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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池靑天]

독립군을 이끈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1888년(고종 25) ~ 1957년

지청천 대표 이미지

지청천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개요

1888년 1월 25일(음력) 서울 삼청동(三淸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 관명(冠名)은 석규(錫奎) 또는 대형(大亨), 아명은 수봉(壽鳳)이다. 호는 백산(白山)이다.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본명 대신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폐지되면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8 독립 선언과,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한의용군 총교관,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을 역임하며 항일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이 되었으며,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해방 이후 제헌 국회의원, 민주당 최고의원직 등을 맡았다. 1957년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 무관으로의 길

지청천(池靑天)은 1888년 1월 25일(음력) 서울 삼청동(三淸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 관명(冠名)은 석규(錫奎) 또는 대형(大亨), 아명은 수봉(壽鳳)이다. 호는 백산(白山)이다.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본명 대신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호인 백산은 만주로 망명하면서 압록강을 지날 때 지은 것으로, 백두산을 의미한다. 5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랐다. 1894년부터 약 3년간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1897년 교동 소학교로 편입하였으며, 1899년에 졸업하였다. 1904년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친척이었던 지석영(池錫永)의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재학 중 황성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고 활동했다.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09년,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었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간섭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육군무관학교 학생들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시킨다는 방침을 정했다. 지청천은 4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1909년 9월, 도쿄[東京]에 있는 육군유년학교 예과 3학년에 편입했다. 재학 중인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 지청천은 분개했다. 함께 유학했던 학생들과 함께 아오야마[靑山]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개최했다. 그리고 근대적 군사훈련을 받은 후 일본군을 탈출해 항일무장투쟁에 나설 것을 맹세했다. 이를 ‘아오야마의 맹세’라고 한다.

1910년 말 육군유년학교를 예과를 졸업했으며, 본과에 진학했다. 1912년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고 6개월간 복무한 후, 같은 해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 5월 26기로 졸업하고, 같은 해 12월 일본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보병 제10연대에서 근무하였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이후 중위로 승진하였다.

3 일본 육군 장교에서 독립군을 이끄는 장군으로

1919년 일본에서 2·8 독립 선언이 발표되었고,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지청천은 독립을 위해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건강을 일부러 해쳐 병가를 얻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음력 4월 14일 일본 육사 23기 김광서(金光瑞, [金擎天])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군용지도와 최신 병서를 지니고 신흥학교로 찾아갔다. 음력 1919년 5월,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했다.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에 이어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19년 11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된 서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1920년 7월, 서로군정서 사령관 자격으로 북로군정서에 서한을 보내 항일군사단체가 대동단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같은 해 10월 말, 청산리에서 안도현으로 이동한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고 대한의용군을 결성하고 부사령관이 되었다. 일제의 독립군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했다. 1920년 12월, 밀산에서 각 무장단체와 협의하여 대한독립단을 결성했으며, 여단장직을 맡게 되었다. 1921년 독립군을 이끌고 러시아령 이만(伊曼, 현 달네렌첸스크)에 도착했다. 홍범도와 함께 치타정부와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조직했으며, 총교관이 되어 독립군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1년 5월, 무장단체들은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통합을 위한 회의 개최되었다. 하지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에 통합된 부대의 군권 다툼이 격화되었고, 한 달 후인 6월 28일, 소련군에 의한 사할린부대의 무장해제가 결정되면서 독립군 간에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자유시사변’이 발생한 것이다. 1921년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교육방침이 소련 정부와 다르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 강화에 힘썼다.

1925년, 8개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되어 정의부가 만들어졌다. 지청천은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이 되어 활동했다. 같은 해 정의부 내 민족주의 결사인 다물청년당을 조직하여 청년들을 지도했다. 1928년, 3부 통합운동에 참여하였고, 혁신의회가 만들어지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30년 7월에는 한국독립당이 결성을 주도하였고, 군사위원장이 되었다.

1931년 10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석두하자에서 시국대책회의가 개최되자 참석하였고, 각 단체의 군사력을 대동단결시키고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에 항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해 12월,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일본에 항전한다는 한·중 연합협정을 체결하였다. 1932년 6월, 일본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쌍성을 공격하였고, 중국군과 연합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933년에는 시세영이 이끄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경박호에서 일본·만주군 1개 부대를 섬멸했다. 이와 함께 6월에는 동경성(東京成), 대전자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4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1933년 윤봉길의 ‘상해 의거’의 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는 중국국민당 장개석(蔣介石)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김구는 낙양군관학교 내 한인특별반 설립을 추진하고 총책임자로 지청천을 초빙하기로 했다. 1934년 3월, 지청천은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 군사훈련을 개시하자 총교도관이 되었고 교무위원을 겸임했다. 『백범일지』에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소는 낙양분교로 하고, 학교 발전에 따라 자금을 지원한다는 약속하에 1기에 군관 100명씩을 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동북 3성에 사람을 파견하여 옛 독립군들을 소집하니,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김창환 등 장교와 그 부하 청년 수십 명, 중국 관내 지역의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 있던 청년들이 총집결하였다.

1935년 6월, 김원봉 등과 연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조직하고 중국 관내 독립운동 단체의 대동단결할 것을 주장했다. 민족혁명당의 군무부장으로 군사 인재를 양성하고, 군사부원을 적지에 파견하며, 적 후방에서 독립전쟁을 개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937년 1월, 의열단 계열이 민족혁명당 내에서 세력을 강화하면서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군사 활동에 관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2년 뒤인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이 통합되어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 이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전쟁이 격화되자, 본격적으로 한국광복군을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현했다. 1940년 7월, 「광복군편련계획서(光復軍編練計劃書)」를 작성하고, 중국국민당 정부와 협의하고 창군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9월 17일 중경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거행되었고,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총 4개 지대로 재편하였다. 1945년 「군사정책 제안」을 수립하여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했다. 동북(만주) 지역에서 전면전을 전개하고, 미군과 합작하여 한국으로 광복군 한 부대를 상륙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함께 한국광복군 대표로 미군 OSS 사전트(Clyde B. Sargent)와 회담하고, OSS훈련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해방 이후 귀국을 미루고 기초를 확립하고자 광복군 확군을 추진하고, 10만 국군 창설을 주장했다. 1946년 5월,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 뒤 광복군의 정신으로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라는 「광복군 복원선언」을 발표했다. 중국으로 다시 들어간 뒤, 1947년 장개석이 제공한 비행기 편으로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혼란한 국내 정세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청년들의 역할이 크다는 인식 아래 대동청년단 결성을 주도하였다. 1948년 5·10 총선거에 출마하여 서울 성동구에서 전국 최대 득표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 직을 맡았다. 1957년 1월 15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지청천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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