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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呂運亨]

민족 독립과 좌우 통합을 위해 소통하고 타협한 대중 정치가

1886년(고종 23) ~ 1947년

여운형 대표 이미지

여운형

공훈전자사료관(국가보훈처)

1 머리말

여운형(呂運亨)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신학문을 공부하고 계몽운동에 나섰으며,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된 후 언론과 체육계에서 활동하면서 식민지 말에는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만들어 독립을 준비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중도적 좌파의 입장에서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에 나섰으나 1947년 7월 극우청년에게 암살당하였다.

2 여운형의 신학문 수학과 계몽운동

여운형의 집안은 대대로 소론 계열에 속하는 양반가문이었다. 여운형은 14살 때 서울에 올라가 삼촌 여병현의 도움으로 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인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배재학당 이외에도 여운형은 흥화학교(興化學校), 우무학교 등에서 계속 신학문을 익혔다.

1907년 여운형은 고향 양평의 집에서 ‘기독교 광동학교’라는 문패를 걸고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여운형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부국강병의 길이며 독립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물질문명의 배후에는 기독교 정신이 있으며 이 정신으로 인격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은 해 금연을 통해 돈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개되자 여운형은 양평에 지회를 설치해 활동하는 한편, 솔선하여 담배를 끊어버렸다. 아버지의 장례절차가 끝난 1908년에는 집안의 신주단지를 깨뜨리고 노비를 해방시켜주는 등 당시로선 혁신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탈상 후 서울에 올라온 여운형은 당시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의 중심지였던 승동교회(勝洞敎會)를 출입했다. 이곳에서 만난 이동녕, 이회영, 안창호, 최남선, 김좌진 등의 애국정신과 활동은 청년 여운형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1910년 양양 군수 남궁억의 초청으로 강릉으로 간 여운형은 초당의숙에서 청년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내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애국사상을 가르치던 초당의숙은 메이지 연호 사용을 거부하다가 폐교되었다.

초당의숙 폐교 후 다시 서울로 올라온 여운형은 계속 기독교 관련 활동에 종사했다. 1912년에는 평양의 장로교회연합신학교에 입학하기까지 했다. 이 무렵 소위 105인 사건이 터졌다.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도 105명이 당시 데라우치(寺内 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되지 않았던 이승만, 김규식 등은 국외로 망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1914년 여운형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3 중국과 식민지 조선에서의 독립운동

중국 금릉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여운형은 곧 상해로 갔다. 여운형은 1차 세계대전 뒤 세계 질서가 완전히 바뀔 것을 예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장덕수, 조동호 등 34인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했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에 파견했다.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인사들을 통해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적극 관여했다. 그리고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외무차장에 추대되었지만, 임시정부가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을 우대하기로 결정하자 곧 임시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대신 상해 거류민단 단장으로서 독자적으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폭발과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당황한 일본은 일단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 사회지도층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시도했다. 합리적이며 비폭력적인 노선을 걷고 있던 여운형에게도 일본의 공작이 시도되었다. 1919년 8월 일본 정부는 일본 기독교계를 통해 여운형을 일본 동경으로 초청하였다. 독립운동가가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오해를 살 소지가 충분했다. 실제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여운형의 일본 방문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11월 18일부터 12월 1일까지 여운형은 장덕수 등 측근들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정부는 여운형이 마치 ‘자치운동’을 하기 위해 일본에 온 것인 양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여운형에게 자치운동을 권하면서 정치적인 지위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일본 정부의 신분보장 약속을 이용하여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공개적으로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여운형의 일본 방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차장이 적진에 뛰어들어 당당히 한국의 독립을 주장한 독립운동사상 유례없는 화려한 성과였고, 여운형이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은 제국주의 비판과 약소국 해방, 그리고 모든 사람의 평등과 강조하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 1920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했다.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의 번역부원으로서 『공산당선언』, 『영국의 노동조합운동』 등을 번역하는 등 사회주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1921년 12월에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의 최고지도자 레닌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여운형의 고려공산당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파벌 싸움 때문에 고려공산당이 해산된 것이 1차적인 이유였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한 여운형에게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당 활동에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이후 여운형은 상해 임시정부를 개혁하는 일에 전념했다. 여운형의 생각은 임시정부를 광범한 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한 조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개혁을 둘러싸고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분열되었고, 이러한 분열에 좌절감을 느낀 여운형은 1920년대 중반부터 독립운동 일선에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1929년 7월 여운형은 상해에서 일본영사관의 경찰들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당했다.

