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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李康秊]

화서학파 의병항쟁의 중심

1858년(철종 9) ~ 1908년(순종 2)

이강년 대표 이미지

이강년 생가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崗)으로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주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을미사변 이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후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군대 해산이 단행되자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 13도창의군에 참여하였고,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에는 경기 동북부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다수의 전과를 올렸다. 1908년 7월 2일 본거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전투 중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1908년 10월 13일 일본에 의해 처형되었다.

2 을미사변과 의병봉기, 유인석과 만나다

1858년 12월 경상북도 문경 가은읍 도태리에서 태어났다. 세종의 둘째 형 효령대군의 19세손이지만 의병 봉기 전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2세가 되던 1880년(고종 17년) 무과에 급제하여 종6품 선전관이 되었으나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정국 혼란이 계속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으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1896년 2월 가은 도태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켜 단발을 강요하고 안동의병을 공격해 주민들에게 원성을 산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 김인담(金仁覃)을 체포해 농암(籠巖)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후 제천지역의 의병들과 합류해 활동하기 위해 5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고모성이라고도 불리는 문경 모곡의 석현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곧바로 관군의 공격을 받고 의진이 와해되었다. 고모성 전투 이후 잔존 의병을 수습해 안동으로 이동하여 안동의진(安東義陣)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을 만나 연합 방안에 대한 방법을 논의했으나 실패하고 의병이 세력을 떨치고 있는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만나보고 그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수안보와 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배한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진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다. 요동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온 후 단양 금채동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3 의병 재기·호좌창의대장으로 활동하다

이강년은 1901년경 고향 문경으로 돌아와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소식을 듣고 의진 구성을 시도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실행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정미7조약에 근거해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강년은 자신을 스스로 ‘호좌(湖左)의병장’이라고 불렸다. 이는 스승 유인석이 을미의병시절 거느린 ‘호좌창의군(湖左倡義軍)’의 후신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었다. 호좌의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호좌의병장 이강년, 중군장 김상태(金尙台), 전군장 윤기영(尹基榮), 좌군장 이용로, 우군장 이준봉, 우선봉 백남규(白南奎), 좌선봉 하한서(河漢瑞), 독전장 이만원(李萬源), 감군 이세영이었다. 이강년의 의병활동 지역은 주로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 일대에 걸쳐있었다. 그 밑에서 활약한 주요 의병장들과 의병들도 대부분 이 지역출신자들이었다.

의병 재기 이후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이후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기로 결의하였지만 민긍호 부대가 일본군에게 차단을 당해 충주성 공격에 합류하지 못하면서 단독으로 충주 공격에 나선 이강년의 호좌의진은 1907년 8월 23일 충주성 북문 5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수비에 막혀 충주성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충주성 공격 실패 이후 이강년은 근거지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강년은 의병을 이끌고 문경 조령 지역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이강년이 문경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이유는 자신의 고향이라는 점도 작용하였지만, 이와 함께 제천지역에 증파된 일본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또한 조령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의병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강년이 문경으로 근거지를 옮기자 이강년 의진에 합류하기 위해 각지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의병들이 모여들자 이강년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이들을 요충지에 배치하고 여러 의진과 연합하여 본격적인 항일항쟁을 준비하였다. 1907년 9월초에 이르면 이강년 의진의 규모가 증가하면서 전국의병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고 여러 의진이 문경에 집결하게 된다. 의병의 전력이 강화되면서 이들은 일본군의 시설물을 파괴하는 등 세력을 떨치게 된다. 그러자 일본군은 문경 지역에 대규모로 군대를 추가 투입하였다. 일본군은 조령 각지의 주막과 가옥을 불태우며 의병항쟁의 근거지를 파괴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9월 16일에는 싸릿재(杻峙),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故里平), 10월 23일에는 백자동(柏子洞)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각도 의병장을 따라 양주에 집결해 13도창의군을 편성하자, 북상하여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참여하였다.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강년 의진은 경기 동북부지역에 머무르며 1908년 2월 17일의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를 비롯해 동년 2월 26일의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동년 3월 12일의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동년 4월의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4 마지막 교전과 순국

이강년이 이끌던 의병부대는 엄격한 군율로 기강이 서 있어서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의병부대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력의 소모가 이어졌고. 결국 13도창의군 이후 활동하던 경기 동북부를 떠나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 결과 자신이 활동하던 지역인 호서, 영남지역으로 회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이동하여 가평군 일대에서 겨울을 보내고 영월을 거쳐 청풍으로 남하하며 근거지를 옮겼다. 하지만 1908년 7월 2일, 일본군과의 마지막 교전에서 끝내 패배하고 자신도 총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되었다. 이강년은 체포 직후 일본군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려 하자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일본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저항의 뜻을 분명히 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무정하다 탄환이여
발목을 상하여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으면
욕보지 않고 요경(瑤京)에 갈 것을

이후 수원의 일본수비대에 구류되었다가 1908년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평리원으로 옮겨져 재판을 받았고 “호좌창의대장이라 자칭하고 도당수백명을 소집하여 내란을 일으켜 충청, 경기, 강원 각 도내를 횡행하며 수십회 토벌과 교전”하였다는 이유로 같은 해 9월 22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죽기 전 아들들과 의병들에게 자신의 유언을 남겼다.

너의 아비는 평생 혈충(血忠)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였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래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들과 함께 나 죽은 뒤 3일 안으로 박장(薄葬)토록 하라.

또한 전국의 의병들에게는 “강년(康秊)은 양심이 격동함을 참을 수 없어 갑오년(1896년) 이래로, 13년간 두 번의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나 30여 회전(會戰)에서 적추(敵酋) 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중략)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의 세력이 성하다 하여 본래의 뜻을 어기지 말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하시어 광명한 날을 기다리시라”라는 고결문을 남기고 1908년 10월 13일 오전 10시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강년은 22세의 나이에 군문에 들어섰고, 이후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벼슬을 버리고 13년간 의병장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1896년 고모성 전투, 수안보 전투, 제천 남산 전투, 1907년 제천읍 전투, 조령 전투, 갈평리 전투, 괴산 연풍 전투, 1908년 가평 용소동 전투, 인제 백담사 전투, 제천 적성 전투 등 수십 차례의 중요한 전투를 치르며 일제 침략에 저항한 의병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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