自力)』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이시목은 의령 출신으로 『중외일보』의 조사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시목은 그의 고향 후배이자 측근이었던 것이다. 이밖에 당시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는 기미육영회의 장학금을 받고 일본에 건너간 전진한을 들 수 있다. 안희제도 이러한 후배들의 영향으로 협동조합운동에 접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1930년대 만주에서 개척한 발해농장을 통해서 협동조합운동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안희제는 만주에서 발해농장을 경영하면서 자작농창제(自作農創制)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이주 농민에게 농장 소유 토지를 분배한 후 분배된 토지에서 소작료를 거두는 대신 일정 기간 다른 토지를 개간하고 수로를 개설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자작농을 육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발해농장도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발해농장에 발해학교를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2세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이주 한인들의 경제적 기반을 안정시킴으로써 이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는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을 것이다.

8 임오교변으로 순국하다

안희제는 1930년대 만주로 건너올 때 이미 대종교에 입교한 상태였다. 그는 1934년 대종교 총본사가 발해농장이 있는 영안현 동경성으로 옮겨오면서 대종교의 교무와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35년 1월 15일 참교(參敎)로 뽑혔으며 이듬해에는 경의원부원장(經議院副院長)을 맡았다. 1941년에는 대종교서적간행회 회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안희제는 1942년 11월 대종교 역사상 가장 큰 수난인 임오교변(壬午敎變)을 겪어야만 하였다. 일제는 1942년 하반기에 들어서면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더욱 예민해져서 조선인에 대해 무차별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2년 10월에 발생한 조선어학회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임오교변이 일어났다.

종교인이자 국어학자인 이극로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대종교 교주인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가 드러났다. 일제는 이 편지를 빌미로 대종교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였다고 하면서 대종교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한 것이다. 모두 25명이 잡혀 들어가 모진 고문을 받다가 그 가운데 열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안희제도 이때 감옥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9개월 만에 병보석에서 풀려났지만, 이듬해인 1943년 8월 3일 영제병원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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