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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崔時亨]

동학의 교세를 크게 확장시킨 제2대 교주

1827년(순조 27) ~ 1898년(고종 35)

최시형 대표 이미지

천도교 이세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교세 확장과 동학 경전 간행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의 초명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이다. 부친은 종수(宗秀)였고, 모친은 월성 배씨(月城裵氏)였다. 그는 5세에 모친을 잃고, 12세에 부친을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 등을 하다가 17세에 조지소(造紙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19세 때 밀양 손씨(密陽孫氏)와 결혼한 뒤 처가가 있는 흥해(興海)에서 살다가, 28세 때 경주 마복동으로, 33세 때 다시 검곡(劍谷)으로 이사하는 등 어려운 생활로 잦은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최시형은 35세 때인 1861년 동학에 입교하였다. 최제우가 본격적으로 동학을 전파하던 때였다. 동학에 입교 한 후 최제우에게 설교를 듣고 명상과 도를 닦는데 힘썼다. 이듬해 3월부터 영덕, 상주, 흥해, 예천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포교에 힘써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863년 7월에는 최제우로부터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었다. 8월에는 도통(道統: 정통 계승자)을 물려받아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되었다. 그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고, 이듬해(1864년) 처형되자 최시형은 관헌들의 눈을 피해 태백산 등 각지로 피해 다니면서 동학의 기초를 닦는 데 주력하였다.

최시형은 1865년 1월 최제우의 부인과 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평해에서 울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6월에는 다시 영양으로 이사를 하고 수도에 더욱 힘쓰는 한편 교리 전수에도 노력하였다. 1866년 10월에는 흩어진 교도들을 재결속시킬 목적으로 일종의 계를 조직하고, 매년 2회의 모임을 통해 신앙을 다져나갔다. 1871년에 일어난 이필제(李弼濟)의 난에 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여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에 최시형은 도피생활을 계속하면서 동학을 재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리고 1875년 이름을 ‘때를 따라 순응한다’는 뜻의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는 데 있으므로, 때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개명하였다고 한다.

최시형은 동학의 교리 체계화와 교세 확장을 위한 포교에 노력하였다. 최제우가 집필한 것을 모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동학 경전의 간행을 통한 교리 체계화에 힘을 기울였다. 한문 경전인 『동경대전』은 본래 1863년에 최제우가 최시형과 함께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1864년 최제우의 죽음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결국 최시형이 1880년 5월 강원도 인제에 있는 김현수의 집에 경전인쇄소를 설치하고 『동경대전』의 판각을 시작하여 6월 100여부를 간행하였다고 한다(경진판庚辰版 『동경대전』). 『동경대전』은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然基然)의 4편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외 축문(祝文), 입춘시(立春詩), 화결시(和訣詩),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 우음(偶吟), 통문(通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듬해인 1881년 6월에는 충북 단양에 있는 여규덕의 집에서 용담가(龍潭歌), 안심가(安心歌), 교훈가(敎訓歌),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도덕가(道德歌), 흥비가(興比歌), 검결(劍訣) 등 9편의 가사가 실린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1883년에는 목천 김은경의 집에서 『동경대전』 1,000여부를, 1888년에는 김병내 등이 인제 지역의 동학 교구인 인제접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다시 간행하였다.

2 교조신원운동과 동학농민운동 참여

최시형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1884년 동학교단을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의 육임제(六任制)로 정비할 것을 구상하였다. 육임제는 교화를 담당하는 교(敎)와 업무와 규율을 책임지는 집(執)과 직언과 건의를 맡는 정(正)의 직급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1887년 6월 육임을 임명하여 육임소를 설치하였다.

한편, 1892년 7월 교조신원운동을 펼 것을 주장하던 동학 교구인 호남 ‘접’의 책임자인 접주 서인주(徐仁周) 서병학(徐丙鶴) 등이 충청도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伸寃: 억울함을 푸는 것),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내용으로 하는 소장을 냈다. 그리고 많은 동학교도들도 교조신원운동을 주장하자 최시형은 11월에 삼례에 동학교도들을 모집하여 교조신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하였다. 이에 전라 감사는 각 읍에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을 금지하라는 내용의 지시 문서인 감결(甘結)을 내렸고, 동학교단 지도부는 11월 12일 완영도회소(完營都會所)의 이름으로 통지문인 경통(敬通)을 돌려 즉시 해산하여 귀가할 것을 지시하였다.

