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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李昰應]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에 맞서면서 집권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왕의 아버지

1820년(순조 20) ~ 1898년(고종 35)

흥선대원군 대표 이미지

이하응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흥선대원군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대원군이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그 위세를 내외에 떨치었다.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란 다섯 자가 삼천리 강토를 풍미하여 그 위세가 우레와 불 같으므로,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항시 관청의 법을 우려하였다. 또 조석(朝夕)으로 유언비어가 판을 쳐 서울에 온 시골 사람들을 체포하여 죽이므로, 궁벽한 산중 촌민과 멀고 먼 해변의 어민들은 살고 싶은 마음을 잃게 되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서술된 내용이다. 이대로라면 흥선대원군은 대단한 독재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 바로 뒤에는 “민씨들이 집권한 이후 서민들이 그들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종종 한탄을 하며 도리어 대원군의 정치를 그리워했다”라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그가 살았던 당시에도 이렇게 평가가 엇갈렸던 것이다. 지금도 그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2 흥선군 이하응, 대원군이 되다

이하응(李昰應)은 1820년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南延君球)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시백(時伯)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1841년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과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 명복이 출계(出系)하여 익종(효명세자)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대원군이란 국왕의 생부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그 이외에도 덕흥대원군, 전계대원군 등 대원군이 3명 더 있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생부이며 전계대원군은 철종의 생부이다.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은 대원군을 거쳐서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앞의 세 사람은 아들이 왕이 될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하응만이 대원군이란 지위로 오래 생존하면서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 결과 대원군하면 으레 그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흔히 이하응은 아들이 국왕이 되면서 대번에 권력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익종의 부인인 조대비가 수렴청정이란 형식으로 권력을 잡았다. 조대비는 권력을 잡은 지 2년여가 지난 1866년 2월에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 고종은 이때부터 친정(親政)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매천야록』에서는 1863년부터 1873년까지 10년간을 흥선대원군 집권기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야사인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도 고종의 즉위 직후 대원군으로 하여금 여러 방면에 걸친 정사(政事)인 서정(庶政)에 참여하도록 하고 신하가 아닌 예법(不臣之禮)으로 대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식 사료에는 흥선대원군이 국정에 참여한 흔적이 이보다는 늦게 나타난다. 1864년 흥선대원군의 주장에 따라 종친부 관제의 개정이 시작되었으며 대원군의 왕궁 출입을 위해 운현궁과 금위영 사이에 전용문을 신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듬해인 1865년에는 조대비가 경복궁 중건(重建)을 명하면서 이 일을 흥선대원군에게 일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같은 해 그를 국태공(國太公)에 봉하여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는 이렇게 권력을 잡아갔지만 그에게는 국정에 관여할 공식적인 권한은 없었다. 그는 국왕의 생부라고 하는 특수한 관계를 바탕으로 비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당시 공문서에는 그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공식적인 권력 행사는 과거 세도정치가 한창일 때 안동 김씨들이 써먹던 방법이었다. 그들도 국왕의 장인(國舅)이라고 하는 특수한 관계에 근거하여 비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등장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막을 내렸지만 역설적으로도 흥선대원군이 그들의 국가운영방법을 계승한 측면이 있었다.

