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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許蔿]

척사론자에서 혁신유림으로 변화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실천한 의병장

1855년(철종 6) ~ 1908년(순종 2)

허위 대표 이미지

허위 초상

왕산허위선생기념관

1 개요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왕산(旺山)으로 경상북도 구미 출신이다. 대한제국기 13도창의군을 실질적으로 이끈 의병장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해산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1907년 재차 의병을 일으키고, 서울진공작전의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서울진공자적이 실패한 이후 다시 전국적 의병의 결집을 추진하던 중 은신처가 발각되어 1908년 6월 11일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재판과정에서도 의병 활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다가 1908년 10월 21일 처형되었다.

2 선비가문에서 성장한 참선비. 을미사변,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하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왕산(旺山)으로 경상북도 구미에서 아버지 허조(許祚)와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허위의 집안은 퇴계(退溪) 이황의 학통을 이어온 전형적인 유학자 가문으로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허위는 3명의 형이 있었는데 첫째 형은 허훈, 둘째 형은 허신, 셋째 형은 허겸이다. 일찍 죽은 둘째 형 허신을 제외하고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허위의 나이가 42세 되던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 반포가 이어지자 고향에 있던 이기찬(李起燦), 이은찬(李殷瓚), 조동호(趙東鎬), 그리고 이기하(李起夏) 등 인근의 지사들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1896년 3월 26일 장날에 맞추어 본격적인 행동을 시작하였다. 김천(金泉) 읍내에 들어가서 수 백 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봉기하였다. 이때 허위는 이기찬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었다.

허위는 의병을 이끌고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을 갖춘 뒤 김산(金山)과 성주(星州)에 머무르며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대구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지역 군수가 허위의 의병을 격파하기 위하여 군내의 군을 소집하는 한편, 의병 봉기 사실을 대구관찰사에게 급히 보고하며 대응하였다. 김산의병은 지역 군대는 쉽게 격파하였으나, 공주와 대구에서 관군이 출동하자 고전 끝에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의병의 주모자들은 관군에 포로가 되었고, 허위는 잔여 의병 가운데서 포군 1백여 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아 상주 및 김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킨 후 북상하여 충북 진천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즈음 근신(近臣) 전경운(田慶雲)이 전달한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의진을 해산하였다.

3 척사론자에서 혁신유림으로

허위는 의진 해산 후 진보에 있던 첫째 형을 찾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1899년 신기선의 추천에 의해서 중앙의 관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허위는 성균관 박사(成均館 博士),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평리원 수반판사(平理院 首班判事)를 두루 거친 뒤, 1904년 8월에는 평리원 서리 재판장(平理院 署理 裁判長)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허위는 평리원에서 공정하고 신속하게 일처리를 하면서 권세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으로 인해 많은 칭송을 받았다. 허위는 중앙 관직에 진출해 있던 기간 장지연과 교류를 하면서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허위의 사상 전환의 단면은 1904년 8월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었을 때, 정부에 건의한 10가지 조목 가운데 학교 건립, 철도와 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을 주장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강고한 척사론자에서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혁신 유림이 된 것이다.

일제는 한국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함으로써 한국침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국의 군사요충지를 합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고 나왔다. 이와 같은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허위는 이상천, 박규병 등의 관료 동지들과 함께 전국에 일본을 배척하는 내용의 통문을 돌리고 침략을 규탄하였다.

4 다시 의병이되어 13도 창의군을 실질적으로 이끌다

허위는 1907년 9월 연천, 적성, 철원 등지를 무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허위는 주로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면서 각지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친일파들을 소탕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또한 허위는 대한제국의 해산군인들을 다수 받아들여 의진의 전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의진의 규모가 확대되자 허위의 휘하 의병부대와 이인영 의병부대를 주축으로 전국 의병의 연합체인 13도창군이 조직하게 된다, 이를 위해 허위의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본거지를 경기도 양주로 이동하였고 창의군(倡義軍) 결성을 위해 전국 각지의 의진들이 양주로 모여들어 48개 의진 1만 명 규모가 되었다. 결국 강원도를 기반으로 하는 이인영(李麟榮) 계열 의진[민긍호(閔肯鎬)이구채(李求采)·방인관(方仁寬)·정봉준(鄭鳳俊) 등]과 경기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허위 계열 의진[박정빈(朴正斌)·연기우(延基羽) 등], 그리고 충청도를 활동무대로 하던 이강년 부대 등이 중심이 13도 창의대진소(이하 13도 창의군)를 구성하게 된다. 규모는 약 10,000명이고 이 중 양총(洋銃)을 가진 포수는 약 3,000명 정도였다.

13도 창의군의 목표는 서울진공작전이었다. 13도 창의군의 원래 계획은 동대문 밖에 전군을 이동시켜 부대를 정비한 후 서울로 진격해 통감부를 공격하고 을사늑약을 파기한 후 국권회복을 하고자 도모했다.

13도 창의군은 연합의진이었지만 급조된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부대 간의 긴밀한 협조에는 미흡한 부분도 있었다. 일본군과 교전 중 13도 창의군은 서울 공격을 목표로 진격하였고 군사장 허위는 선발대 300여 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나아갔다. 당시 13도 창의군 지도부의 서울 진공작전 목적은 아래와 같았다.

그 목적은 서울로 들어가 통감부를 타격하고 연합을 이루고 종래의 소위 신협약 등을 파기하여 대대적 활동을 기도함이라 우선 신임하는 인물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을 순방하고 통문을 한통씩 전달하니 그 개략적인 의도는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불행한 상황을 상세히 진술하고 또 의병은 순수 애국적인 혈단이니 열강도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 줄 것과 또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는 국가 동성응원을 호소하였다.