상해에서 체포되어 식민지 조선으로 호송된 여운형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1932년 7월 석방되었다. 이제부터 여운형은 국내에서만 생활해야 했다. 우선 여운형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사장에 취임하였다. 신문사 사장이 된 여운형이 가장 중시한 것은 신문을 통해 일본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하고 민족의식과 주체의식을 선전하는 일이었다. 또한 여운형은 신문사 활동과 함께 체육계 활동에도 매진했다. 여운형은 스포츠를 좋아했고 스스로 단련된 육체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여운형 주위에는 운동선수 또는 청년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여운형은 각종 경기를 주최하고 후원하며 참관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청년학생들에게 책임감을 북돋우고 단결과 희생의 정신을 불어넣어 궁극적으로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그 결과 1945년 해방 직후 여운형은 조선체육회 회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여운형의 활동 근거였던 『조선중앙일보』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여러 차례 탄압을 당했고, 결국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으로 여운형은 적극적인 활동 무대를 잃었다. 하지만 여운형은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여러 차례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일본의 동향을 살피고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지하운동을 모색하였다. 결국 여운형은 1942년 12월 도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도중 “일본의 패배를 선전했다”는 이유로 시모노세키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7개월 간 다시 감옥생활을 하였다.

여운형은 1943년 7월 집행유예 형을 받고 감옥에서 나왔다. 이미 형무소 수감 시절부터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국내에 비밀독립운동 조직을 만들 계획을 세웠던 여운형은, 출옥 후 동지들을 규합하여 마침내 ‘조선건국동맹’의 전신인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조선민족해방연맹’은 먼저 국내에 조직을 만든 후 그 다음으로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과 연계해 전민족적인 연합전선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일제의 감시를 뚫고 드디어 1944년 8월 서울의 한 한의원에서 정식으로 새로운 독립운동조직이 탄생되었다. 조직의 이름은 ‘조선민족해방연맹’에서 ‘조선건국동맹’으로 바뀌었다. 해방 직전에 존재한 유일한 국내 독립운동의 전국적 조직체였던 조선건국동맹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이념을 불문하고 함께 참여하였다. 건국동맹은 일제의 전쟁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징용도피 선전, 징병 방해, 공장 태업, 군사시설 파괴 등을 시도하고, 학병, 징병, 징용 거부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던 일본은 1945년 8월 미국에 의해 2개의 원자폭탄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을 사전에 통보받은 조선총독부는, 전쟁이 끝난 후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그동안 일본인에 의해 고통당했던 한국인들이 일본의 항복 선언 후 일본인에게 보복을 가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한국인들 사이에 신망 있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에게 일본인들에 대한 안전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여운형이었다.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의 지시에 따라 정무총감 엔도(遠藤 柳作)는 일본의 항복 선언 직전인 1945년 8월 15일 아침에 여운형을 만났다. 그리고 여운형에게 치안유지권을 넘길 테니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일본이 미워도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해방 직후 미리 대처하지 못하면 예상치 못한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여운형은 정치범의 즉각 석방 등 5가지 조건을 조선총독부가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4 해방 직후 새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

1945년 8월 15일 정오 마침내 일본의 항복 선언이 나오자, 여운형은 학자이자 언론인으로 존경을 받던 안재홍과 손을 잡고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결성하였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안재홍은 부위원장을 맡았고 좌파와 우파의 주요 정치인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31일까지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를 설치하여 치안유지, 식량관리는 물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이라는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의 많은 지방조직들 역시 ‘인민위원회’로 재편되어 각 지역을 자치적으로 다스렸다. 인민공화국의 주석에는 이승만이, 부주석에는 여운형이, 내무부장에는 김구가 임명되었다. 물론 인민공화국의 내각 명단은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세력들의 참여 의사를 묻지 않고 발표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인민공화국은 건국준비위원회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은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건국준비위원회 내에서 좌파 세력이 우세해지면서 처음에 함께 했던 안재홍 등 우파 세력들이 이탈하였다. 우파들이 결집한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은 인민공화국 대신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추대할 것을 주장했다. 무엇보다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미군이 스스로 군사정부(미군정)를 설치하면서 인민공화국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았다. 여운형과 인민공화국은 미국이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워준 것을 감사하며 미군을 환영했지만, 미국은 오직 미군정만이 이 땅에서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상황은 여운형에게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갔다. 1945년 10월 중순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했다. 이미 이승만을 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했던 여운형은 이승만과도 협력하려 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한국민주당 세력과 손을 잡았다. 특히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 문제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자 여운형은 크게 실망했다. 인민공화국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은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여운형의 세력들을 하나씩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로써 인민공화국의 주도권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게 넘어갔다.

