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황현

황현[黃玹]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다

1855년(철종 6) ~ 1910년(순종 4)

황현 대표 이미지

매천 황현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2~1898)·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과 더불어 ‘한말삼재(韓末三才)’로 불렸던 인물이다. 시(詩)·서(書)·화(畵)에 더해 문(文)·사(史)에까지 능해 오절(五絶)이라고도 불렸다. 생원시에서 장원급제하였으나, 출사를 거부하고 낙향하여 시문을 쓰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국권이 위협받는 시대 속에서 지식인의 시대정신을 일깨우며 47년간의 한말(韓末) 정세와 사회상을 기록한 역사서인 『매천야록』을 지었다. 1910년 9월, 한일병합의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하였으며, 유고집으로 『매천집(梅泉集)』을 남겼다.

2 황희(黃喜) 정승의 후손, 일찍이 문장(文章)을 드날리다

1855년 음력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서석촌(西石村, 현재의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서 황현은 태어났다. 세종대의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기는 하나, 황현 대에 이르기까지 7대 200여 년간 출사한 선대가 없어 사대부 가문의 이름만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황현의 할아버지는 순천, 광양 등지에서 상업 활동으로 축적한 재산으로 몇천 권의 책을 사서 모았다. 훗날 태어날 손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자신이 못다 이룬 출사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룰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다. 어렸을 적부터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신동(神童)’으로 소문났던 그였다.

황현은 나라 안팎으로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시기에 나고 자랐다.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했고,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임술민란(壬戌民亂)이 시작되어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1863년에는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이 정권을 잡았으며,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이 이어졌다. 1873년 고종의 친정체제가 시작되고, 항구의 문호를 열면서 유교 지식인 사회는 위정척사와 개화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개항을 계기로 전통사회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던 역사의 격변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약관(弱冠)의 나이를 훌쩍 지난 황현은 광양에서 서책만 읽고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서울에는 영재 이건창이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에, 전국 각지의 젊은 문사(文士)들은 그와 교유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고 있었다. 황현은 이건창의 문하에 모여든 창강 김택영, 강위(姜瑋), 여규형(呂圭亨), 신헌(申憲) 등과 어울리며 자신의 문장을 알리고 사상적·철학적 성장을 도모하였다. 이건창과 김택영은 양명학의 주류인 강화학파의 핵심인물이었으며, 강위도 실학과 개화사상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30세 무렵의 황현은 이미 장안에서 시문으로 이름난 문장가였다.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에 빛내주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와 주위의 권유로, 1883년과 1888년에 각각 특설 보거과(保擧科) 초시(初試)와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하지만 당시 과거제도의 타락상과 세력다툼이 벌어지던 어지러운 정국을 잘 알고 있었던 황현은 출사를 포기하고 구례로 내려가 은거하며 학문과 저술에 열중하게 된다. 시(詩)·서(書)·화(畵)에 더해 문(文)·사(史)에까지 능해 오절(五絶)이라 불렸던 그는, 시골에 칩거하며 수많은 시와 글을 지었다. 그중 글을 배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고민하며 집필에 몰두한 저술이 바로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3 황현의 비판적 역사 쓰기, 매천야록

『매천야록』은 1864년 고종 즉위부터 1910년 한일병합까지 47년간의 파란만장한 한말(韓末)의 정세와 사회상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여기서 야록(野錄)이란, 야사(野史)와 동의어로 정사(正史)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왕조시대의 일반적 역사서 편찬 방식인 관찬(官撰)과는 다르게, 개인적 차원에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방식인 사찬(私撰)의 역사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저자의 의견을 덧붙일 수 있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황현이 나고 자랐던 당시는 격동의 시대였기에 이러한 야승(野乘)류의 저술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그중 지금까지도 유명한 저술로 김윤식(金允植)의 『음청사(陰晴史)』와 『속음청사(續陰晴史)』, 그리고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를 꼽을 수 있다.