3 흥선대원군의 내정개혁

흥선대원군의 집권은 60년간 이어진 안동 김씨 세도권력의 몰락을 의미했다. 안동 김씨들이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야사(野史)에는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술수에 안동 김씨가 당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철종이 죽기 바로 전 조선 전체를 뒤흔들어 놓은 큰 사건이 있었다. 1862년에 일어난 임술민란(壬戌民亂)이 그것이다.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이 민란은 곧바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민란이 발생한 것은 당시 삼정(三政)이라고 불리던 조세 징수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란이 일어난 직접적 원인은 삼정문란이었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세도정치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정치로 말미암아 초래된 국가체제 전반의 이완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안동 김씨의 정치적 리더십이 흔들렸으며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허용한 것이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흐트러진 국가체제를 재정비하는 한편 삼정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책도 내놓아야만 하였다. 그는 비변사(備邊司)를 혁파하고 의정부(議政府)의 기능을 회복하였으며 탕평인사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등 과거 세도정치기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 힘썼다. 경복궁 중건을 통해 국가체제 재정비의 가시적 면모를 보여주려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삼정문제의 해결이었다. 그는 호포(戶布)의 징수와 사창(社倉)의 설치 등을 해결책으로 내세웠다. 호포제란 신분과 상관없이 군포를 고르게 거두는 것이고 사창제란 당시 사실상 조세 역할을 하던 환곡(還穀)을 철폐하고 대신 민간에서 곡물을 자율적으로 대여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러한 개혁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백성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4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폈는가?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 하면 바로 떠오르는 말이 쇄국이다. 그가 완고한 배타주의자로서 강경한 쇄국정책을 펴는 바람에 시대의 흐름을 놓쳤다는 것이다. 그의 내정개혁의 성과는 어느 정도 평가를 받고 있지만 대외정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그의 대외정책이 결과적으로 시대적 대세를 거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완고한 배타주의자라는 그의 이미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쇄국이란 말은 개항 이후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갑오개혁 이후가 되면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에까지 소급해서 적용되었다. 그런데 쇄국이란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지방 제후에 대한 통제정책으로 일본적인 역사성을 담은 표현이다. 흥선대원군 시절에는 당연히 쇄국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굳이 이에 해당하는 용어를 찾자면 해금(海禁)이란 말을 들 수 있다. 해금이란 바다를 통한 왕래와 교역을 금지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해금의 주체는 조선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조선은 이를 따른 것이었다. 조선과 중국 사이에도 해금이 적용되었다. 당시 중국 상인들도 배를 타고 조선에 와서 장사를 할 수 없었으니 하물며 서양 상선들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양 여러 나라의 통상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였고 이 과정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고 하는 두 차례의 무력 충돌까지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대외강경책을 천명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그만의 특별한 대외정책을 새로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해금(海禁)이라고 하는 동아시아의 전통질서를 그대로 유지했을 뿐이다.

그는 신미양요의 과정에서 한편에서는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외교문서를 주고받는 등 협상의 통로를 열어놓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양면적인 대응을 뒷받침했던 인물이 박규수(朴珪壽)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는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이념형의 정치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철저한 현실 정치인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호한 액션을 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 물거품이 되어 버린 재집권 시도

1873년 11월 흥선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이용하던 전용문이 굳게 닫혔다. 최익현(崔益鉉)이 흥선대원군의 시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바로 뒤였다. 최익현은 이 상소에서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날 것을 정면으로 요구하였다. 따라서 왕명으로 전용문이 폐쇄된 것은 그로 하여금 물러나라는 신호로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양주 곧은골(直谷)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실각은 당시 공식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공식적으로는 고종 친정이 이보다 7년 전인 1866년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고종은 이제 진정한 의미의 친정을 시작하면서 흥선대원군에 대한 정책적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중국 동전인 청전(淸錢)을 수입하던 것을 중지시키고 대신 중국을 통한 서양면직물인 서양목(西洋木) 수입을 사실상 용인하였다. 일본과의 사이에 불거진 서계(書契)라는 외교문서 관련 문제에 대한 대책도 그 대표적 사례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심어놓은 인물들을 솎아내었으며 그 빈자리를 자신의 처가인 민씨들로 채웠다.

권좌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고종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881년 일어난 이재선(李載先)의 역모 사건은 이듬해 일어날 대충돌의 예고편이었다. 이 사건은 고종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의 들끓고 있던 와중에 폭동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려 한 사건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이 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시 배후에 그가 있다고 의심받았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은 당초에는 군인들의 자연발생적인 폭동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중간에 흥선대원군이 개입하면서 권력다툼으로 비화하였다. 명성황후는 군인들을 피해 궁궐을 탈출하였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재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청군에 납치되어 중국 보정부(保定府)에 연금되었다. 그의 재집권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6 일본과 손을 잡았지만

1894년 6월 21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날이 밝자 흥선대원군이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궁궐에 들어섰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은 실각한 지 20여년 만에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달라진 점은 과거 흥선대원군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에 업혀서 권력을 잡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흥선대원군과 일본의 우호적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에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흥선대원군을 서서히 국정에서 배제하려 하였다. 흥선대원군도 이에 맞서 일본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진영에 밀서를 보내는 한편 심복을 남부지방에 파견하여 농민군으로 하여금 항일봉기를 하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양동작전 계획은 평양의 청군이 너무 일찍 무너지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밀서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는 다시금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1895년에 있었던 을미사변 때 마지막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군경과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왕후(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에도 흥선대원군은 입궐하였다. 왕후(명성황후)를 해치는 것이 흥선대원군의 뜻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미 죽은 그녀를 폐비(廢妃)한 것은 흥선대원군의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이 사건을 흥선대원군의 소행으로 몰아가려고 하였다. 제2의 임오군란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의 진상이 국제사회에 드러나 외교적 고립에 처하였을 때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는 것으로 책임을 모면하려 하였다. 이처럼 흥선대원군의 마지막 등장은 오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은 이로부터 2년여가 지난 1898년 2월 22일 쓸쓸히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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