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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鄭喬]

독립협회의 맹장, 대한제국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다

1856년(철종 7) ~ 미상

정교 대표 이미지

대동역사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정교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런 만큼 일찍부터 새로운 문물과 접촉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영어를 배우는 등 세상의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그는 북촌의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던 만큼 갑신정변과 같이 개화당이 주도한 정치적 사변에는 끼지 못했다. 그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독립협회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고 정부를 비판할 때 앞장선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후 10년 가까이 숨죽여 지내야만 하였다. 그는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자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 독립협회 운동에 가담하다

정교는 185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추인(秋人)이다. 1894년 7월 24일 궁내부주사로 임명된 것이 그의 관직 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이듬해에는 수원부판관과 장연군수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의 가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고 과거에 급제한 기록도 없다.

이러한 그가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관직에 처음 진출하였으니 당시 개화파 정부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발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직후에 스스로 장연군수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덕택에 이듬해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개화파 정부가 무너질 때 무사할 수 있었다.

정교는 1897년 8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처음 조직되었을 때에는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를 중심으로 하는 고위 관료들의 사교모임에 불과하였다. 독립협회는 1897년 여름부터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에서는 이 무렵 인적 구성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보수파 고위 관료들이 하나둘 이탈한 반면 신진 관료와 지식층이 새로 가입하기 시작하였다. 정교도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독립협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협회를 이끌어 갈 새로운 피로 수혈된 셈이다. 그 이외에도 주시경(周時經)과 양홍묵梁鴻默) 등 협성회(協成會)에서 토론회를 이끌어 왔던 청년들도 독립협회에 가세하였다.

3 만민공동회를 통해 대정부투쟁에 앞장서다

정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자마자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연이어 맡았다. 그는 1898년 1월 상임집행부의 서기를 맡았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제의(提議)를 맡았다. 그는 같은 해 8월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대정부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정교는 1898년 3월 독립협회의 제의로서 러시아의 절영도조차(絶影島租借) 요구와 러시아 군사고문단 파견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정부의 양보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협회의 정부에 대한 공격은 1898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정교는 독립협회의 사법위원으로서 노륙법(孥戮法)와 연좌제(連坐法) 부활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당시 법부대신으로서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을 주도하던 신기선(申箕善)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정교는 이렇게 반정부투쟁을 맹렬하게 전개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 정부는 1898년 11월 7일 독립협회 회원 17명을 체포하였는데 여기에 그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독립협회 회원들을 체포한 것은 공화제를 추진하려 한다는 익명의 문서가 시내에 나붙었기 때문이었다. 이 익명서 사건은 당시 보수세력이 일으킨 자작극이었다.

독립협회가 이에 굴하지 않고 연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항의하는 바람에 정부는 그를 비롯한 17명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교의 독립협회를 통한 활약은 여기까지였다. 정부가 그해 12월 25일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했기 때문이다.

4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정교는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후 오래동안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 채 숨죽이고 지내야만 하였다. 정교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 회원 대부분이 그렇게 지냈다. 정교도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배재학당으로 피신하여 선교사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낸 바 있다. 그도 러일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활동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정교는 1905년 10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추천으로 제주군수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1월에는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의 추천으로 학부참서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학부참서관으로서 한성사범학교와 외국어학교의 교장도 겸임하였다.

그가 이렇게 교육과 관련된 관직을 맡게 된 것은 그가 과거 흥화학교(興化學校)의 교사를 지낸 바 있기 때문이었다. 흥화학교는 민영환(閔泳煥)이 1898년 11월 24일 설립한 학교로서 교사로는 정교 이외에 임병구(林炳龜)·남순희(南舜熙) 등이 있었다. 설립과 운영에 들어간 돈은 김신영(金信營)이 댔다. 설립 초기 교과목으로 영어를 중시하였으며 측량술을 가르치는 양지과(量地科)도 설치하였다. 이 학교는 1911년까지 운영되었다.

정교는 교육과 관련하여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6년 5월 진학신(秦學新)과 이순하(李舜夏) 등과 함께 여성교육기관인 양규의숙(養閨義塾)을 설립하였다. 이를 후원하기 위한 단체인 여자교육회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06년 9월에는 사립 광흥학교(光興學校)의 교장을 맡았는데 광흥학교는 학부의 승인을 얻어 영어야학교를 한성공립소학교에서 개설하기도 하였다.

정교는 이렇게 교육과 관련된 활동을 열심히 벌였지만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참여하여 평의원이 되었으며 1908년에는 대한자강회의 후속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평의원과 헌법연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대한자강회는 정치적 계몽을 위한 수단으로 입헌정치를 주장하였다. 대한협회는 자신들이 입헌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당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내세웠다. 정교는 이러한 입헌정치론과 정당정치론의 이론가였다. 그는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에 「정당득실」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5 망국의 역사를 기록하다

정교는 정력적인 정치활동도 전개하였지만 많은 글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는 『대동역사(大東歷史)』·『홍경래전(洪景來傳)』·『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등 역사에 관한 저술이 유독 많았다. 그 가운데 『대동역사』는 단군조선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것으로 1905년 발행되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우리나라가 4천 년에 걸친 독립국가였음을 알리기 위해서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밝혔다. 즉 그가 독립협회 활동의 연장선에서 이 책을 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동역사』가 고대사를 다룬 것이었다고 한다면 『대한계년사』는 그가 살았던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 책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것으로 조선 왕조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소상히 다루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이 시골 선비의 시각에서 서술한 조선망국사라고 한다면 『대한계년사』는 서울의 개화파 지식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조선망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10년 일제의 한국 병합 이후 익산으로 내려가 은거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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