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이인직

이인직[李仁稙]

매국노 이완용의 주구로 전락한 신소설 작가

1862년(철종 13) ~ 1916년

이인직 대표 이미지

혈의 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문화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이인직

이인직은 우리나라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이어주는 신소설의 작가로 유명하다. 원각사를 설립하여 신파극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주로 문학가 혹은 문화인으로 알려진 셈이다. 하지만 사실 그의 생애의 본령은 ‘문화’보다는 ‘정치’에 있었다. 그가 이완용 총리의 비서로서 국망의 과정에도 일정 정도 관여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정치’는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받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의 ‘정치’는 잊혀져 버린 것이다.

2 신소설의 등장

이인직은 신소설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1906년 첫 장편소설인 《혈의누》를 자신이 주필로 있던 《만세보》에 연재하였다. 이 작품은 신소설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1913년에는 《혈의누》의 속편에 해당하는 《모란봉》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였지만 작가의 사정으로 연재가 중단되는 바람이 미완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이 작품 이외에도 《귀의성》과 《치악산》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1908년에 집필한 《은세계》는 자신이 설립한 원각사의 무대에 올려 연극으로 상연하여 한국 최초의 신연극 소설로 기록되었다.

이인직이 개척한 신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살펴볼 때 과도기적 문학 장르였다. 독자적 예술성 자체의 변혁보다는 정치적 계몽이라고 하는 목적론적 성격이 우세하였으며 문학 형태로서는 과도기적인 미숙성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신소설의 본고장 일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바 있다. 일본의 신소설은 자유민권운동의 과정에서 대중에 대한 계몽의 수단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일본의 신소설은 순수문학이라기보다는 계몽소설 혹은 정치소설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인직이 1906년 이래 연이어 발표한 신소설들도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부패한 관리들의 가렴주구, 비인간적인 봉건적 가족 윤리 등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이 지나칠 정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문학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 자체가 정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강렬한 정치 지향성 때문에 문학 자체의 완성도는 생각보다 높지는 않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인직의 신소설이 일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그의 정치 지향성도 상당 부분 일본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생애와 문학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일본 유학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3 뒤늦은 나이에 일본 유학을 떠나다

이인직은 1862년 한산 이씨 양경공파 25대손으로 태어났다. 고조부가 좌의정을 지낸 명문가였지만 그의 증조부는 서자였기 때문에 그의 집안만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 조선 시대에는 서자들이 본인 당대뿐 아니라 그 후손까지 대대로 차별을 받았다. 그의 젊었을 때 행적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가 서출이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명문가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함께 기성 질서에 대한 불만이 공존하는 복잡한 심리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인직의 자필 이력서에는 1900년 2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 정치학교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 개인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1900년에 비로소 관비 유학생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96년 전후한 시기에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 무렵에는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여러 개화파 정객들이 대거 망명하고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조중응과 가깝게 지낸 점으로 미루어 그도 평범한 유학생이 아니라 일종의 망명객으로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나이도 이미 중년을 넘어서 평범한 유학생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이인직이 일본에서 적을 두었다고 하는 도쿄 정치학교는 정식 학교는 아니었고 일종의 강습회 수준의 학교였다. 하지만 이 학교의 강사진은 화려하였다. 가타야마 센(片山潛)을 비롯하여 훗날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학교의 운영은 안정적이지 않아 일시 폐교되었다가 재개교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는 이 학교에 적을 두었지만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인직은 도쿄 정치학교에 적을 둔 상태에서 미야꼬신문사(都新聞社)에 입사하여 기자 연수를 받았다. 이 시기에 《미야코신문》에〈한국잡관〉, 〈한국실업론〉 등 한국을 소개하는 기사를 게재하였으며, 일본어로 지은 단편소설 〈과부의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기자와 작가를 위한 훈련을 일본에서 받은 셈이다.

