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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제6대 조선총독(1931~1936)

1868년 ~ 1956년

우가키 가즈시게 대표 이미지

우가키(宇垣) 총독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우가키 가즈시게는 육군사관학교 제1기생으로, 1924년 이래 수차례 육군대신을 역임하며 군비 축소를 통해 군대 조직을 합리화하고 장비를 근대화하는 군사 개혁을 실행하였다. 그는 정치 수완을 인정받고, 육군 내 이른바 ‘우가키 파벌’을 이끌며 쿠데타의 주역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하였다. 하지만 1931년 쿠데타가 미수에 그치자, 육군대신을 사임한 후 예편해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농촌 진흥운동, 농공 병진 정책, 내선 융화 등을 실시함으로써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전시체제를 강화하는 것에 연동해 식민지 통치의 체제를 재편하였다. 하지만 1936년 2·26 사건 이후 일본에서 군부 세력이 확립되는 과정과 맞물려 그는 조선총독에서 사임하였다. 이듬해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결국 내각을 구성하지 못한 채 물러났다.

2 육군대신으로서 군비를 축소

우가키는 비젠(備前: 현재의 오카야마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교원 채용 시험에 합격하여 10대의 나이로 소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상경해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1891년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1900년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1902년 독일로 유학하였다. 유학 중 러·일 전쟁에 참전했고, 1906년 다시 독일로 건너가 공사관 주재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10년 육군 보병 대좌로 진급한 우가키는, 이후 육군성과 참모본부에서 중요 직책을 맡았다. 1911년에는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정부가 현역 무관에 한정해 육·해군대신을 임명하는 제도를 개정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해 좌천되기도 하였다. 1915년 그는 군무국 군사과장으로 복귀해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이듬해 참모본부 제1부장(작전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1923년 10월 육군차관, 이듬해 1924년 1월 육군대신에 임명되었다. 당시 황태자 저격 사건의 여파로 정부가 교체되면서 전임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그를 후임으로 추천하였다. 그는 1924~1927년, 1929~1931년에 걸쳐 육군대신을 역임하였다.

육군대신 우가키는 군축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군축이 이루어졌고, 1921~22년 워싱턴 회의에서 해군 군축이 결정되자 일본도 해군의 반대를 누르고 군축을 하였다. 육군에서는 1922~23년 육군대신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에 이어 1925년 우가키가 군축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일본은 간토 대지진 이후 군사 예산의 삭감을 위해 군축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어진 상태였다.

일본 정부는 21개 사단 중 4개 사단을 해체하는 등, 전체적으로 장병 3만4천여 명과 군마 6천 두를 삭감하였다. 대신 군축으로 확보된 예산으로 전차와 항공 부대, 자동차·통신·비행 학교 등을 신설하는 등 서구 열강의 군대에 비해 뒤떨어진 군사 장비를 근대화하였다. 군축을 명분으로 군대 조직을 축소하고 합리화하는 한편 군비를 일신한 것이다. 아울러 장교들 가운데 군축으로 발생한 과잉 인력을 학교에 배치하여 군사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 교련 제도를 병행하였다.

그 결과 군축에 따른 군사 예산의 삭감은 이전에 비해 약 10%에 머물렀고, 군비 근대화를 통해 미쓰비시 등 재벌이 큰 이익을 얻었다. 반면 단기간에 병력이 크게 감축되면서 장교들의 반발이 생겨났고, 이와 맞물려 육군 내 파벌 대립도 전개되었다. 이러한 부작용과 함께 실제 군비 근대화도 계획만큼 진행되지 못했지만, 우가키는 군축을 명분으로 한 군사 개혁으로 정치 수완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조슈(長州) 출신이 아니었지만 다나카 기이치의 뒤를 이어 육군 내 파벌을 이끌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1929년 우가키는 다시 육군대신에 취임하였다. 당시 정부는 긴축 정책과 함께 대외적으로는 미국·영국과의 협조, 대중국 관계의 쇄신, 군축 촉진 등을 추진하였다. 그도 육군대신으로서 군제 개혁에 나섰는데, 정책에 대한 육군 내부의 반발이 거세었다. 더욱이 1930년 열강의 해군력을 감축하기 위한 런던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 정계에서 이를 ‘연약 외교’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특히 육군 장교 20명이 사쿠라카이(櫻會)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국가 개조를 도모하였다. 그들은 정당의 사리사욕으로 내치와 외교가 막다른 곳에 이르렀으므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활기차고 밝은 국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 1931년 2월 내각 총리 대리인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가 의회 답변에서 천황이 이미 런던 조약을 비준하였음을 밝히자, 천황에게 런던 조약의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사카라카이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우가키를 총리로 하는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육군 내 우가키 파벌도 동조했다고 생각되는 쿠데타 계획은 3월에 돌연 유야무야되었고, 4월 정부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우가키도 육군대신에서 물러났다.

