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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全鎣弼]

민족문화재의 수호자

1906년(고종 42) ~ 1962년

전형필 대표 이미지

간송 전형필

간송미술문화재단

1 개요

별호는 천뢰(天賚),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 옥정연재(玉井硏齋)이다. 서울에서 만석꾼으로 통하는 대부호의 상속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한 수장가로서, 해방 전과 후를 통틀어 평생을 민족문화유산의 수집, 보존에 헌신하여 크게 기여한 교육·문화인이다. 성북동에 마련된 만여 평 규모의 북단장(北壇莊)을 터전삼아 1938년 보화각을 개설한 그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잇달았던 시기에도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과 같은 국보급 문화재를 많이 수집하였을 뿐만 아니라, 폐교 위기에 몰린 보성중학교를 인수하여 새로이 동성학원을 설립하는 등 전통문화보존과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해방 후에는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고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현 한국미술사학회) 결성과 『고고미술』(현 미술사학연구)의 창간을 주도하여 한국미술사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2 만석꾼 갑부의 외동아들로 도서 수집에 눈을 뜨다

전형필이 태어난 곳은 배오개[梨峴]라 불리던 서울 종로4가 112번지이다. 그는 1906년 7월 29일 통정대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전영기(全泳基, 1865~1929)를 아버지로 하고 월탄 박종화(1900~1981)의 고모인 밀양박씨(1862~1943)를 어머니로 하는 2남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인 전계훈(全啓勳, 1812~1890)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중군(慶尙中軍)에 이르렀으며, 서울 근교 및 연안, 연백, 공주, 서산의 토지에서 수만석을 추수하는 대지주가 되어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배오개, 즉 종로4가 112번지에 대저택을 지었는데, 전형필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 집이었다. 전형필이 태어날 당시, 이 집은 큰 할아버지 전창엽(全昌燁, 1831~1915)과 작은 할아버지 전창열(全昌烈, 1938~1917)을 비롯하여, 아버지 전영기와 숙부 전명기(全命基, 1870~1919) 내외까지 사는 큰 규모였다. 태어나자마자 숙부 전명기의 호적에 양자로 들어간 전형필은 생부와 양부 모두를 한 집에서 모시며 살았는데, 친형이자 생가의 장자였던 전형설(全鎣卨, 1892-1919)의 요절로 말미암아 양쪽 집안의 유산을 상속받는 유일한 적자가 되어, 1929년 불과 24살의 나이에 도합 4만 마지기 규모의 만석꾼이 되었다.

양부 전명기에 의해 신식교육을 시작한 전형필은 1921년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재 효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데 이어 1930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시절 야구부의 부장으로 활동하며, 당시 미술부 부장이었던 이마동(李馬銅, 1906~1981)과 함께 삼총사가 되어 친밀하게 교유했다는 증언이나, 아무도 모르게 도서를 수집하는 습관을 키워가고 있었다는 자신의 고백은 훗날 전통 문화예술품수장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에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휘문고보 미술교사였던 고희동(高羲東, 1886~1965)과 교유한데 이어, 대학시절 그를 통하여 서화계의 거두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문하에 드나들게 된 것은 나중에 대수장가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준 것으로 이해된다.

3 북단장 위에 보화각을 세우고 서화골동을 수집하다

1930년 대학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800만평, 4만 마지기에 달하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전형필은 오세창과 더욱 긴밀히 교유하며 문화재를 통한 민족전통의 계승이라는 이념을 수용하고, 서화를 중심으로 한 오세창의 방대하고도 정밀한 감식안을 공유하였다. 이미 1928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발간하여 한국 역대 서화의 전통과 특징을 꿰뚫고 있던 오세창의 감식안은 수준 높은 전형필 컬렉션의 성립에 있어서 일종의 나침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전형필은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현재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만여 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문화재수집의 본격적 거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데, 오세창은 이 땅이 선잠단(先蠶壇) 옛터 부근 북쪽이란 뜻에서 북단장(北壇莊)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1934년 8월 25일(음력 7월 16일) 소동파의 적벽야유를 따라 달밤을 즐기던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이 전형필을 위해 써준 ‘북단장’ 글씨가 전하여 이곳이 1934년 이전에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형필은 북단장 내 오래된 한옥에 표구소를 차리고, 새로 수집된 서화의 장황을 보수하거나 보관상자를 제작하였다.

