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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申翼熙]

독립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 정치인

1894년(고종 31) ~ 1956년

신익희 대표 이미지

신익희

개인소장

1 개요

신익희(申翼熙)는 1894년 경기도 광주에서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을 지낸 신단(申檀)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본유학을 통해 근대학문을 익힌 그는 3·1운동을 주도했고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으로서 해방을 맞은 그는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었으나, 이후 임정과 결별하고 이승만 지지로 돌아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정부 수립 이후, 그는 집권 연장을 위한 이승만의 위법적 정치를 비판하며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운동 도중 뇌일혈로 급사했다.

2 어린 시절부터 3·1운동까지

신익희는 어려서는 집안에 개설된 가내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908년 15세가 되던 해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진학하여 영어와 근대학문을 배웠다. 외국어학교 졸업 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유학했다. 유학시절 그는 동경유학생들의 집합체이자 1919년 2·8 독립운동을 내용적으로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 일본 유학생들뿐 아니라 국내 신지식인층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 겸 발행인을 지냈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1917년에는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8년에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법률상업학교로 옮겨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법률담당 강사로서 비교헌법·국제공법·재정학 등을 강의했다.

신익희는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가 국내에 전해지자 일본 유학생 출신인 최남선, 최린, 송진우 등과 함께 독립운동 모의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 과정에서 1918년 11월 해외 단체 및 동포 유지와의 연락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발발한 지 하루 뒤인 3월 2일 귀국한 신익희는 3월 5일 서울역에서 시작된 제2차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일제의 검거를 피해 3월 14일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3 중국 망명과 독립 운동

3·1운동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상해에서도 1919년 4월 8일부터 임시정부 수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는데 신익희는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을 제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신익희는 이후, 의정원 외무위원장, 의정원 부의장 등의 역할을 맡으며 초기 임시정부에서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했고, 세칭 한성정부인 대조선공화국, 노령의 국민의회정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이 모색되자 법무차장을 맡아 통합 임시정부의 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이승만의 거취 문제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계의 분란이 가열되자 신익희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운동을 일으켜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통과시켰고, 독립운동세력 내 정파 간 갈등이 심화되며 임시정부의 진로가 불투명해지자 1922년 말 경 임시정부를 떠났다.

임시정부를 떠난 이후, 그는 무력투쟁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에 직면해 독립운동계에 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이러한 독립운동계의 기류에 조응해 통일전선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35년 7월, 신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등 5당 통합을 통한 민족혁명당의 탄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후 독립운동 정당들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의열단의 김원봉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양분되어 체계를 정비하게 되었다. 이에 민족혁명당의 선전부와 국민부 요원으로 활동하던 신익희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에 참여했고, 1938년 9월에는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당원들을 중심으로 한구(漢口)에서 조직된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인 조선청년전위동맹에 참여하기도 했다. 신익희는 전위동맹원들을 이끌고 민족전선 산하의 무력 조직으로서 1938년 10월 창설된 조선의용대에도 참여하였으나, 1941년 3월에서 5월에 걸쳐 전위동맹원들이 속한 조선의용대 제2지대 병력이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하자 이에 동참하지 않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복귀했다.

중경에 돌아온 신익희는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해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김구와 김원봉의 협상으로 1942년 5월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자 20여년 만에 임시정부에 다시 합류했다. 조소앙이 위원장으로 있던 외교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는 1944년 5월에는 내각을 강화시키는 개헌과 함께 동포사회와 임시정부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을 주요 업무로 하는 내무부 부장을 맡게 되었다.

4 임시정부 봉대에서 이승만 지지로의 선회

해방 이후, 신익희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1945년 12월 2일 환국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으로서 임정의 권위와 국민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임시정부의 하부조직으로 정치공작대를 조직했다. 정치공작대는 12월 6일 중앙조직을 결성한 후 보름 만에 남북한 전역에 걸친 군 단위 조직이 짜여졌고, 이어 약 한 달 만에 면 단위 조직까지 대체적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조직 범위도 매우 광범위하였고 조직 결성 속도도 매우 빨랐다. 이 정치공작대는 이후 임정의 활동 기반이자 신익희의 세력기반이 되었다. 신익희는 또한 일제시기 행정 관료였던 사람들 중에서 건국 일선에서 실제 행정을 담당할 사람들을 선발하여 행정연구위원회를 만들어 시정(施政)을 위한 자료수집과 연구를 담당하도록 했다.

1945년 12월,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 문제 해결 방향을 규정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문이 국내에 전해지며 이른바 신탁통치 파동이 벌어졌다. 이에 임시정부는 즉시 신탁통치에 대한 절대 거부 의사를 표시하고, 각 정당 대표와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선포하며 12월 28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해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가 주도한 반탁운동에서 내무부장인 신익희는 내무부 예하 행정연구위원회로 하여금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전국 군정청에 소속된 한인 직원을 임정 산하에 두는 자주적인 시정의 내용을 담은 임정 포고문을 작성케 하고 정치공작대로 하여금 반탁시위를 진행할 것을 지시하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2월 31일에는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임시정부의 정권 접수를 선포한 국자(國字) 제1호와 제2호가 발표되었다. 이 같은 임시정부의 반탁운동에 대해 미군정은 정권을 탈취하려는 쿠데타로 받아들였다. 이후 미군정은 김구를 비롯한 임정에 압력을 가해 정치공작대의 해체를 요구하였고, 임정은 결국 정치공작대와 정치위원회를 해체하고 이를 우파세력의 반탁운동 통일조직으로서 1946년 2월 8일 수립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에 합류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임정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신익희는 즉시 정치공작대를 독촉에 합류시키지 않고 오히려 정치공작대의 조직을 자신의 주도 아래 확대해 나갔다. 그러던 중 지방을 순회하던 이승만이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발언하자, 그는 이 주장에 찬성하며 비로소 정치공작대와 정치위원회를 이승만이 주도하던 독촉에 합류시켰다. 이로써 신익희는 공식적으로 임정과 결별하고 이승만 지지를 본격화하게 되었다. 그 보상으로 신익희는 독촉 전국대표대회에서 부의장에 선임됨으로써 우파진영의 명실상부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이후 신익희는 이승만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 참여하였다.

5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다

신익희는 1948년 5·10선거에서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되어 제헌국회에서 부의장이 되었고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서 국회의장을 맡았다. 그는 1950년 5월에 치러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경기도 광주에서 재선되어 국회의장에 선출되었고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도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신익희는 1948년 11월 13일 윤치영 등과 함께 친이승만계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 1949년 2월에는 정부 수립 이후 조각 문제로 이승만과 사이가 멀어진 한국민주당 김성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국민주당과 함께 야당인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위원장을 맡으며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위해 벌인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정국에서는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을 강조하며 이승만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사사오입개헌 이후 야당 측 의원들이 대여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구성한 원내 교섭단체인 호헌동지회의 수립과 이를 바탕으로 1955년 9월 통합 야당인 민주당이 발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56년 신익희는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사사오입개헌 이후 이승만 정권에 민심이 점점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신익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피폐한 민생을 살리겠다며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선거에 나섰다. 1956년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신익희의 서울 유세는 약 40만 명의 인파를 모으는 전대미문의 정치바람을 일으켰고 정권교체는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서울 유세 후 불과 이틀도 되지 않은 5월 5일 새벽, 호남선 열차를 타고 유세를 위해 전주로 향하던 그는 열차 안에서 갑작스런 뇌일혈로 급사했다. 신익희 사후 진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그에게 던져진 추모표도 185만여 표나 되었다.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그는 서울 우이동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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