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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李東寧]

민족의 대동단결과 해방을 꿈꾼 지도자

1869년(고종 6) ~ 1940년

이동녕 대표 이미지

임시 정부 국무 위원 일동(가흥, 1935. 11), 앞줄 가운데가 이동녕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 개요

1869년 2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 이명은 이량(李亮)이다. 『제국신문(帝國新聞)』 논설위원, 독립협회 회원으로 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다. 망명 이후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 권업회(勸業會)의 의사부 임시의사원 직을 담당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국무총리, 군무총장, 법무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균열이 생기고 약화되자, 국무총리, 국무령, 주석이 되어 세력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데 앞장섰다. 1940년 3월, 지병이었던 폐렴이 악화되어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 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하다

이동녕(李東寧)은 1869년 2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 이명은 이량(李亮)이다. 집안의 전통에 따라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다. 1885년 서울 봉익동으로 이사하였으나, 부친인 이병옥(李炳鋈)이 영해군수로 부임하면서 함께 이주했다. 부친을 도와 선정을 베풀어 ‘작은 군수’라고도 불렸다. 1891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獨立協會) 간사원이 되어 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이종일(李鍾一)의 권유로 『제국신문』의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와 함께 독립협회 간부로써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친러세력의 정계 퇴진을 위한 철야상소시위운동, 만민공동회 개최, 독립협회 회원 석방과 정권교체, 의회 설립을 시위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1899년, 개화운동 및 자강운동 단체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 1903년, 청년단체이자 구국운동 단체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김구(金九), 기산도(奇山度), 정순민(鄭淳民), 이준(李儁) 등과 함께 반대투쟁을 주도했다.

1906년 5월,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만주로 이동하였다. 5개월 후 북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은 만주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이었다. 1년 뒤,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임명되면서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이갑(李甲) 등과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 설립에 앞장섰다. 1909년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설립에 참여하였고, 다음 해에는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3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의 길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신민회 회원 및 가족들과 함께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甫) 추가가(鄒家街)로 이주하였다. 1911년, 이석영(李石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 설립을 주도했다. 이와 함께 군사교육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권업회(勸業會)의 의사부 임시의사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즈음 대종교에 가입하였다. 다음해에는 대종교 서도본사(西道本司)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 최초의 망명정부였던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수립에 앞장섰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과 러시아가 동맹국이 되면서 일본을 대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려던 본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朝鮮人政治亡命者會議)’에 참석했다. 같은 해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회장 문창범(文昌範)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여운형(呂運亨)등과 만났으며, 파리평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중국 상해에 독립운동 ‘최고기관’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9년, 길림(吉林)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다. 같은 해 3월 하순 경, 북경을 거쳐 상해로 이동하였다. 이 때 독립임시사무소 ‘8인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독립임시사무소는 독립운동을 위한 ‘최고 지도기관’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결성된 기관이었다. 이동녕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10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5개월 뒤인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되었다. 이후 「임시지방연통제(臨時地方聯通制)」를 개정하고 시행했으며, 「내무부포고(內務部布告) 제1호」를 발표하여 ‘3·1독립선언기념식’을 진행하자고 주장했다.

4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는 버팀목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놓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이동녕은 이를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1921년 1월 국무총리 임시대리로 선임되었으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2년 7월에는 ‘대동단결’을 주장하며, 임시정부 전 현직 각료 및 임시의정원 의원들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였다.

1924년 4월, 국무총리로 정시 취임하였으며, 2개월 후에는 군무총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임시대통령 직무도 대행하게 되었다. 1925년, 임시의정원의장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제도로 개정되자 국무령이 되었으며, 법무총장도 겸임하였다. 1927년, 「대한민국임시약헌(大韓民國臨時約憲)」을 개정·공포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바꾸었다. 같은 해 8월 주석 겸 법무장에 선출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유지하는 데 앞장섰다.

1930년 1월에는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여당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초대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독립당의 당의(黨義)와 당강(黨綱)을 입안하기 위한 기초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범무장직을 연임하게 되었다. 1932년 1월, 4월 김구와 함께 이봉창의 ‘동경의거’,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진행되는 데 협의하였다. 이후 절강성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11월, 다시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무정부 상태에 놓인 임시정부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11월 김구, 이시영, 양우조(楊宇朝), 엄항석(嚴恒燮), 차리석(車利錫), 조성환(曺成煥)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결성하고 이사로 선임되었다. 일제의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진강, 장사(長沙), 광주(廣州), 유주(柳州), 기강으로 이전하는 것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속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7년 7월, 노구고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한국국민당 대표의 자격으로 한국독립당 홍진(洪震), 조선혁명당 이청천(李靑天, 지청천) 등과 남경에서 회의를 가졌으며, 3당 합당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 작성에 앞장섰다. 1939년 11월에는 조성환을 단장으로 한 군사특파단을 서안으로 파견하였다. 1940년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었고 급성폐렴으로 순국하였다. 해방 이후 사회장으로 봉환식이 거행되었고 효창원에 인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는 이동녕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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