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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제의 조선 침략을 사실상 완성한 인물

1841년 ~ 1909년

이토 히로부미 대표 이미지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실천한 이토 히로부미

1910년 일본의 시사잡지 〈日本及日本人〉는 이토 히로부미가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닭을 바치는 모습을 그린 삽화를 실었다. 이 삽화의 왼쪽 상단에 “韓國倂合完成‘이라는 제목이 기재되어 있으며 날짜는 1910년 8월 28일로 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잡지가 한국병합에 즈음하여 이 삽화를 게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삽화에 이토가 등장하지만 당시 이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림 속의 닭은 조선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림은 이토가 저승에 가서 사이고에게 조선을 바치고 있는 것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 삽화에 이토와 함께 등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이었다. 사이고는 1870년대 초 조선과의 서계문제를 둘러싸고 정한론 소동이 벌어졌을 무렵 정한론을 강경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이 문제를 둘러싸고 반정부군을 조직하여 이른바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사이고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결하였다.

한편 이토는 정한론 소동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와는 달리 정한론에 반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한론자들이 떠나가자 그들의 빈 자리를 메워 참의 겸 공부경(工部卿)으로 영전하기까지 하였다. 즉 정한론 소동 당시 이토는 사이고의 정적이었던 셈이었다. 이토가 정한론에 반대하였다고 하더라도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 침략이라고 하는 기본방침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시기와 방법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이토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사실상 완성한 인물이었다. 사이고가 일찍이 주창했던 정한론은 비록 많은 시간이 걸리기는 하였지만 이토에 의해서 실행된 셈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위 삽화에서는 이토가 메이지 유신 당시 동지였던 사이고에게 조선을 바친 것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2 농민 집안의 출신으로 일약 총리대신으로까지 출세한 인물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현)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하급 사무라이인 이토 나오에몬(伊藤直右衛門)의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이토(伊藤) 씨를 이어받았다. 이름을 히로부미(博文)로 개명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이토는 일찍이 당시 유행하던 존왕양이론에 심취하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공부하였다. 이 학교는 그 이외에도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메이지 유신에 참가한 쟁쟁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이토는 1863년 조슈번의 방침에 따라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개국론으로 돌아섰다. 그는 메이지유신에 참가하였으며 1868년 성립된 신정부의 외국 사무담당을 맡아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앞서 살펴본 정한론 소동 당시에는 정부의 편에 선 덕에 이후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1885년 일본에 내각제도가 처음 만들어지자 이토는 45세의 나이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는 이후 1909년 사망할 때까지 약 25년간 총리대신과 추밀원 의장 등의 자리를 오가면서 늘 권력의 정점의 자리에 있었다.

3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싸고 이홍장과 맞서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신흥강국으로 등장하면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맞서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각축전은 188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때에 따라서 군사적으로 충돌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외교적으로 절충하기도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때 일본을 대표하여 중국과 외교적 담판에 나서곤 하였다. 이때 그의 상대역이 되었던 인물은 이홍장(李鴻章)이었다.

중국과의 첫 번째 담판은 1885년 1월 텐진에서 이루어졌다. 1884년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중국과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국이 텐진에서 외교교섭을 벌인 것이었다. 이토는 일본을 대표하여 텐진에 건너가 이홍장과 담판을 벌였다. 이 담판의 결과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양국의 군대는 동시에 철수하고 만일 장래에 조선에 중대 사건이 있어서 두 나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군대를 조선에 파견할 경우에는 먼저 문서로서 상대방에게 알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는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의 군사적 중립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일본이 중국에 비해서 여전히 불리하였기 때문에 그가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토는 이로부터 10년 뒤에 이홍장과 다시금 담판을 벌였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한 강화협상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이홍장을 일본의 시모노세키로 불러들여 담판을 하였다. 강화협상의 결과 중국은 조선의 종주권을 포기하고 랴오뚱 반도와 타이완 및 펑후 섬 등을 할양하며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는 이 조약을 통해 동아시아의 라이벌이었던 이홍장과의 대결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될 수 있었다.