3 조선총독으로 취임

사임 후 우가키는 군사참의관에 임명되었고, 우가키 파벌의 후배들을 새로운 정부의 요직에 추천하였다.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육군대신에, 가나야 한조(金谷範三)가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육군대신 측근에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와 다테카와 요시쓰구(建川美次) 등이 실무를 맡았다. 그 후 우가키는 곧바로 예편하고 1931년 6월 조선총독으로 취임하였다.

사실 우가키는 일찍부터 일본인이 조선을 거쳐 만주 및 우수리 지역으로 이주하는 식민정책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조선을 완벽히 지배해야 하며, 그를 위해 조선 침략은 일본의 ‘당연한 권리’라고 인식하였다. 또 단기간이지만 1927년 4월부터 10월까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제네바의 군축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조선총독 대리를 맡기도 했다. 우가키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를 임명하였고 인사 쇄신의 명목으로 내무국장, 재무국장, 경무국장 등을 교체하였다. 이마이다는 도쿄제국대학 출신으로, 우가키가 육군대신이던 때 체신차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리고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조선 주둔 일본군 즉 조선군의 만주 파병 문제가 불거졌다.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가 관동군의 요청에 따라 펑톈(奉天)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1919년)으로 총독의 육·해군 통솔권이 해제되고 조선군 사령관에게 위임된 상태였지만, 조선군의 만주 파병은 칙령 없이 조선군 사령관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 육군 내 우가키 파벌과 관동군 사이의 대립을 보여주는 동시에, 만주국과 조선총독부의 대립으로 증폭되어 1930년대 전반 만주국과 조선총독부 사이에 이민·경제·치안 등의 정책에서 불협화음을 노출시켰다. 하지만 우가키 또한 만주사변을 ‘일본제국의 국운’과 연관된 중대사로 인식하고, 거국일치(擧國一致)와 국론 통일로써 선후(善後)의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가키는 조선총독으로서 본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에 집중하고, 본국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식민지를 구축하려 했다. 즉 철저히 지배자의 관점에서 조선을 바라보며, ‘적당히 빵을 주는’ 수준에서 조선인의 부(富)를 증식시키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융합 일치 이른바 내선 융화(內鮮融和)를 이루려 했다. 그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농촌(산촌·어촌 포함)을 대상으로 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조선소작조정령’을 공포하는 등 소작과 고리대 문제에 관해 대책을 제시하고, 이듬해 구제를 명분으로 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농가 갱생 계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농가 갱생을 지도하는 방법으로 정신 개조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농촌 안정을 도모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흥운동에 대한 우가키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와 민족 독립 사상을 억압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생활의 안정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굶주린 농민이야말로 적화(赤化)의 온상으로, 그것을 차단하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와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대책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농촌 진흥운동을 추진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토지 집중화와 소작농 증가라는 상황에서 증산(增産)과 자급자족에 의한 지출 절감 등으로 농촌을 구제할 수는 없었다. 원래 진흥운동은 세계 대공황의 영향에 대응해 일본 정부가 추진한 농산어촌 경제갱생운동, 일명 자력갱생운동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진흥운동은 중·일 전쟁 이후 총력전(總力戰) 체제에서 농업생산력의 확충에 활용되었다. 농촌을 조직화하고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상응하는 농업 통제를 확립하는 한편, 지방행정의 말단까지 활용해 국가정신총동원 등을 실행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다음으로 조선총독부는 농공 병진(農工竝進) 정책을 전개하였다. 세계 대공황 이후 일본은 식민지와 만주 지역을 포괄하는 경제구조를 만들고, 열강의 블록 경제에 대응해 엔화 블록을 확립하여 하였다. 그를 위해서 조선 경제를 농업 중심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공업화가 이루어진 단계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에 총독부는 남면북양(南棉北羊), 북선(北鮮) 개척, 지하자원 발굴, 공장지대 신설, 전력 개발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중·남부 지방에 면화 생산, 북부 지방에 면양 사육을 강제하여 일본으로 방적·방직 산업의 원료를 원활히 공급하려 했다. 그리고 북선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의 국유림을 개발하고, 원래 거주하던 화전민을 몰아냈다. 무엇보다 자원 개발을 내세워 조선 전역에 금 생산을 장려했고, 철광석을 비롯해 납·아연·텅스텐·흑연 등의 광산 개발을 촉진하였다. 더불어 금속·기계·조선 등 중공업의 확대를 지원하였다. 이에 일본 자본은 풍부한 원료와 값싼 노동력이 있는 조선에 적극적으로 공장을 세웠고, 흥남과 청진 일대에 새로이 공장지대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1931년 조선 소재 공장 수와 생산액은 각각 4,613개, 2억 7500여만 원이었는데 1936년에는 5,927개, 7억 2천만 원으로 늘어났다. 단 산업 구성의 측면에서 방적·식품 등 경공업의 비중이 57.9%이고, 금속·기계·화학 등 중공업 비중은 27.9%에 머물렀다. 농공 병진 정책은 공업화를 명분으로 조선을 원료 기지로 만들고, 조선에서 자원을 수탈하는 동시에 일본 자본을 위한 수요를 창출한 것이었다. 공업화의 이익은 거의 일본 자본의 몫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전시경제와 총동원 체제를 강화하는 것과 연동해, 우가키는 식민지 통치의 체제를 재편하며 무엇보다 내선 융화(內鮮融和)를 강조하였다. 3.1 운동 이래 조선총독부는 일본과 조선의 동화(同化)를 추구하는 정책을 실시하는데, 만주사변 이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인의 황민화(皇民化) 즉 내지인화(일본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실 내선 융화를 강조한 이면에 우가키는 모든 면에서 일본이 우위에 있고, 조선인은 여전히 독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야말로 조선 지배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조선의 민족 독립 운동을 근본적으로 탄압하려 하였다. 실제 당시 조선총독부가 민족운동 단체 및 혁명 조직을 검거하고 탄압하여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 예로 1932년 조선의 농민조합은 1,415개로 인원이 30만 명에 달했지만, 이듬해 조합은 1,100개, 인원은 1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4 군부와 정치적으로 대립