여운형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건국동맹 조직 때부터 함께 했던 동지를 중심으로 1945년 11월 12일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였다. 인민당은 공산당처럼 노동자와 농민을 우선하였지만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자본가와 지주까지도 포괄하는 훨씬 중도적이고 대중적인 정당이었다. 민주주의와 자주독립만 가능하다면 누구와도 소통하고 타협할 수 있다는 것이 여운형과 인민당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소통과 타협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민당 창당 직후 중국에서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임시정부의 정통성만을 주장했다.

5 좌우합작운동과 암살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三相會議)와 관련한 잘못된 보도가 조선에 전해지면서 소위 ‘신탁통치 파동’이 일어났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사항들을 절대지지한 좌파와 신탁통치를 반대한 우파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나면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좌우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여운형과 같이 중도적이고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정치인은 설 자리가 없었다. 신탁통치 파동의 와중에 모스크바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에 새로운 임시민주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1946년 3월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해방은 되었으나 38선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당한 조선이 통일된 국가로 조속히 독립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그러나 신탁통치 파동 이후 심화된 좌우 대립의 여파로 미국과 소련의 대화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자 미소의 분할점령이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민족적 단결을 위해서는 신탁통치 파동 이후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좌파와 우파가 싸움을 멈추고 진지하게 대화하고 타협해야만 했다. 이에 여운형은 오래 전 신한청년당 시절 자신과 호흡을 맞추었던 김규식과 접촉하였다. 우파 정치인이었지만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김규식 역시 여운형과 생각을 같이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지속적인 접촉의 결과 1946년 5월 25일 중도적인 성향의 좌파와 우파 사이에 좌우합작을 위한 첫 번째 모임이 열렸다. 첫 번째 모임 이후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후원 아래 탄력을 받았다. 좌우합작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좌파와 우파의 각 단체들은 이 모임에 파견할 대표들을 선출하였다. 드디어 1946년 7월 25일 정식으로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좌파를 주도하던 조선공산당이나 우파를 주도하던 이승만과 한민당이 노골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비판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곧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좌우합작 운동은 1946년 9월 이후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입법기관을 만들고자 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애초 여운형은 새로 만들어지는 남한 내 입법기관이 결국 미군정의 통치를 합리화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여 입법기관의 설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입법기관의 의원 중 절반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로 했고 입법기관이 여러 개혁들을 추진할 수 있다고 여운형을 설득했다. 결국 여운형은 조선공산당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법기관 설치에 합의했다. 그리고 10월 4일에는 그동안 좌파와 우파가 각각 주장한 원칙들을 바탕으로 좌우합작위원의 7개 원칙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입법기관 설치는 의원 선출 단계에서부터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모든 주민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도 않았고, 복잡한 간접 선거 과정에 우파와 결탁한 경찰들이 개입하여 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그 결과 당선된 의원의 대부분은 이승만이나 한국민주당 계열의 우파 정치인들이었다. 여운형은 물론 김규식까지 나서서 미군정에 이를 항의했지만 미군정은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갔다. 여운형이 심혈을 기울였던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기만책으로 인해 우파 중심의 입법기관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동안 좌우합작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던 여운형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946년 12월 4일 이 모든 상황에 책임을 지고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은퇴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1947년에 들어와 그동안 중단되었던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릴 가능성이 커지자 여운형은 1947년 1월 말 공식적으로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1947년 5월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던 여운형은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이후 미국은 소련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그리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던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과 미소공위 성공에 온 힘을 기울였던 여운형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청년들에 의해 해방 이후 12번째 테러를 당하고 파란만장했던 62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이후 여운형은 오랫동안 대한민국 사회에서 좌파 정치인으로 규정되어 잊힌 정치인이 되었으나,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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