13도 창의군의 지휘부는 먼저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점령하고 외교적 담판을 벌이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에 주재 중인 각국공사의 외교적 지원을 받고자 했다. 이 같은 지원을 발판으로 국제법상 유리한 입장에서 국권회복 문제를 놓고 통감부와 담판을 짓고자 한 것이다. 또한 서울 진공작전을 통해 통감부에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일본과 맺은 각종 조약을 폐기하고 친일 정부를 축출하고자 했다.

서울로 진격한 허위의 선발대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인 1908년 1월 15일경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장시간 전투를 벌였지만 후퇴하였다. 선발대의 후퇴로 13도 창의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상당수의 탄약을 소진하였다. 게다가 1908년 1월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상을 당하자 의병 부대를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문경으로 내려갔다. 이인영은 귀향하면서 “義를 중지하라”라는 통문을 각 진에 보냈고 결국 의진은 해산되었다. 결과적으로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서울을 공격하고 되찾으려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한 것이다. 13도 창의군 해산 후 경기북부지역의 의병 항쟁은 약화되었다.

허위는 의병전쟁은 한국의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의당 국제법상 교전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일제 헌병 기밀보고에 따르면 이인영 명의로 된 이 선언문 1부는 영국 정부로 보내졌다고 한다.

서울 진공작전 뒤, 허위는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항일전을 재개하였다. 허위의 휘하에는 조인환(曺仁煥), 권준(權俊), 왕회종(王會鍾), 김수민(金秀敏), 이은찬 등의 유명한 의병장들이 있어 각기 부대를 나누어 거느리고 도처에서 게릴라전을 통해 일본군을 괴롭혔다.

의병부대들은 일본군의 진지를 기습하고 전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마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하고, 친일파들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의 군량은 체계적으로 공급된 반면에 납세와 미곡의 반출은 허위의 명령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허위가 활동하던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는 허위를 총수로 하는 의병부대의 군정 아래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허위는 군율을 정하여 민폐가 없도록 하였고, 군비 조달 시에는 군표를 발행하여 뒷날 보상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 결과 주민들은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항일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허위의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허위에게 해산을 종용해 왔다. 그러나 허위는 이를 즉각 거절하였다. 또한 친일 유교단체인 대동학회 회장 신기선이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허위는 이를 단호히 물리치고 최후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다.

1908년 4월 21일 허위는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박정빈 등 쟁쟁한 의병장과 연명으로 전 민족이 의병대열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전국에 발송하였다. 허위는 머지않아 대규모 결전의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5월에는 박노천과 이기학 등의 부하들을 서울로 보내어 통감부에 광무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회복, 통감부 철거, 그리고 이권 침탈의 중지 등을 골자로 하는 30여 개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5 법정에서 일제의 침략의도를 꿰뚫어보다

그러나 허위의 투쟁은 1908년 6월 11일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에 의해 체포되면서 계속되지 못하게 된다. 허위는 휘하에 있다가 포로가 된 한 의병으로부터 소재지를 탐지한 철원헌병대에 의해 경기도 영평군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서울로 압송된 허위는 일본군 헌병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다. 이때 허위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일제의 한국침략의 부당성을 당당히 성토함으로써 의병장으로서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

허위는 한일의정서의 부당함과 침략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특히 한일의정서가 국제공법에 위반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국토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일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의병 활동 후 판결 받는 법정에서도 이어진다. 허위는 항소심인 경성공소원 재판에서 「형법대전」 제195조에에 의해 교수형이 선고되자 허위는 “일찍이 범하지 않은 금전과 양곡 약탈, 인명을 살해한” 혐의와 일본인 판사만으로 이루어진 법정은 부당하다며 상고하였다. 허위의 상고심은 대심원 형사부에서 진행되었다.

대심원은 원심판결서에 허위가 금전과 양곡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해했다는 내용이 없고, 따라서 이에 의거하여 피고를 처형하기로 한 것이 아니니 본 상고의 이유는 전혀 피고가 오해한 것에서 나온 것이거나 또는 가공의 논지를 만들어 고의로 원판결을 비난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결국 본 상고 논지는 모두 적법한 이유가 아니라며 첫 번째 기각 사유를 밝혔다.

원심에서 피고를 심판할 당시에 본국 법관이 아니라 말이 통하지도 않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인이었으니, 재판소의 구성을 완전하게 하지 않고서 심판한 것은 법에 위배되는 점, 즉 일본인 판사만으로 이루어진 재판이므로 부당하다는 이유에 대해서는 재판부의 구성에서 조선인 판사가 있었다는 점에서 허위의 상고를 기각했다. 또한 일본인 판사만으로 재판한다고 하여도 균등하게 법령에 의거하여 한국 판사라는 관직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피고를 심판함에는 무방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또한 재판과정에서 판검사들이 의병을 일으킨 연유를 묻자, 허위는 “너희들은 비록 한국에서 났으나 한결같이 교활한 왜적의 走狗이니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나는 大韓國의 당당한 義兵將이다. 너희들과 변론하고자 하지 않으니 다시는 묻지 말라”라고 응수했다. 이면우라는 한국인 판사가 있다지만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재판관이 “義兵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이냐?”라고 묻자 “義兵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요, 대장은 바로 나다” 외치면서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으면 의병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병을 일으킨 것이 이토가 아니고 누구이겠느냐”라며 재판의 부당성과 의병 봉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재판과정에서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허위는 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시,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향년 5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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