1936년 8월 우가키는 조선총독에서 물러났다. 일본제국이 정예의 군대 특히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육군에 기초한다는 신념을 가졌지만, 그는 1931년 쿠데타 미수 사건 이후 점차 육군 내에서 세력을 잃어갔다.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는 육군을 통제하지 못했고, 만주사변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부 교체와 함께 우가키 파벌 대부분이 물러났다.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일본에서 정당 중심의 의회 정치가 쇠퇴하고 군인 출신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며 이른바 군부 세력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우가키 파벌은 1936년 젊은 장교들이 주도한 쿠데타 미수 사건(2·26 사건)을 계기로 일소되었다.

그런데 군부와 밀접한 정부에 대해 정당이 반발하여 1937년 1월 정부가 교체되는데, 원로(元老)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가 우가키를 후임 총리로 추천하였다. 사이온지는 우가키의 군축을 높이 평가하며, 그가 군부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이에 천황이 우가키에게 정부를 조직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육군이 거세게 반발했고, 결국 우가키는 현역 군인 가운데 육군대신을 정하지 못한 채 정부 구성에 실패하였다. 이후 1938년 외무대신 겸 탁무대신(拓務大臣)으로 임명되었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사임하였다. 1944년에는 다쿠쇼쿠 대학(拓殖大學) 학장에 취임하였고, 패전 이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1952년 추방이 해제되자, 이듬해 제3회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임기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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