삼례집회 이후에도 동학교도들에 대한 침탈과 탄압이 계속되자 최시형은 교도들의 복합상소(伏閤上疏: 대궐문 밖에 이르러 임금께 상소하고 엎드려 청하는 일) 요구를 받아들였다. 12월에 복합상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도소를 충북 보은에 설치하였다. 이듬 해(1893년) 1월에는 복합상소를 결정하고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청주 송산리에 있는 손천민(孫天民)의 집으로 정하였다. 2월에는 각도의 동학대표를 서울로 상경시켜 광화문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케 하는 복합상소를 하게 하였다.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밤낮으로 광화문 앞에서 상소문을 올린 동학교도들은 “너희들이 스스로 물러가 있으면 당연히 편안하게 살도록 하겠다는 처분이 있을 것이다” 라는 고종의 전교를 듣고 최시형의 명에 따라 2월 14일과 15일에 걸쳐 해산하였다.

하지만 동학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손병희(孫秉熙), 박용호, 이관영, 이원팔 등 교단 지도자들은 최시형을 찾아가 “아직 선사(先師)의 지원(至寃)이 미신(未伸)하고 각 지방에서 도인들이 모두 도탄에 빠졌으니 보유(保維)할 수 있는 방책을 지시하소서”라고 하며 신원운동을 벌일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최시형은 3월 10일 도탄에 빠진 동학교도들을 구하고 최제우의 신원을 얻기 위한 보은 집회를 개최하였다. 보은에 모인 약 2만여 명의 동학교도들은 교조신원과 일본 및 서양 세력을 배척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우면서 20일간 시위를 계속했다. 정부에서는 양호도어사(兩湖都御史) 어윤중(魚允中)을 보은에 파견하였다. 3월 23일 어윤중은 “뜻밖에 양호(兩湖)에서 동학의 무리들이 집회를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것을 걱정하여 혹시 백성들이 선동하는 유언비어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미련한 나를 파견하여 도어사(都御史)로 삼아 어루만지고 위로하도록 하였다. (중략) 마땅히 몸소 직접 설득해야겠지만 먼저 이렇게 타일러 훈계하는 글을 게시하니, 모든 동학의 무리를 따르는 몰지각한 자들을 먼저 즉시 해산시켜 돌려보내 저마다 생업을 안정시키고, 그 중에서도 두령(頭領)이 되어 조금이라도 사리를 헤아릴 줄 아는 자는 진실로 사정과 이유를 갖춰 직접 나를 만나 깨우치도록 하라.”는 백성을 타이르는 효유문(曉諭文)을 발표하였다. 이에 동학 대표들은 어윤중에게 광화문 복합상소 때 어명을 믿고 해산했으나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우리의 의거는 척왜양에 있으며, 동학을 모함하는 쪽은 서학일 것이며, 계를 다시 올려 우리들에게 새로운 혜택을 베풀어 달라는 등의 내용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군대를 동원하며 해산을 명령하였고, 동학교도들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최시형은 1894년 1월 전봉준(全琫準) 등이 주도한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이를 반대하였다. 아직은 이런 움직임을 보일 때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농민군이 그해 가을 다시 봉기할 때는 동학교도들에게 총궐기할 것을 명령하였다. 최시형은 9월에 접주들을 불러 모으고 “교도들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북접에서도 중앙의 법소(法所)와 지방의 도소(都所)를 의병을 훈련시키고 지휘한다는 의미인 창의소(倡義所)로 개칭하였으며, 동학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피신생활을 하면서 동학 포교에 힘을 기울이던 최시형은 1897년 12월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4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7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의 일체 좌도(左道: 유교에 어긋나는 모든 요사스러운 종교)로써 바른 도를 어지럽히는 술책과 혹은 도상(圖像)을 숨겨놓고 향을 피워 사람들을 모으고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며 거짓으로 착한 일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데에서 우두머리가 된 자에 대한 형률에 비추어’ 교수형에 처해진 것이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이처럼 최시형은 1864년 최제우의 처형을 전후한 시기부터 1898년 체포될 때까지 30여년을 숨어 지내면서 동학의 기초를 닦는 데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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