4 조선 침략에 발 벗고 나서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9일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는 1905년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조약으로 러일전쟁에서의 승리가 확정된 지 약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유력한 경쟁자를 몰아낸 후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그를 한국에 파견한 것이었다.

이토는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고종을 알현하고 “특파대사의 지휘에 따르라”는 내용을 담은 일본 국왕의 친서를 봉정하였다. 그는 11월 15일 재차 알현하여 외교권 이양 등의 내용을 담은 협약안을 고종에게 들이밀었다. 고종은 이 협약안에 반대하였고 정부 대신 가운데에도 반대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다섯 대신(을사오적)의 서명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고종은 이 협약을 재가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 협약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 협약을 제2차 한일협약 혹은 을사조약이라고 부른다.

이 협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대한제국의 공사관은 모두 폐쇄되었으며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 공사관도 모두 철수하였다. 이토는 이 협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2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으며 그가 스스로 초대 통감이 되었다. 이토 통감은 이후 외교뿐 아니라 내정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접수 공작을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이토의 행보는 1907년 7월에 있었던 헤이그특사사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협박하여 퇴위를 강요하였으며 대신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는 1907년 체결된 이른바 한일신협약에 근거하여 각 부처의 차관에 일본인을 임명하도록 하여 이른바 차관정치를 통해 한국의 국정을 한 손에 장악하였다. 이후 군대해산과 경찰권 위임 등을 통해 대한제국을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게 만들었다. 이렇게 일제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은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5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죽은 이유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그를 처단한 인물은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한 후 곧바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체포될 당시 한국의 용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처하면서 범죄자가 아니라 전쟁포로로 취급해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러시아 당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에 넘겨주고 말았다. 안중근은 당시 일본이 다스리고 있던 뤼순으로 끌려가 그곳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토가 하얼빈을 방문한 것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안중근의 총을 맞은 것도 코코프체프와의 열차 회담을 마친 직후 역 플랫폼에서였다. 이토가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게 된 것은 이 무렵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크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복수전쟁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대국인 러시아가 힘을 회복하여 전쟁을 다시 도발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하지만 이후 국제정세는 일본에게 유리하게 바뀌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독일이 신흥 강국으로 대두함에 따라 이에 맞서기 위해 전통적인 라이벌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았다. 러시아와 우호적이었던 프랑스의 중개로 여태까지 편하지 않았던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도 개선되어 1907년 영러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힘을 합치는 삼국협상 체제가 성립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영일동맹)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도 서서히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두 나라 사이에서는 외교협상이 시작되었다. 이토가 하얼빈에 간 것도 이러한 외교협상을 위해서였다.

이렇게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었던 것은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안중근은 자신의 요구대로 전쟁포로로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고 할지라고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럴 경우 미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전명운과 장인환의 사례처럼 극형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안중근의 신병을 곧바로 일본에 넘겨주고만 것이었다.

6 이토 히로부미가 죽고난 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죽고 난 뒤 한국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친일파들의 준동하였다. 사과 성명을 발표한다든지 도일사죄단(渡日謝罪團)을 조직한다든지 하면서 법석을 떨었다. 이러한 소동의 한가운데에서 일진회는 합방 청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일진회의 앞잡이 노릇을 바탕으로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이 이루어지고야 말았다.

이토의 죽음에 친일파들이 준동하는 뒤편에서 축배를 든 사람들도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토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기탁이 대한매일신보 직원들과 함께 축배를 들면서 만세를 불렀다는 첩보가 일제 당국에 접수되었다.

당시에는 이토의 죽음을 마음속으로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이 양기탁 이외에도 많았지만 겉으로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것은 일제 당국이 안창호를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을 이 사건의 배후로 몰아 대거 검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곧바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신민회 회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를 개척한다고 하는 전략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이토가 죽고 난 뒤 정세의 변화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어 급기야는 한국병합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맞서기 위한 독립운동도 보다 본격화된 것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토 히로부미는 어떠한 의미에서건 역사적인 인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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