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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李東輝]

항러시아 한인사회 독립운동을 이끈 초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1873년(고종 10) ~ 1935년

이동휘 대표 이미지

이동휘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의 군인, 정치가로 활동했으며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 활동하였다.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가 설립되는 데 주축이 되었다. 1913년 2월에서 3월경 간도 연길현 용정 명동촌으로 망명하였다. 1914년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부통령직을 담당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 찬성하고 한인사회당 세력과 함께 합류하였다. 초대 국무총리가 되어 활동하였다. 이승만 불심임안이 관철되지 않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탈퇴하였고, 고려공산당의 지도자로써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다.

2 한말 구국운동의 선봉장

이동휘(李東輝)는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하빈(河濱), 아호는 성재(誠齋)이다. 집안은 부유하지 않았다. 아들을 아전으로 출세시키고자 했던 부친 이승교(李承橋)는 이동휘를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으로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군수였던 홍종후가 폭정을 일삼자 이를 규탄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1896년 이용익(李容翊)의 도움으로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절업 이후 궁전진위대 근위장교, 원수부 군무국원,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 직을 담당했다.

1903년 국방요충지인 강화도의 군사를 총괄하는 진위대장으로 임명되어 1905년까지 근무하였다. 전임 진위대장 윤철규의 횡령 및 병사 요식비 착취 사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등 부패장교와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하는 활동으로 명성이 높았다. 1903년 11월,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미국인 선교사 벙커와 박능일 목사가 운영하던 잠무의숙을 확대·발전시켜 합일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강화도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였다. 1904년에는 보창학교 설립을 주도하였고, 대한협동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토지침탈, 인권유린, 국법침탈행위 등을 규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위법성을 지적하는 「유소」, 「유고이천만동포형제서」, 「유고임공사서」 등을 작성하여 반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06년 대한자강회 지부를 강화도에 유치하고 지부장이 되었으며, 서우학회(西友學會)에도 가입하였다. 같은 해 10월 한북흥학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평의장직을 담당했다.

1907년, 한북흥학회 부회장 자격으로 지회설립을 독려하였으며, 함경도 각지를 돌며 학교설립을 촉구하였다. 이와 함께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이갑(李甲)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강화도 군민들이 봉기하였는데, 통감부는 그 배후조종자로 이동휘를 지목하고 체포했다. 미국인 선교사 벙커(Bunker,D. A., 房巨)의 노력으로 석방된 이후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했다. ‘한국병합’ 이후인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간도에 무관학교 설립.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는 혐의로 인천 무의도에 유배되었다. 1912년 6월에서야 유배에서 해제될 수 있었다.

3 북간도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해지자 항일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로 망명하기로 결정했다. 1913년 2월에서 3월경 간도 연길현 용정 명동촌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재만한인을 위해 농업 진흥책을 강구하고 학교설립 등을 추진했다.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명동학교 내 명동여학교가 부설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무관을 양성하기 위해 동림무관학교, 밀살무관학교를 설립했다.

1913년 9월, 권업회(勸業會)의 초청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이주했다.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이동휘는 남도파·북도파 등 지방색을 타파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각파의 중요 인물을 초대하여 파벌을 청산하고 조직을 정비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권업회의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민중계몽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14년, 이상설(李相卨), 이종호(李鍾浩), 이동녕(李東寧),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으며, 대한광복군정부의 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자, 왕청현 수분대전자 태평구에 있던 동림무관학교로 이동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5년, 동녕현 산분구에 북빈의용단, 왕청현 나자구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훈춘 지역과 연해주 지역의 무장 세력을 연계하여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1917년 3월, 이동휘는 러시아에서 일어난 2월 혁명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새롭게 일을 도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으나 러시아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독일간첩 혐의’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감옥에서 볼셰비키와 접촉하고 『공산당 선언』, 레닌의 『유물론』ㆍ『경험비판론』 등을 탐독했다. 석방 된 이후 볼셰비키세와의 연대를 통해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1918년 4월, 극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노체코프를 만났으며, 독일 포로장교와 회견을 갖고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대응방안을 논의하였다. 같은 달,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柳東說), 김립(金立), 오성묵(吳成默), 오와실리, 이인섭(李仁燮) 등과 함께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창당하였으며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2월 25일,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가 전로국조선인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조직되었으며,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8월, 대한국민의회 특별상설의회에서 상해임시정부 특사 현순과 김성겸의 제안을 토의하였다. 상해임시정부 특사의 제안은 상해 임시정부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국내 한성정부를 봉대하고 해산하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이동휘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새롭게 출범할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직을 수행하기 위해 한인사회당 세력들과 함께 상해로 향했다. 9월 18일 상해해 도착한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시국 문제에 대해 논의한 후 러시아 정부의 신임과 원조를 받는 데 합의하였다. 2개월 후인 1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립하고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자금을 관할하고 독점하였다. 미주로부터의 독립운동자금이 끊어지자 임시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었다. 1920년 5월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이승만 불신임안을 제출했지만 무산되었고, 다음 달에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였다. 1920년 7월 김립과 관련된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다시 국무총리에 복귀하였다. 1920년 8월에는 한인사회당의 명칭을 고려공산당으로 바꾸었으며, 책임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과의 갈등은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한 직후 더욱 명확해졌다. 1921년 1월에 개최된 국무원회의에서 이승만에게 위임청원문제를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혁명위원회 성격의 국무위원제를 채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승만을 비롯한 다른 각원들의 반대로 이동휘의 주장을 채용되지 못했다. 독립운동의 방향성에서 마찰을 빚게 되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자 1921년 1월 24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4 고려공산당을 이끄는 지도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탈퇴한 후 1921년 5월 20일 고려공산당 대표자 회의에서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3일후에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정식으로 출범시켰고, 레닌정부에서 지원한 자금으로 간도·만주 방면에서 공산주의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6월 19일, 박진순, 홍도와 함께 모스크바 파견대표로 선정되었다. 10월 말, 모스크바에 도착 후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면담했다. 11월 28일, 상해파·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통합하기 위한 고려임시연합간부가 설치되었고,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5월에는 치타에서 상해파·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통합을 위한 임시연합간부회의에 참석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통합당대회에 상해파 대표로 참석하고 집행부로 선임되었다.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상해파·이르쿠츠크파를 해산 후 코민테른 극동국 산하에 꼬르뷰로(고려총국)을 설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꼬르뷰로를 중심으로 한국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추진하고 하였다. 이동휘는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상해파를 대표하여 꼬르뷰로 위원이 되었다. 하지만 1923년 말경, 국제공산당 동양부가 한명세(韓明世)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자 꼬르뷰로 위원을 사퇴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1924년 꼬르뷰로가 해산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당도서관으로 배치되었다. 한직이었지만 도서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 국제혁명자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에서 1935년까지 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 자택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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