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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李昇薰]

평안도의 장돌뱅이에서 전국적인 민족 지도자로

1864년(고종 1) ~ 1930년

이승훈 대표 이미지

이승훈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이승훈은 평안도에서 태어나 장돌뱅이로 큰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는 일본 자본과의 경쟁이라고 하는 높은 장벽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상인으로서 엄혹한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는 이 무렵 안창호(安昌浩)와 만났다. 그 결과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1919년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3·1 운동의 준비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전국적인 민족 지도자가 되도록 하였다.

2 장돌뱅이로 재산을 모으다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인환(李寅煥)이다. 자는 승훈(昇薰)이고 호는 남강(南崗)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승일(昇日)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본명인 이인환보다는 이승훈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3·1 운동 당시 신문조서에는 본명인 이인환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승훈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사망하여 할머니 손에 자랐다. 열 살 때는 아버지와 할머니마저 사망하여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것을 중단하고 일찍부터 돈벌이에 나서야만 하였다. 그는 11살 되던 해 처음으로 김리현상점(金利賢商店)에 사환으로 들어갔으며, 13살 때에는 유기상(鍮器商) 임일권상점(林逸權商店)으로 옮겼다.

그는 임일권상점에서 외교원 겸 수금원 즉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15세 때 혼인하면서 점원 생활을 그만두고 독립하여 유기 행상(行商)에 나섰다. 처음에는 지게에 숟가락이나 놋그릇을 싣고 납청정(納淸亭) 주변의 장시(場市)를 순회하였지만 점차 영업지역을 확대하여 황해도와 서울까지 그 발길이 미쳤다. 그 결과 25세 되던 해에는 자신의 상점과 유기공장을 차릴 수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평안도 일대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승훈이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니 공장과 점포는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사업을 재건하였다. 1901년에는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여 무역업에도 손을 댔으며, 서울과 인천 등지를 내왕하면서 석유·종이·건축자재·일용 잡화 등의 총판을 맡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이 무렵 자본금이 70만 냥이 넘는 사업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3 상인으로서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다

순풍에 돛단 듯이 순항하던 이승훈의 사업은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기울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 도중 당시 주요한 군수물자였던 소가죽에 거액을 투자했다가 실패한 것도 그의 사업이 기울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 자본과의 경쟁에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값싼 일본제 도자기가 조선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승훈의 주력 사업이었던 유기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가 새롭게 개척한 무역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탈리아 기업인 파마양행(巴馬洋行)과 합작하여 서양의 물품을 조선에 수입하고 조선의 특산품을 서양에 수출하려 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서양과의 직접 거래가 일본 상품 불매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염려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였다.

당시 다른 지역에 비해서 경제적 발전이 두드러졌던 평안도 지역의 상인들은 대부분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이승훈뿐 아니라 평안도 지역 상인들 대부분이 반일의식이 높았고 일제의 침략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일제가 1909년 통감부령으로 시장세를 공포하자 평안도 지역 상인들이 이를 집단적으로 거부한 항세사건(抗稅事件)을 들 수 있다.

이승훈은 일본 자본과의 경쟁에 맞서기 위한 방안으로 이른바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이라고 하는 것을 제시하였다. 관서자문론이란 일본 자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 상인들이 힘을 합쳐 자본의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우선 관서 지방(평안도와 황해도 북부)의 상공업자들부터 합자(合資)하여 회사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이렇게 상인으로서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4 안창호와의 만남

이승훈은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를 처음 만났다. 그는 교육 진흥의 필요성에 대한 강연을 듣고 깊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안창호를 만난 후 술과 담배를 끊고 단발을 결행하였다. 당시 안창호가 주도하여 만든 비밀결사인 신민회에도 가입하였다. 신민회 회원들과 힘을 합쳐 평양 마산동에 자기(瓷器)회사를 설립하여 값싼 일본제 도자기와 맞서기도 하였다.

이승훈은 정주에 돌아와 신식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가 가장 먼저 세운 학교는 강명의숙(講明義塾)이었다. 강명의숙은 한문을 가르치던 서당을 개편한 것으로 산술·역사·지리·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이것은 안창호가 자신의 고향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한 것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이승훈은 강명의숙과는 별도로 오산학교(五山學校)도 설립하였다. 강명의숙이 초급 단계의 학교라고 한다면 오산학교는 중급 단계의 학교였다. 오산학교는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이승훈은 처음에는 향교의 재산을 바탕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반발이 심하여 결국 혼자의 힘으로 이 학교를 설립해야만 하였다.