전형필은 북단장 대지 위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이었던 보화각(葆華閣) 건립을 기획하고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朴吉龍, 1898~1943)에게 설계를 맡겼다. 모더니즘 양식의 2층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보화각은 1938년 8월 29일 상량식을 마치고 준공되었다. 오세창이 이때 지은 〈보화각정초명〉에는 민족전통 보존의 교량자 역할이라는 사명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한편, 1910년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번지에 개점한 근대기 유명 고서점으로서 1930년대 경영난에 부딪혔던 한남서림을 후원하던 전형필은 주인이었던 백두용(白斗鏞, 1872~1935)의 사망 이후, 1936년 3월 거금 10,170원을 주고 이를 인수한 뒤, 오세창에게 소개받은 이순황(李淳璜)에게 경영을 맡겨 고서화와 전적 등 문화재를 1차로 수집하는 창구로 활용하였다. 아울러 일본인 골동상 신보 기조(新保喜三)를 통해 각종 미술품 경매에도 적극 참여하여 수장품의 외연을 계속 확장해나갔다. 1930년대 오세창과의 교감 속에서 북단장에 보화각을 건립하고 한남서림을 인수한 전형필은 탄탄한 물적 기반 위에서 문화재 수집 활동을 보다 체계적이고 과감하게 수행하여 비교적 단기간에 우수한 컬렉션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1930년대 수집품 중에서는 정선의 《해악전신첩》과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과 같은 서화류도 있고, 〈괴산팔각당형부도〉와 같은 석조물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과 같은 도자기류도 있다. 특히 〈청자기린형향로〉등 7점의 국보와 보물이 포함된 영국인 수집가 개스비(John Gadsby)의 컬렉션을 손에 넣은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4 보성중학교를 인수하고 훈민정음을 수집하여 지켜내다

전형필은 조선어 교육의 사실상 폐지에 이어 창씨개명 및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민족언론의 폐간과 같은 민족말살정책이 연이어 노골화되던 1940년 경영난으로 폐교의 위기에 빠진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를 60여만 원의 거금을 들여 인수하고 새로이 동성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함으로써 민족교육과 인재양성에서도 중요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전쟁 동원의 악조건 속에서도 교사 증축을 추진하여 1941년 4월 2층 4개 교실 100여 평에 이어 1942년 8월 강당 200평을 증축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해방 이후 1945년에는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보성중학교 교장으로서 교직에 직접 몸을 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전형필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보다도 『훈민정음해례본』을 은밀하게 수집한 것이다. 1940년경 경북 안동의 어느 고택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화제가 된 『훈민정음해례본』을 국어학자 김태준(金台俊, 1905~1949)을 통하여 확인하고 1만원의 거금을 치르고 매입한 뒤, 한남서림 이순황이 보관하게 하였다. 자신의 수장품 중에서도 훈민정음을 가장 아꼈다고 전하는 전형필은 한국전쟁(1950~1953)의 혼란 속에서 상당수 중국 서화와 중국 도자기류, 수만 권의 장서를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훈민정음과 조선시대의 서화 및 고려시대 청자 등 민족 문화재의 정수만은 전쟁의 참화로부터 지켜내고자 하였다. 1951년 1‧4후퇴를 계기로 울산의 모처에 피난을 내려간 전형필은 보화각의 문화재는 부산으로 호송하여 영주동 모 or 어느 별장에 보관토록 했다.

5 고고미술동인회를 발기하고 『고고미술』 창간을 주도하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된 이후, 서울로 돌아온 전형필은 전화에 파괴된 고적과 문화재 보존을 위하여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국립박물관의 이홍직(李弘稙, 1909~1970), 최순우(崔淳雨, 1916~1984), 황수영(黃壽永, 1918~2011), 진홍섭(秦弘燮, 1918~2010), 김원룡(金元龍, 1922~1993)과 교유하던 전형필은 이들과 함께 고고미술동인회를 발기하고 『고고미술』의 창간을 주도하였다. 창간호(1960)에 실린 창간사를 통해 ‘고의적인 도굴이 성행하여 유적이 파괴되는 것은 고사하고 거기서 발견되는 중요한 미술품이 시중에 흘러나와 결국에 가서는 국외로까지 불법 유출되고 있는 현실을 타개코자 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를 발간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계기로 상속받았던 부동산과 유동자산이 상당 부분 고갈된 상태에서, 1959년 보성중고등학교에서 발견된 대형 부채로 말미암아 재정적 압박이 심화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형필은 고고미술동인회 운영과 『고고미술』 발간 경비의 대부분을 부담하였다. 전형필과 선각자들에 의해 씨앗 뿌려진 고고미술동인회와 『고고미술』은 후학에 의해 한국미술사학회와 『미술사학연구』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2년 1월 26일 급성 신우염으로 서거하였으며, 대한민국문화포장(1962)과 대한민국문화훈장국민장(1964)을 추서 받았다. 유지를 받들어 1966년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1971년부터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된 보화각에서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 전시를 통해 소장품을 공개해오고 있다.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었고 대대적인 보수와 증축을 거쳐 2022년 간송미술관의 재개관 전시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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