『매천야록』의 본서는 6권 7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1에는 1864년에서 1893년까지 30년간 발생한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관련된 사안들을 수록하고 있다. 대원군의 집정, 안동 김씨의 몰락, 민비와 대원군의 알력,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청과 일본의 각축 등이 그 예시이다. 권2부터 권6까지는 1894년 이후 17년간의 일을 편년체 형식으로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1894년 이후의 상황이 그 전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황현은 1894년부터 책을 본격적으로 집필하였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던 1894년 무렵은 부모상을 마치고 저술활동을 재개했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황현은 낙향한 선비이자 위정척사파 계열의 유림으로, 조선 중기의 여론정치를 이끌던 사림(士林)과 같이 시골에 은거하면서도 현실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매천야록』에 당시의 국내외 정세, 각종 제도와 관습, 민간의 사소한 일이나 소문까지도 자세히 기록한 것은 그가 이러한 현실참여적 지식인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매천야록』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있다. 예컨대 『매천야록』에서 황현은 동학군을 시종일관 ‘적(敵)’ 또는 ‘비도(匪徒)’라고 칭하는데, 이렇듯 ‘동학농민운동’을 보수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던 유림으로서의 한계를 지적받는 식이다. 또한 내용 중 역사적 사실 혹은 연대의 착오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국권 피탈로 이어지는 혼란의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자기 시대의 총체적인 모습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포착하려 했던 소산인 『매천야록』은 그 시대를 살아갔던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이 집약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4 ‘을사조약’의 체결, 기록하는 지식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정한론(征韓論, 19세기 말 일본 정계에서 유행한 논의로, 일본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사상)이 등장한 1860년대부터 일본이 계획해오던 ‘한국 보호국화’라는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황현은 늘 그래왔듯 『매천야록』에 자세한 전후 상황을 기록했다. ‘을사조약’의 체결 경위, 을사오적(乙巳五賊),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폐쇄, 참정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의 해임 등을 다루었다. 또한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자결 순국한 민영환(閔泳渙),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등을 기리기도 했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을사조약의 체결은 사실상 국권의 상실과도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점차 의병을 조직하거나 해외로 망명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황현의 절친한 지우(知友)인 김택영 또한 중국 망명을 준비하면서 황현에게 편지를 보내 망명에 동행할 의사를 물었다. 황현은 가족들 몰래 여비를 마련하여 그와 함께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종가의 조카가 죽는 바람에 그 남은 가솔을 보살펴야 했고, 자연히 망명 계획은 취소되었다.

한국에 남은 황현은 저술 활동과 교육 사업을 통해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의열 활동을 지속해나갔다. 1906년 이후 최익현(崔益鉉), 임병찬(林炳瓚), 이강년(李康年), 허위(許蔿) 등 의병장의 주도 아래 전국 각처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국권수호운동으로 인식한 황현은 『매천야록』에 그 추이를 상세히 기록하면서 시대사를 증언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특히 그가 머물던 호남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는 죽창 대신 붓을 들고 의병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겼다. 1908년 이후에는 『매천야록』에 매월 「의보(義報)」를 게재하여 의병들의 전황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1909년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의병투쟁의 서술에 할애할 정도였다.

한편,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1906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된 이후 전국적으로 각종 학회·협회 및 사립학교 설립의 열기가 퍼져 나갔다. 당시 설립된 학회 및 학교는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서북학회 및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서울의 보성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황현 또한 이러한 신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하여 신식학교 설립을 준비하였다. 그는 의연금 모금을 위해 「사립호양학교 모연소(私立壺陽學校 募捐疏)」를 지어 주민들의 사재 출연(出捐)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08년 8월 구례에 신문화 학교인 호양학교(壺陽學校)가 설립되었다. 황현의 문인들인 박태현, 권석우, 왕수환 등은 교원으로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신식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교육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립학교령」이 제정·시행되고 재정난까지 겹치면서, 한일병합 이후 폐교를 맞이하였다.

5 망국(亡國)을 맞이하는 한 지식인의 자세, 절명시(絶命詩)

1910년 8월 27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었다.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지 약 5년 만의 일이었다. 그사이 빈발했던 의병운동은 모두 진압되었고, 군대는 해산당했다. 사법권 역시 박탈당했고, 고종황제는 강제 폐위되었다. 결국 순종황제는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알렸다.

황현이 이 소식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9월 5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을 통해서였다. 황현은 그날 찾아온 손님을 물리고, 문을 닫고 앉아서 「절명시」 4수와 유서(遺書)를 지었다. 상은 검소하게 치러달라, 그리고 시문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그러고는 소주에 다량의 아편을 타서 마시고, 9월 7일 새벽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조수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오/무궁화 이 세계는 망하고 말았구려/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기도 합니다.
(「절명시」 1수)

황현이 죽기 직전 남긴 「절명시」를 보면,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 글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결국 그는 망국에 대한 지식인의 책임을 다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생토록 붓끝을 벼리면서 시대의 아픔을 기록으로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