오산학교는 처음 설립될 때 백이행(白彛行)이 교장을 맡았으며 교사로는 구학문에 조예가 깊은 여준(呂準)과 육군연성학교를 마친 서진순(徐進淳)이 있었다. 이후 이광수(李光洙)와 조만식(曺晩植) 등이 교사로 부임하였다. 백이행은 일제강점기 백병원을 세운 유명한 외과의사인 백인제(白麟濟)의 당숙이다. 백인제도 오산학교를 나왔다.

이승훈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마자 안악사건(安岳事件)과 105인 사건에 연이어 휘말려 옥고(獄苦)를 치러야만 하였다. 안악사건이란 안중근(安重根)의 사촌 아우 안명근(安明根)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된 사건이었다. 105인 사건이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을 시도하였다는 이유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검거한 사건이었다. 서북지역의 신민회 인사들이 두 사건에 연루되어 대거 검거되었는데 이승훈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1911년 2월 안악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뒤이어 105인사건이 일어나면서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재판 결과 징역 6년이 언도되었으며, 1915년 2월 가출옥으로 석방될 때까지 오랜 수감 생활을 견뎌야만 하였다.

5 기독교를 대표하여 3·1 운동을 준비하다

이승훈은 1910년 평양에서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감옥 속에서도 성경읽기와 기도 등 신앙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1915년 석방되자마자 세례를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에는 장로로 임명되어 평북노회(平北老會, 노회는 장로교에서 입법과 사법을 담당하는 기구)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독교에 귀의하였기 때문에 1919년 3·1 운동의 준비과정에서도 기독교계의 대표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3·1 운동 당시 고향인 정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1919년 2월 두 사람이 그를 방문하였다. 한 사람은 정주 출신 독립운동가인 선우혁(鮮于爀)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오산학교 졸업생 김도태(金道泰)였다. 선우혁은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團)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면서 국내에서도 호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도태는 서울에서 3·1 운동을 준비하던 현상윤(玄相允)의 부탁으로 그를 방문하였다.

이승훈은 서울에 올라와 송진우(宋鎭禹)를 만나 3·1 운동에 기독교계가 합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안도로 내려와 선천의 양전백(梁甸伯) 목사와 이명룡(李明龍) 장로,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목사와 신홍식(申洪植) 목사 등 기독교계 인사들을 만났다. 그는 기독교계의 동의를 얻은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 천도교를 대표하는 최린(崔麟)을 만나 함께 3·1 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써 기독교와 천도교 중심으로 3·1 운동을 위한 준비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이승훈은 1919년 3월 1일 태화관(泰和館)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후 곧바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재판 결과 징역 3년이 언도되었다. 그는 2년여에 걸친 옥고를 치르고 1922년 7월 2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석방될 수 있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출소하였다.

6 전국적인 지도자가 되다...

이승훈은 3·1 운동으로 인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풀려나자 이미 전국적인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출옥한 후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세상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서 서울로 소환되어 여러 사회활동을 전개해야만 하였다.

이승훈이 가장 먼저 참여한 사회활동은 민립대학설립운동이었다. 그는 1922년 11월 23일 열린 민립대학기성준비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이듬해 4월 민립대학기성회가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과 사교부를 담당하는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사교부가 담당할 업무는 총독부와 교섭하는 일이었다.

이승훈은 사회운동뿐 아니라 언론계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1924년 5월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가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게 된 것은 박춘금(朴春琴) 사건, 그리고 송진우 사장과 이상협(李商協) 편집국장 사이의 불화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상협 편집국장과 홍증식(洪增植) 영업국장이 경쟁지 『조선일보』로 옮겨갔고, 송진우 사장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주(社主)인 김성수(金性洙)는 이러한 난국을 수습하고 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이승훈을 초빙하였다. 그는 5개월 동안 『동아일보』 사장으로 재임하며 경영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덕택에 『동아일보』는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1924년 10월 21일 김성수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고문으로 물러났다.

7 고향에 돌아가 이상촌을 만들기 위해 애쓰다

이승훈은 1926년 가을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다시 고향인 정주로 내려갔다. 그는 이후 오산학교의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1927년 1월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서울에 올라와 신간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았다.

이승훈은 1922년 7월 출소하여 고향에 돌아온 후부터 오산학교 일은 챙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오산학교는 1925년 2월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는 등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승훈은 1926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오산학교뿐만 아니라 이 학교를 구심점으로 일종의 이상촌을 건설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오산학교와 별도로 자면회(自勉會)라고 하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자면회란 그의 고향인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단체였다. 그는 여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유 농지를 조성한 후 공동경작제를 통해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협동생활을 통해 근면하고 모범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승훈은 이렇게 자신의 고향을 이상적인 농촌을 만들려고 애쓰는 도중에 1930년 5월 9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시신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교 학생들이 학습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일제가 금지하는 바람에 이 유언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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