4 귀국 후 언론인으로서의 활동

이인직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04년 2월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한국어통역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의 제1군사령부에 소속되어 일본으로 떠난 지 8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이듬해 1월 80원의 사금(賜金) 받은 사실로 미루어 귀국한 후 1년간은 통역 업무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송병준도 일본군의 통역 신분으로 귀국하여 일진회를 만들었다.

이인직은 1906년 1월 6일 창간된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을 맡았다. 당시 이 신문의 사장은 이용구였다. 하지만 그가 귀국한 직후인 1904년부터 신문 창간을 시도하였던 점을 미루어보면 일진회의 자금을 끌어들여 이 신문을 창간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는 귀국한 후 일진회와 손을 잡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인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진회와 결별하였다. 그것은 그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된 지 5개월 만에 《만세보》의 주필로 자리를 옮긴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만세보》는 손병희의 발의에 따라 창간되었으며 사장은 오세창이 맡고 있었다. 그는 《만세보》의 주필로 있으면서 《혈의누》와 《귀의성》 등 신소설을 이 신문에 연재하였다. 《만세보》가 창간될 당시 손병희는 정교분리를 내걸고 천도교 신도들에게 일진회에서 탈퇴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가 《국민신보》로부터 《만세보》로 자리를 옮긴 것은 일진회와의 결별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그가 이후 정치적으로 손병희의 천도교와 손을 잡은 것 같지는 않다.

이인직이《만세보》의 주필 자리에 오래 있지 못했다. 1907년 6월 29일 《만세보》가 폐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7년 7월 18일《만세보》의 인쇄시설과 사옥을 인수하여《대한신문》를 창간하였으며 직접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인수자금 2만원은 이완용에게서 나왔다. 따라서 이후 이 신문은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 노릇을 하였으며 이인직 개인도 이완용의 비서 역할을 하였다. 그와 이완용을 연결하는 역할은 조중응이 한 것으로 보인다.

5 이완용의 비서로 떠맡은 마지막 임무

이인직이 이완용의 비서가 될 무렵에는 친일파들 가운데에도 권력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암투의 양 끝에는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가 있었다. 이완용 내각의 배후에는 이토 통감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일진회의 배후에는 일본 군부의 지원을 받는 대륙낭인 단체인 흑룡회가 버티고 있었다. 같은 친일파들 사이에도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권력다툼도 만만치 않았다.

1909년 4월 무렵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겠다는 기본 방침을 결정함에 따라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일제의 앞잡이인 일진회는 합방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에 의해 처단된 이후인 1909년 12월 4일에는 합방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이완용 내각은 조직적으로 합방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완용의 합방반대 운동의 핵심은 일제의 보호국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에 있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이었다.

이인직이 이완용의 비서가 된 시기는 이렇게 이완용 내각이 일진회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인직은 이완용을 위해 활약을 하였다. 자신이 설립한 원각사에서 일진회의 합방청원을 규탄하는 국민대연설회를 개최하는 한편 이완용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와 조야를 대상으로 합방 반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완용과 그의 비서 이인직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방침이 바뀌지 않을 것을 감지하자 활동의 방향을 바꾸었다. 일제에 의한 한국병합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병합에 따른 세부조건을 절충하는데 힘을 쏟기로 하였다. 이완용은 이인직을 다시 일본에 파견해서 그가 막후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하였으므로 이인직과 같은 메신저가 필요하였다.

이인직은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와 이 문제를 절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적 절충의 과정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였는가였다. 병합 이후 한국인의 지위에 대해서는 추호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은 채 한국 황실에 대한 예우와 고관 대작들에 대한 합당한 대우만을 요구하였을 뿐이다. 이것이 그가 이완용의 비서로서 떠맡은 마지막 임무였다.

이인직은 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경학원 사성(司成)으로 임명되었다. 경학원이란 조선시대의 성균관이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이 자리는 명문가의 후예로 자부하던 그가 매우 바라던 자리였다. 조선시대라면 서얼 가문 출신인 그로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할 자리였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 1915년까지 있으면서 《경학원 잡지》의 편찬을 주관하다가 1916년 사망하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